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본부는    · 시작페이지로    · 즐겨찾기    · 오시는길    · 메일보내기    · 사이트맵

2020년 08월 13일 목요일

내용검색  

독도소식

시사초점

알림

참여마당

틀린보도 바로알기

  현재위치 > 독도본부 > 소식/시사/틀린보도 > 독도소식

 


日, '독도 국제법정 가자' … 韓, '영토 분쟁 없다'

일본, 네 차례 외교 각서로 국제법 들먹이며 공세
한국은 역사적 근거 강조한 반박 각서들로 일축


변영태 외무장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역사적 근거를 들어 강경하게 일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독도를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하여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하는 것처럼 호도하려는 술책도 한국 정부의 항의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일본 관리들이 독도로 몰려와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표목(標木)을 설치하는 것도 한국 정부의 단호한 대응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정부에게 남은 방법은 외교 전술 밖에 없었다. 일본은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전쟁과 무력행사를 금지한 평화헌법 때문에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총격과 박격포까지 발사하는 한국 독도경비대에 대해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는 1954년 9월 25일 주일(駐日)한국대표부에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갖고 가서 그 판정에 따르자는 구술서를 전달했다. 이 구술서는 “문제가 국제법의 기본원리의 해석을 포함한 ‘영유권 분쟁’인 한 분쟁을 판결하기 위해 국제재판소에 위탁하는 것이 오직 평등한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 영유권에 관한 ‘분쟁’이 있다고 기정사실화한 것이었다.


1954년 9월 25일 일본 정부가 주일한국대표부에 보내온 구술서.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갖고 가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변영태 외무, “일본이 ‘가짜 영토 분쟁’ 꾸며내” 성명 발표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1954년 10월 28일 일본 측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구술서를 주일한국대표부를 통해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이 구술서는 “한국은 독도에 대해 처음부터 영유권을 갖고 있으며, 어떠한 국제법정에서도 그 영유권 증명을 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며 “영토 분쟁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가짜 영토 분쟁’을 꾸며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일본이다”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변영태 외무장관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독도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물이다. 해방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의 품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 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모든 한민족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단 몇 개의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 영해(領海)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찌 독립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 탈취를 꾀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문학 교수 출신인 변영태는 업무 처리에 아주 꼼꼼했고 성명문을 직접 다듬고 고치는데 매우 정성을 쏟았다. 국제법을 들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갖고 가자는 일본 측의 주장에 대해 그가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며 강력하게 반박한 논리와 정서는 지금까지도 독도에 관한 한국 정부 대응의 기조가 되고 있다. 일본은 이후에도 한일회담이 진행되고 있던 1962년 독도 문제의 ICJ 행(行)을 주장했고,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2012년에도 같은 주장을 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그때마다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국내 재판은 원고가 소송을 제기하면 피고는 재판에 응해야 하지만 국제 재판은 원고와 피고의 쌍방이 동의하지 않으면 재판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 재판에 넘기자고 주장하는 것은 독도가 ‘분쟁 지역’이라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심어 주어 한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는 속셈이다.

더구나 일본은 ICJ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일본은 계속해서 ICJ 재판관을 배출했고, 한국은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일본은 ICJ에 가장 많은 지원금을 내는 국가이다. 따라서 일본은 밑져야 본전이고 잘하면 이길 수 있다는 속셈으로 독도 문제의 ICJ 행을 주장하는 것이다.

◇12년이나 걸려 일단락된 ‘독도 외교 각서 논쟁’

일본은 이와 함께 한국에 독도 문제에 관한 본격적인 외교 논쟁을 걸어왔다. 1952년 1월 18일 한국이 평화선을 선포한 직후부터 계속해서 항의하던 일본은 1953년 7월 13일 구술서의 첨부 문서로 ‘죽도(竹島)에 관한 일본 정부의 견해’라는 장문의 각서를 보내왔다.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의 두 측면에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 각서에 대해 한국 정부는 1953년 9월 9일 그 내용을 반박하는 장문의 각서를 보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1954년 2월 10일 다시 한국 측 각서를 반박하는 두 번째 각서를 보내왔고, 한국 정부는 1954년 9월 25일 이를 반박하는 각서를 보냈다. 일본 정부는 1956년 9월 20일 세 번째 각서를 보내왔고, 한국 정부는 1959년 1월 7일 이를 반박하는 각서를 보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1962년 7월 13일 네 번째 각서를 보내왔고,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1965년 “일본 측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하면서 독도 문제에 관한 한·일 간의 왕복 문서 공방은 끝났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반박하며 보낸 두번째 외교 각서.

