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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2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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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 독도파수꾼

안용복...어부의 신분, 울릉도·독도 당찬 파수꾼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한국 역사의 정통성 문제에 대해서 국내외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왜곡,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독도 분쟁과 같은 역사적 현안들이 당면 문제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독도 문제이다.

일찍이 소국을 형성했던 우산국(울릉도)은 512년(지증왕 13년) 신라의 이사부에 의해 정복되면서 우리의 역사 권역으로 포섭되었다. 고려 이래 울릉도는 울진현에 편제되었고,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도 강원도 울진현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종 이후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하면서 울릉도와 독도는 빈 섬으로 방치되었다. 틈을 엿보던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이후 독도와 울릉도에 슬금슬금 드나들게 되었다. 1618년에는 돗토리현의 상인 2명이 에도의 막부로부터 '도해(渡海) 면허권'을 획득하여 고기를 잡고 나무를 베어 가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와 마쓰시마(松島)라 부르면서 영토 침탈에 대한 강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은 다케시마(竹島)로 부르는 독도를 17세기 일본에서는 마쓰시마(松島)로, 울릉도를 다케시마로 불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주의를 크게 끄는 인물이 바로 안용복(安龍福)이다. 그는 일개 어부의 몸으로 두 차례나 도일, 일본 관리들과 담판을 벌인 끝에 일본으로 넘어갈 뻔한 울릉도와 독도를 되찾아온 사람이다. 안용복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현존하는 그의 호패에 따르면, 그는 1658년에 출생했으며 아주 작은 키(4척1촌)에 가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마마 자국으로 얼굴이 심하게 얽은 외모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부산 좌천동에서 살았으며, 좌수영 소속 능로군으로 복무한 경력이 있는 어부였다. 능로군은 전선(戰船)에서 노를 젓는 수졸을 말한다.

안용복은 숙종 19년(1693) 봄 박어둔(朴於屯)을 비롯한 40여명의 어부들과 함께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 그 곳에는 이미 일본 돗토리현의 어부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양국 어부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고, 안용복·박어둔 두 사람은 일본 어부들에 의해 오키도(隱岐島)로 납치되어 갔다. 안용복은 그곳에서 "조선 사람이 조선 땅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우리를 잡아 왔느냐"고 도주(島主)에게 따졌다. 안용복의 당돌한 항의를 받게 된 도주는 상관인 돗토리현 태수에게 이들을 이송시켰다. 사건을 보고받은 태수는 당대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관백(關白)에게 처리 방안을 문의했다. 그리하여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시키겠다"는 막부의 서계(書啓)를 받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마도주의 생각은 달랐다. 황금어장인 울릉도와 독도의 편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대마도주는 안용복으로부터 막부의 서계를 빼앗는가 하면, 50일을 더 억류시켰다. 부산포의 왜관으로 이송한 뒤에도 40일이나 더 구금한 뒤에야 동래부로 넘겼다. 동래부에서 안용복은 서계 강탈 사건에 대해 소상하게 보고했지만, 동래부사는 도리어 그를 '월경죄인'으로 몰아 감금해 버렸다.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한 대마도주는 귤진중(橘眞重)을 사신으로 파견, 울릉도가 일본의 '죽도'라고 주장하면서 조선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해 달라는 엉뚱한 요구를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죽도설'이 대마도주의 계략이었음을 간파한 조선 조정의 대응으로 일본측의 요구는 먹혀 들지 않았다.

감옥에서 풀려난 안용복은 일본인들의 이와 같은 작태에 분개했다. 그리하여 일본측과의 직접 담판을 결심한 그는 숙종 22년(1696) 봄 울산을 출발, 울릉도로 향했다. 그곳에서 일본 어부들을 만난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따져 들었다. 안용복의 기세에 놀란 일본 어부들이 독도를 거쳐 일본으로 도망치자, 그는 다시 이들을 추적하여 오키도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안용복은 서계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울릉도·독도 어로의 불법성을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렇지만 도주는 돗토리현 태수에게 보고하겠다고만 했을 뿐 열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을

 
박어둔의 호적(규장각 소장 '울산부 호적대장'). 안용복과 함께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던 박어둔이 1687년 청량면 목도리 16통5호에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2
박어둔의 호적(규장각 소장 '울산부 호적대장'). 안용복과 함께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던 박어둔이 1687년 청량면 목도리 16통5호에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안용복은 사전 통고도 없이 돗토리현으로 곧장 내달렸다.

