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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비사 - 일본 '독도 폭파' 주장했다


한일간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인 1962년 한일 정치회담에 서 일본측이 독도의 소유권 문제와 관련, "독도를 폭파해 없애버리자" 고 주장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특히 독도문제가 한일회담 과정에서 현안으로 등장하고 급기야 일본 측이 `독도폭파론'까지 제기한 것은 당시 회담을 주도했던 김종필 중 앙정보부장이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긴급훈령을 묵살한 데 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났다.

청구권 문제로 한창 한일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2차회담 직전) 박정희 의장은 김종필 부장에 보낸 긴급 훈령에서 `독도문제는 절대 한일회담의 의제로 삼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김종필 부장은 2차회담에서 `제3국 중재안'을 내놓아 결과적으로 지금까지도 독도의 영유권 문제로 한일 양국이 다투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61년 5.16 쿠데타의 성공에서부터 65년 6월22일의 한 일 기본조약 조인에 이르기까지 제6차 및 제7차 한일회담의 전과정을 담은 실록 박정희와 한일회담(한송출판사.이도성 저)에서 밝혀졌다. 곧 출간예정인 이 책은 `김종필-오히라 메모', `박정희가 이케다 당시 일본수상에게 보낸 편지 등 지금까지 전혀 공개되지 않은 한일 비밀외교 자료들을 토대로 저자가 설명을 붙이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이 책은 또 동북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이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던 사실, 그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의 작성 경위, 메모 작성 이후의 막후 한일협상과 한일기본조약의 정식 조인 등을 다루고 있다. 실록 박정희와 한일회담중 주요 부분을 요약한다.

62년 11월의 김종필-오히라의 2차 회담은 독도문제에 확실하게 쐐기 를 박을 수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62년 11월19일의 정치회담 예비절충 제15차 회의 회의록에 나타나 있듯이 김종필은 국제사법재판 소 상정 합의를 끈질기게 요구하는 오히라 수상에 맞서 `제3국 중재안'을 역제안했다.

그러나 김종필 부장의 이러한 제안은 미숙한 외교술에서 기인한 사려 깊지 못한 행위였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김종필 부장의 제3국 중재안에 대해 한일 양국이 공방을 벌인 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제15차 회의록 일부.

우시로쿠 아시아 국장 : 이 자리에서 당장 토의할 수 있는 문제는 청구권 명목과 독도문제를 제3국 조정에 넘기는 문제일 것인 바, 독도문제 는 일본 정부가 국회 등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말하여 온 터이므로 이케다 수상의 결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 이케다 수상이 귀국하기 전에는 토의가 불가능하다.

최영택 참사관 : 독도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게 되면 승패가 명백하게 돼 모처럼 조성된 좋은 분위기가 깨질 염려가 있으므로 제3국 에 의한 조정에 맡기자는 제의를 김 부장(김종필)이 하게 된 것이며, 이는 김 부장의 최종적인 생각인 것이다.

독도에 관하여는 '자기 영토를 왜 제3국의 조정에 맡기는가'라고 시비하는 강경론자도 있을 것인 바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는 데에 한국이 상대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상하니 회담이 타결된 후 시간을 두고 해결하자는 것이다.

한일협정 조인을 두달 가량 남겨 둔 65년 4월13일 김동조 수석대표와 다카스기 일본측 수석대표간 회담에서 다카스기는 김종필 부장의 제3 국 중재안에 대해 "결과에 대한 준수 가능성이 희박할 뿐 아니라 한국은 제3국으로서 미국을 예상하는 모양인데 양국간의 문제가 미국의 영향 아래서 해결되는 인상을 주게 돼 야당의 반대가 강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이유를 들어 "일본 정부로서는 거중조정안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김동조 수석대표는 "한때 시사되었다고 하는 거중조정은 한국 여론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김종필 부장의 제안과는 전혀 다른 정부 입장을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되고 말았다. 설사 김 부장의 제안이 타당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김종필 부장은 독도 문제를 회담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박정희 의장의 훈령을 무시해버렸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일본에게 있어서 독도문제는 처음부터 어업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측의 평화선에 대응하기 위한 협상카드였을 뿐 실제로 독도를 자기 영토로 삼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정치회담 예비절충(62년 9월3일)에서 일본측 대표가 `중요하지도 않은 섬이니 폭파시켜 버리자'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세키 아시아 국장 : 청구권 문제가 해결 단계에 가면 여러가지 문제를 토의케 될 것이다. 독도에 관한 문제도 이 때에 토의하게 될 것이다.
최영택 참사관 : 독도 문제를 왜 또 꺼내려고 하는가. 고노씨는 독도는 국교가 정상화되면 피차가 가지라고 하더라도 갖지 않을 정도의 섬이 라는 재미있는 말을 했는데 일측이 왜 꺼내려고 하는가.
이세키 국장 : 사실상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파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최 참사관 : 회담 도중에 이 문제를 내놓겠다는 말인가.
이세키 국장 : 그렇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기로 하는 것을 정해야 겠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의장은 혁명공약으로 내세운 조국 근대화를 하는데 절실히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이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한일회담 타결에 의한 청구권 자금의 확보에 있었다.