한국과 일본은 일곱 차례에 걸친 외교 각서 작성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처음에는 두세 달 만에 반박 각서가 작성되던 것이 6개월로 늘어나고, 공방이 치열해지면서 다시 2~3년으로 길어져 총 12년이나 걸렸다. 독도 외교 각서 작성에는 양국의 외교관들은 물론 역사학자와 국제법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한국은 1947년 8월 제1차 울릉도·독도학술조사대에 참여한 뒤 ‘독도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쓴 신석호를 비롯하여 유홍렬·이선근·최남선 등 저명한 역사학자들과 독도 문제에 관해 국제법적 연구를 개척한 이한기·박관숙 등 국제법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독도 관련 주요 논점 대부분 드러나

한·일 두 나라가 주고받은 독도 외교 각서에는 많은 논점들이 들어 있었다. 이후에 독도 문제에서 쟁점이 되는 것들이 대부분 이때 드러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국의 학자들이 쟁점들에 관해 자기 나라의 입장을 강화해 줄 자료와 논리를 찾는 과정에서 본격적인 독도 연구가 시작됐다.

논점 가운데 첫 번째는 한국의 고문헌에 등장하는 우산도(于山島)가 독도인가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에 나오는 우산도 또는 삼봉도(三峯島)가 바로 독도이며, 이는 한국이 독도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시찰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우산도와 삼봉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18세기 중엽 정상기가 제작한 동국대지도의 울릉도 부근 모습. 울릉도 오른쪽에 '우산도'가 그려져 있다.

두 번째 논점은 독도를 일본이 영토로 관리한 적이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에도 막부의 3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시절에 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 두 가문에 독도를 하사했고, 독도가 울릉도로 가는 임시 정박지로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에도 막부가 두 집안에 부여한 ‘도해(渡海) 면허’는 원양 출어(出漁) 허가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세 번째 논점은 1693년 발생한 안용복 납치 사건에 대한 해석 차이였다. 한국 정부는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하는 일본인들에게 두 섬이 한국에 속함을 말하면서 엄중 경고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안용복의 진술은 근거가 없는 가상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네 번째 논점은 1906년 3월 시마네현 시찰단이 울릉도를 방문하여 1905년 1월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고 구두로 통고했을 때 울도 군수 심흥택이 중앙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이 보고서에 ‘본군소속독도(本郡所屬獨島)’라는 표현이 나오는 점을 들어 당시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심흥택이 시마네현 시찰단을 환대했고 이것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1906년 3월 울릉도 군수 심흥택이 중앙정부에 보낸 보고서. 일본이 '본군소속독도'를 자기 영토로 편입시켰다고 한다고 알렸다.

다섯 번째 논점은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독도의 ‘고유영토론’과 ‘선점론(先占論)’이었다. 당초 일본 정부는 무주지(無主地)였던 독도를 시마네현 고시(告示)를 통해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3차 각서부터 일본의 고유영토였던 독도를 근대법 절차에 따라 영토 편입 절차를 다시 밟았다고 주장을 바꾸었다. 한국 정부는 이 점을 파고들어 ‘무주지 선점론’과 ‘고유영토론’이 서로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여섯 번째 논점은 독도를 일본 행정구역에서 제외한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 제677호에 대한 해석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것이 독도의 주권에 관한 최종 결정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독도가 일본 영토로 남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일본 영토에 관해 SCAPIN 제677호의 내용을 변경하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0년 이상 계속된 독도 문제에 관한 한국과 일본의 ‘외교 각서 전쟁’에서 한국은 역사적 근거, 일본은 국제법적 근거를 각각 강조했고 서로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한국은 당시 외교적·학문적 역량의 현격한 격차에도 불구하고 선전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도 문제를 일선에서 담당한 외교관들의 사명감과 그를 적극적으로 도운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조선일보  2020.06.28]

독도본부 2020.07.20 www.dokdocenter.org
관련
내용
관련내용이 없습니다

 


| 개 요 | 이 책은 2008년도에 일본 중의원에서 독도문제와 ...

 

 
  Copyright ⓒ 2001.독도본부. All rights reserved
전화 02-747-3588 전송 02-738-2050 ⓔ-Mail : dokdo2058@korea.com
후원 : 기업은행 024-047973-01-019(독도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