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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최초 관측' 조선 첫 울릉도 수토사 장한상

육안으로 충분히 관측·기록하며 조선의 인식을 명확히 증명하다


장한상의 울릉도 사적 등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의성조문국박물관


‘울릉도는 우리 땅’ 안용복의 손에 들려온 일본 문서

1693년 12월, 조선의 어부 안용복 일행이 돌아왔다. 안용복 일행 40명은 그 해 4월 18일 울릉도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중 일본 돗토리번 오야가(大谷家) 소속의 어부들과 조업권을 놓고 다투다가 끌려갔다. 조선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물건’은 따로 있었다. 안용복의 손을 들려온 일본의 서계(書契)였다. 서계는 ‘본국 죽도(本國 竹島)’에 조선인 출어를 금지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울릉도를 ‘우리땅 죽도’라고 불렀다.

일본이 조선 땅에서 조선인을 납치한 것도 모자라, 마치 인심 쓰듯 납치한 사람을 돌려보내면서 그 손에 울릉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문서를 들려 보냈던 것이다. 조정은 강경론과 온건론으로 갈렸다. 온건론이 우세했다. 좌의정 목내선(睦來善)과 우의정 민암(閔黯)등 남인 계열의 온건론자들은 100년 전 임진왜란을 떠올리며 300년 동안 버려둔 섬 때문에 새로운 분란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조정은 하나의 섬을 놓고 조선의 울릉도와 일본이 말하는 죽도를 별개의 섬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답서를 보냈다. 울릉도를 우리 땅 ‘폐경지울릉도(弊境之鬱陵島·우리 영토인 울릉도)’라고 표현하면서 동시에 일본이 주장하는 죽도에 대해서는 ‘귀계죽도(貴界竹島·귀국 영토인 죽도)에는 조선인 출어를 금지시키겠다’고 했다. 외교적 모호함을 넘어서 ‘사오정식’ 답변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하늘에서 본 경덕사와 유물관


이 사건, 울릉도를 놓고 조선과 일본이 벌인 영토분쟁을 조선은 ‘울릉도쟁계(鬱陵島爭界)’, 일본은 ‘죽도일건(竹島一件)’라고 부른다. 조선은 오래전부터 울릉도를 국토의 ‘계륵’으로 여겼다. 울릉도에 사람이 거주하게 하면 왜구를 끌어들이게 되고 그리하면 울릉도를 거점으로 삼은 왜구들이 강원도로 쳐들어와 국토를 유린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또 죄를 지은 범법자들의 도피처가 될 것이라며 두고두고 두통거리로 생각했다.

1403년 (태종3)에 울릉도에 사는 백성들을 전부 육지로 들어와 살게 하는 쇄환정책을 펼쳤다. 1417년(태종17)에는 완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됐다. 울릉도가 무인도화되자 1407년(태종7) 대마도의 소 사디시게(宗貞茂)가 울릉도로 옮겨 살겠다며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1614년(광해군6) 일본 대마도번이 여러 촌락을 거닐고 가서 울릉도에 살겠으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은 이번에도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분명히 하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의성군 구천명 용사리에 있는 경덕사. 장시규·장한상 부자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다



남구만이 받아낸 일본인 ‘울릉도 도해금지령’

1694년, 울릉도 영토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갑술환국으로 소론과 서인이 집권했다. 숙종은 남구만(南九萬·1629~ 1711)을 영의정으로 발탁했다. 남구만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던 1673년에 조선 땅이지만 방치되고 있던 북방의 땅, 북변폐사군과 후주진에 진영을 설치하고 백성을 이주시켜 옛 강토를 회복하고 방어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을 정도로 변방 영토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남구만은 1년 전 ‘우리 영토인 울릉도, 귀국영토인 죽도’라고 쓴 문제의 서계를 다시 쓰도록 지시했다. 예조참판 이여의 명의로 쓴 서계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안용복피랍사건은 일본인이 조선의 영역에 들어와 조선 사람을 잡아간 일이므로 분명히 잘못된 일이라는 결론 내리고 일본이 그 잘못을 논하지 않아 신의성실의 도리를 위배했다고 지적했다.아울러 일본사람들이 다시는 울릉도를 오가며 사단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일본 막부는 죽도(울릉도)뿐만 아니라 ‘송도(松島, 독도)’까지 일본령이 아님을 확인하고 일본 어민들에게 ‘죽도 도해금지령’을 내렸다. 후속대책도 재빠르게 실행했다. ‘울릉도쟁계’는 울릉도를 오래 비워둔데다 조정이 섬 사정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보고 삼척포진 수군첨절제사를 수토사(搜討使)로 보내 울릉도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고 순찰 결과에 따라 백성을 모집하여 살게 하거나 진을 설치하여 지켜야 한다고 왕에게 건의했다.
 