"국내에서는 한일수교와 관련하여 정치자금 수수의 흑막이 있느니, 굴욕적이니 해서 비판도 많고 반대도 격심하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미국 놈들에게 밀가루나 얻어먹고 사는게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냐. 나라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설사 굴욕적인 측면이 있더라도 우리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두고두고 왜놈들에게 더 큰 굴욕을 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 의장이 대일막후교섭을 맡기며 박태준에게 한 말).

박정희 의장이 한일회담 타결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케네디 정부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미끼로 한일국교 정상화 를 마구 밀어붙였다. 박정희의 방미 초청이 그랬고 그 이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박정희 의장에게 보낸 친서 내용은 숫제 종용에 가까웠다.

한일회담의 두가지 뼈대는 청구권과 평화선 협상에 관한 것이었다. 청구권의 명분을 무엇으로 하느냐를 두고 제6차 한일회담에서 양국은 팽팽히 맞섰다. 일본측은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고 한국에 있어서 민생안전과 경제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무상 내지 유상의 경제원조"라는 논리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한국측은 "청구권의 명분은 법적 근거에 의한 합리적 주장으로서 한일간의 불미스런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도 청구권 형식의 해결이 필요하다"고 맞섰다. 청구권 금액으로 한국측은 당초 6억달러, 일본측은 1억5천만달러를 제시했으며 이 숫자는 공식 비공식 접촉을 거쳐 4억달러대 2억달러로 암묵적 접근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김종필-오히라간의 정치 절충으로 넘겨지게 된다.

김종필 부장과 오히라 외상은 1962년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회담했다. 기록을 보면 이 회담은 노회한 오히라 외상의 페이스대로 진행됐다. 김-오히라 회담의 핵심의제는 청구권 문제였는데 김부장은 액수 타결에만 주력함으로써 청구권의 명분이나 독도문제와 관련, 뒷날 `굴욕적'이란 비판의 소지를 남겼다.

첫 대좌에서 오히라 외상은 명목을 언급하지 않은 채 타결 가능선을 3억달러라고 제시했는데 김 부장은 이에 `청구권이 얼마라고는 말하지 않겠으나 정부 대 정부 차관을 포함해 6억달러선이 돼야 한다'고 주장 했다. 그러자 오히라 외상은 기다렸다는 듯 명분과 관련, 일본 국민과 국회를 납득시키기 위해 `독립 축하금 또는 원조금 등의 어휘를 안출 (案出)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의 사정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했다.

김 부장은 이 결정적 고비에서 명확한 반대입장을 밝히지 않고 넘어 갔으며 오히라 외상은 자신의 주장이 양해된 것으로 해석해 버렸다. 이러한 내용은 주일대표부와 일 외무성 당국자간에 두 사람의 회담에 관 한 대사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보고를 받고 놀란 박정희 의장은 1차 회담 후 미국을 방문중인 김부장에게 긴급훈령을 보내 `독립 축하금 또는 경제협력의 명분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며 반드시 청구권이라는 문구가 표시되어야 한다'고 지시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 의장의 훈령에도 불구, 2차회담 후 백지 두 장에 작성된 `김-오히라 메모'의 어느 구석에도 `유상' `무상'이란 명목 이 외에 `청구권'이란 표시를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청구권 문제는 `무상 3억달러, 정부 차관 2억달러, 민간신용공여 1억달러 등 6억달러' 선에서 타결됐다.

`김-오히라 메모'는 후일 김종필 자신을 엄청난 정치적 궁지로 몰아 넣는 화근이 되는데 이 메모는 1차회담에서 해석 차이로 말썽이 빚어지자 2차회담 사흘전 열린 제14차 예비절충 과정에서 `단독회담에서 생길 수 있는 해석 차이를 막기 위해 메모를 남기자'는 배의환(대표부 대사)의 제의를 일본측이 받아들임으로써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1995/6/7 (뉴스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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