돗토리현 청사에서 태수와 마주 앉은 안용복은 울릉도가 조선 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막부의 서계를 3년 전에 받았다는 점, 대마도주가 서계를 중간에서 탈취했다는 점 등을 언급하면서, 그 죄상을 관백에게 알리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때 정3품 당상관 '울릉·우산양도 감세장'이라 사칭한 것으로 보아, 그는 조선 조정에서 정식으로 파견한 사절이라는 사실을 은연 중에 과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용복이 이처럼 강력하게 나오자 태수는 위축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서계 탈취 사건의 확대를 우려한 대마도주 노부(宗義眞)는 돗토리현 태수를 찾아 와 상소 제출을 막아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안용복은 상소 제출건을 보류하는 조건으로 돗토리현 태수로부터 향후 "울릉도를 침범하는 자들이 있을 경우 엄중 처벌하겠다"는 다짐을 받아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안용복은 같은 해 8월 일행과 함께 강원도 양양으로 귀환했다. 그런데 안용복 일행을 기다린 것은 조정의 혹독한 심문이었다. 강원도 감사 심평은 귀국한 안용복 일행을 '범경 죄인'으로 몰아 체포, 서울로 압송했다.

대마도주는 같은 해 10월 조선의 '도해(渡海) 역관'에게 막부의 뜻을 전달하고, 이듬해(1697) 2월에는 동래부사 이세재에게 서계를 보내어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 금지를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로써 다케시마와 마쓰시마가 곧 조선의 울릉도와 독도임이 재천명되기에 이르렀다. 안용복의 두 차례에 걸친 도일 활동은 조선 초 이래 공도 정책으로 방치되었던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영토 편입 야욕으로부터 지켜 내고, 일본의 최고 권력기관으로부터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받은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정작 울릉도와 독도의 파수꾼 노릇을 자임한 안용복은 '월경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귀양형에 처해졌다.

지금도 일본은 독도가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1618년부터 70여년간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점유했다는 점, 막부의 서계가 일본 어선의 독도 항해까지를 금지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찾는다. 물론 당시의 서계에는 마쓰시마(독도)를 명시하는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독도가 울릉도의 엄연한 속도(屬島)였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대표적 지도인 '삼국접양지도'(1785년) '대일본지도'(1785년)에서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4척1촌의 작은키…검은얼굴에 마마자국

◇ 호패에 적힌 안용복

안용복과 박어둔이 차고 있던 호패는 오늘날 일본 오카시마의 '죽도고'에 그 내용이 남아 있다. 안용복의 호패에는 앞면에 '동래', 그 아래로 나이(33세), 신장(4척1촌), 용모(검은 얼굴과 마마자국), 주인(京居吳忠秋)이 표기되어 있다. 뒷면에는 간지 '경오' 아래로 거주지(부산 좌천1리 제14통 3호)가 적혀 있다. 이 호패에 따르면 1658년생인 안용복이 1차 도일했던 시기는 그의 나이 36세 나던 해였다. 주인으로부터 전복을 잡아 바치라는 지시를 받고 울릉도로 출어했다는 오카시마의 기록이 시사하듯이, 그는 서울에 거주하는 주인 오충추에게 어물을 상납해야만 했던 하인 신분이었다. 오충추는 서울에 살면서 동래를 거점으로 대일 무역에 종사했던 역관이거나 부상대고(富商大賈)였을 것이다.

박어둔의 호패에는 앞면에 '울산', 그 아래로 성명, 나이(30세), 태어난 해의 간지(○丑)가, 뒷면에는 '경오' 아래로 거주지(청량 목도리 제12통 5호)가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1687년에 작성된 울산부 호적대장에는 박엇둔(朴於叱屯)이라는 이름이 발견된다. 그는 청량면 목도리 16통 5호에 거주했으며, 병영 염간(鹽干)이라는 직역 명칭을 가진 양인 어부(良海尺)였다. 호패와 호적에서 거주지와 나이가 같은 것으로 미루어, 양자는 동일인 곧 박어둔(朴於屯)에 대한 서로 다른 표기라 생각된다. 호적에서는 이두의 된소리(叱)가 덧붙여져 '박엇둔'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이 호패와 다를 뿐이다.

이준구<대구한의대학교 교수> 2004.6.22.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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