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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8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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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안용복이 지킨 국토의 막내

어부 안용복이 지킨 국토의 막내

우리 민족을 소나무에다 곧잘 비유한다. 생태적으로 소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참고 견디는 힘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기름진 토 양에서보다 오히려 척박한 땅에서 그 생명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나무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일수록 소나무 같은 인물이 그립다.

이번 기행은 한사람의 천한 어부로 태어나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야욕으로부터 지킨 안용복의 유적을 찾아 울릉도로 떠난다. 울릉도 뱃길은 포항, 삼척, 속초에서 뜬다. 포항은 거리가 가장 멀지만, 쾌속선이 다니기 때문에 2시간 30분이면 닿는다. 속초에 서는 카타마란호로 4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울릉도는 우리나라 섬 가운데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이다. 가장 가깝다는 강원도 삼척에서 긋는다고 해도 직선거리가 13 7Km나 되는 국토의 막내섬이다. 울릉도라는 지명도 중국시인 도연명이 쓴 '무릉도원'의 '무릉'에서 비맧되었다. 무릉(울릉)이란 곧 신선들이 사는 상상의 섬을 가리키며, '성인봉'이라는 이름도 신선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옛 문헌상 중 울릉도 이야기를 처음 꺼낸 책은 고려 때 일연선사가 쓴 <삼국유사>이다. '섬 오랑캐(울릉도 원주민)가 바 닷물의 깊음만 믿고 교만하여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이찬 박이종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이종이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배에 싣고 위협해 말하기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으리라'하니 오랑캐들이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라는 대목이다.

그 후 울릉도는 옛 문헌 곳곳에 단편적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중환의 <택리지> '...숙종 때 삼척영장이 이틀만에 도착 하여 큰 돌산이 바다 가운데 솟아있는 것을 보았다. 언덕에 오르니 사람은 살고 있지 않고 그 터만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울릉도는 오랜 역사동안 사람이 살다가 말다가 했던 모양이다.

난세의 영웅 안용복 울릉도를 지킨 난세의 영웅 안용복,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적은 도동 선착장에 서 있는 기념비 하나뿐이었다. 기념비엔 '장군'이라는 호칭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천민계층에 속하는 부산 출신의 어부였다. 당시는 동래부였던 부산 좌천동에 서 태어난 그는 젊은 날 좌수영의 능노군으로 있었다. 능노군이란 노젖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당시 부산포에 있던 왜관에 출입 하면서 일본말을 배웠다.