경덕사와 나란히 서 있는 유물관. 순천장씨 문암공파 고무서 등 유물이 소장돼 있다


조선 관리 최초로 울릉도에 들어가다

조정은 이준명을 삼척수군첨절제사 겸 삼척영장으로 제수했다. 이준명은 삼척첨사 자리를 회피했다. 이 때문에 삼척첨사 임명은 한 달이 조금 더 지난 8월 14일에 이뤄졌다. 조정은 장한상(張漢相·1656~1724)을 삼척첨사 겸 삼척영장에 제수했다. 장한상은 36세의 젊은 나이에 종2품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낼 정도로 탄탄하게 출세 가도를 달렸으나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 사건에 연루돼 파직된 상태였다.

장한상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필경(弼卿), 호는 운암(雲巖)이다. 의성군 비안면 내산리에서 경기도 수군절제사를 지낸 아버지 장시규(張是奎), 어머니 진성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676년 무과에 급제한 뒤 1682년 통신사의 좌막(佐幕)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장한상은 부임하자 말자 수토준비에 들어갔다. 수토선을 건조하고 해로탐사, 식량·장비 조달, 항해 필요한 기술자와 병력 선발 등에 바쁘게 움직였다. 본격 수토에 앞서 8월 20일 군관 최세철에게 가볍고 빠른 배 두 척을 내주고 울릉도에 다녀오게 했다. 최세철은 9월 1일 돌아왔다.

장한상은 9월 19일 사시(巳時·오전 9시30분~10시30분께) 6척의 선박, 150명의 병력과 함께 삼척부 남면 장오리진을 출발했다. 선단은 전투함인 기선(騎船) 1척, 보급선인 복선(卜船) 1척, 급수선(汲水船) 4척으로 이뤘다. 항로는 만만치 않았다. 비바람이 세찼고 파도가 높았다. 선단은 뿔뿔이 흩어져 밤새도록 악천후와 힘겨운 사투를 벌인 끝에 24시간 만에 도착했다. 20일 울릉도에 도착한 장한상은 10월 3일까지 13일간 섬 곳곳을 조사하고 수색했다.

장한상이 중점적으로 조사한 사항은 3가지였다. 주민이 이주하여 살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지와 섬을 방어할 진을 설치할 수 있는 지, 현재 일본인들이 살고 있는 지다. 그는 이틀 동안 배를 타고 섬 주위를 돌아본 뒤 중봉(성인봉)에 올라 주위를 관측했다. 동쪽 5리쯤에 작은 섬, 오늘날의 죽도를 관측했고 바다 한가운데 동남쪽으로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섬을 봤다. 섬의 크기는 울릉도의 1/3이 안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이 섬이 독도다. 그는 조선 관리로는 최초로 독도를 눈으로 보고 기록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당시 조선의 인식을 증명한 사람이다.
 



의성조문국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장한상의 울릉도 수토 보고서인 ‘울릉도사적’


울릉 성인봉에서 독도를 관측하다


장한상은 지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눈으로만 보고 ‘동쪽 5리의 섬’이라거나 ‘동남쪽으로 아득히 먼 곳의 섬이 300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오늘날 울릉도와 독도의 거리는 230리 정도이므로 300리 떨어져 있다는 그의 보고서는 그가 독도 정보가 들어있는 지도에서 근거했을 것이라는 추정 가능케 한다.

장한상은 보고서에서도 일본과 우리 땅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그는 성인봉에서 일본 땅을 관측했으나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섬의 산봉우리에 올라 저 나라(일본) 강역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득할 뿐 눈에 들어오는 섬이 없어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라고 썼다.

반면 독도에 대해서는“섬의 크기는 울릉도의 1/3이 안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기록함으로써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만약 독도를 일본의 섬으로 생각했다면 ‘저 나라 강역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득할 뿐 눈에 들어오는 섬이 없다’라고 썼을 리 없기 때문이다.

장한상은 삼척으로 돌아온 뒤 3일째 되던 날 13일간의 조사내용을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에 기록해 비변사에 보고했다. 남구만은 장한상의 보고를 토대로 이주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1, 2년마다 수토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세웠다. 수토정책은 1894년(고종 31)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200년 동안 운용됐다.

장한상은 이후 1711년(숙종 37)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했다. 1712년 조선과 청나라 간에 국경 문제가 발생하자 압록강과 토문강(土門江) 일대에 대해 조사를 벌여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건립했다. 1716년(숙종 42)에는 경기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돼 아버지 장시규와 함께 부자가 경기도 절도사에 제수되는 기록을 남겼다. 황해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됐으나 역적 이이명(李頤命)에게 아첨했다는 이유로 파직됐다. 이듬해인 1724년(경종 4)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한상의 자취는 의성조문국박물관과 경덕사에 남아있다. 의성조문국박물관에는 ‘절도공양세실록’, ‘절도공양세비명’, ‘교동수사공만제록’ 등 3책을 비롯해 장한상이 받은 교지와 유서 등 120여 점이 보관되고 있다. ‘절도공양세실록’에 수토의 기록인 ‘울릉도사적’이 들어 있다. 의성군 구천면 용사리에 있는 경덕사는 장시규와 장한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경덕사 옆에 나란히 서있는 유물관에는 순천장씨 문암공파 문중의 고문서 유물 등이 소장돼 있었다.[김동완 작가/경북일보 2023.04.24]

독도본부 2023.04.20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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