1693년 능노군으로 군역을 마친 그는 어민 40여명과 함께 울릉도 부근으로 전복을 따러 나갔다. 거기서 그는 일본의 오타니 가 문의 어부들과 부딪쳤다.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오타니에게 '도해면허'를 주어 울릉도와 독도근해의 어로활동을 하게 하 였다. 안용복은 일본 어부들에게 왜 남의 바다에 와서 고기를 잡느냐고 항의하다가 결국 숫적인 열세에 밀려 일본 오키사마로 납 치되고 만다. 18세기 일본사학자 오키시마가 쓴 <죽도고>에 따르면, 당시 안용복은 서른여섯살이었으며, 키가 작고 마마자 국이 있는 검은 얼굴이었다고 한다. 안용복은 오키시마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과정서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땅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죄인 신분으로 다시 요나코를 거쳐서 도쿠가와 막부로 끌려가게 된다. 일본측 문헌인 <통항일람>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막부의 조사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에서 불과 하루 거리이지만, 일본 땅에서는 닷새 거리이므로 분명히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의 주장에 굴복된 막부는 안용복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땅이 아니라는 서계를 건네주고는 풀어준다. 일본측 자료인 <인부연표>의 당시 기록에는 안용복을 송환할 때 호송사 2명, 요리사 3명, 병졸 5명 등등을 딸 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송환 도중 나가사키에서 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기고, 다시 대마도에 90일동안 구금되고 만다. 구금에서 풀려나 조 선으로 송환된 뒤에도 그는 부산의 왜관에 50일동안 구금된다. 안용복에게 준 서계의 내용을 뜯어고친 대마도주는 안용복을 동래 부 동헌으로 넘기면서 항의를 한다. 대마도주가 서계의 내용을 뜯어고쳐서 울릉도와 독도의 관활권을 주장한 것은 당시 대마도 사람들이 울릉도 근해로 북류하는 쿠 로시오 해류를 이용하여 울릉도와 독도부근으로 어로를 많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인 조선 태종 때도 대마도 주는 대마도 사람들을 울릉도에 들어가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차례 조정에 간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조선은 대마도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우리 바다로 들어오면 말썽이 생긴다는 이유로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당시 우리 조정은 울릉도에 농토가 없고 땅이 척박하여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도 정책을 써왔다. 그 틈을 타서 1618년 일본 막부가 오타니 가문에 도해면허를 내준 것이었다. 당시 노론 지배하의 조정은 임진왜란 후 일본국과 국교를 고려하여 안용복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양국간에 불씨를 만든 안용복을 은근히 나무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장희빈이 축출되고 인현왕후가 복권되면서 소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소론은 노 론과는 달리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서계를 보냈다. 이에 대해 일본 막부는 1696년 1월 28일 일본인들의 울릉 도와 독도 근해에 대한 도해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 관계에 있는 대마도주는 막부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우리 조정에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이때 안용복이 다시 나섰다. 그는 다앙관인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고 자칭하고, 울릉도로 건너가 일본인들을 내쫓고 그 길로 일본으로 들어 갔다. 막부를 찾아가 강력한 항의 끝에 다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땅이 아니다'는 확약을 얻어낸 안용복은 다시 대마도주를 찾 아가 항의했다. 대마도주가 말을 듣지 않자, 막부가 우리 조정으로 보내는 물자들을 대마도주가 횡령했다는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하여 도주로부터 완전굴복을 얻어냈다. <번례집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헌에서 대마도주는 비로소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영유권을 인정하였다.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땅으로 문서화

뱃길로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온 그는 이 사실을 비변사에 알렸다. 그나, 조정은 함부로 벼슬을 사칭하고 양국간에 외교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하였다. 그는 국경을 함부로 넘나들었다는 범경죄 죄목으로 상형선고를 받았다. 그때, 남구만과 몇 몇 신하들이 나서서 그의 공적을 변호해주어서 간신히 유배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안용복의 기록은 거기서 끝이 나 있다. 그가 어디로 유배를 갔는지, 언제 죽어 어디에 묻혔는지 역사는 말이 없다. 후에 나온 <고암집>에는 그가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천민출신의 신분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땅으로 문서화하는 역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안용복 이후 조정은 울릉도와 독 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2년에 한 차례씩 순시하도록 하였다.<성호사설>은 그를 '안용복은 영웅에 비길만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충혼비 옆에 청마 유치환의 <울릉도> 시비가 있고, 시비 위쪽으로 독도박물관이 있다. 울릉도 문헌을 비맧하여 현재 관장으로 있는 이종학 선생이 평생동안 수집했다는 독도에 관한 자료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것이다. 안용복 이후 울릉도와 독도 를 지켜온 이들의 가슴 찡한 사료들도 많다. 이규원도 그 중 한사람이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은 해양진출을 활발히 하면서 울릉도와 독도를 불법으로 드나들며 도벌을 저질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1881 이규원을 울릉도 감찰사로 파견하였다. 그는 섬을 시찰하고 돌아와 울릉도를 포기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고, 그 후 조정은 공도정 책을 철폐하면서 다시 백성들을 울릉도로 이주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용복과 함께 울릉도를 지켜낸 역사의 인물이다.

자료출처 : http://www.npc.or.kr/ 김재일/두레문화기행 회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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