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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독도 미군 폭격장 지정으로 맞불' 술책

'독도는 일본 영토’ 미국이 인정한 것처럼 誤認케 해
1948년 이어 1952년 9월 주일 미 공군이 독도 폭격


첫번 째 독도 폭격 사건이 발생한지 2주년이 되는 1950년 6월 8일 독도 동도의 몽돌해안에서 열린 '조난어민위령비' 제막식에서 우리 해군 병사들이 조총을 쏘고 있다.

1952년 9월 독도에 폭격 연습을 한 미군기들이 주일 미 공군 소속일 것이라는 제2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의 추정은 옳았다. 한국 외무부는 1952년 11월 10일 주한 미 대사관에 독도 폭격에 대해 엄중 항의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요구했다. 주한 미 대사관은 이를 유엔군 사령관에게 전달하면서 독도 폭격 중단을 요청했다.

주한 미 대사관은 1952년 12월 4일 한국 외무부에 독도에 대한 폭격을 중단할 예정이라고 답변했다. 일본 도쿄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부는 1952년 12월 18일자로 독도를 미 공군 폭격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중단했고, 1953년 1월 이 같은 사실을 한국 정부에 통보했다.

◇독도 폭격 연습장 지정, 일본 언론 보도에서 빼놓아

일본의 영토가 아닌 독도를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한 것은 폭격 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52년 7월 26일 열린 미·일 합동위원회였다. 1951년 9월 8일 체결된 미·일 안전보장조약과 그 후속조치로 1952년 2월 28일 조인된 미·일 행정협정에 따라 구성된 미·일 합동위원회는 일본 전역에 걸쳐 26곳을 미군의 해상연습장으로 지정했다.

미·일 합동위원회 결정 사항을 담은 일본 외무성 고시 제34호에는 ‘해상연습장 공군 훈련구역 제9’로 ‘죽도(竹島)폭격훈련구역’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는 독도가 거론되지 않았고, 관련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았다.

한국의 연구자들은 이처럼 보도 기사에서 독도만 쏙 빠진 사실을 들어 일본이 반 년 전 한국이 선포한 평화선에 맞불을 놓기 위해 독도를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하는 술책을 부린 뒤 이를 비밀에 붙였다고 주장한다.

또 1952년 9월 주일 미 공군의 세 차례 독도 폭격도 일본의 농간에 의한 것으로 의심한다.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독도 폭격 사건의 국제법적 쟁점 분석」이라는 논문에서 “독도를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한 뒤에도 거의 폭격 연습이 없다가 한국 정부가 파견한 제2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의 독도 조사활동에 맞춰 세 차례나 폭격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1952년 9월의 폭격은 학술조사대의 독도 조사를 저지하려는 목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독도가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주장이 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일방적으로 편입시킨 시마네현 출신인 야마모토 도시나가(山本利壽) 의원은 미·일 합동위원회 개최 두 달 전인 1952년 5월 23일 중의원 회의에서 “들리는 바에 따르면 정부에서는 죽도(竹島)를 미 공군의 해상 폭격 연습지로 예정하고 있다는데, 그것은 죽도를 연습지로 지정하는 것에 의해 일본 영토권을 확보한다고 하는 정치적 함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외무성 정무차관은 “그 설(說)과 같은 선에서 진행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독도를 주일 미군의 폭격 연습지로 지정하여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미국이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계략을 일본 정부가 꾸미고 있음을 고위 당국자가 직접 확인한 것이었다.

◇일본 외무성·언론 자료집, ‘독도는 한국 영토’ 표시

일본이 독도 문제에 다시 미국을 동원하는 술수를 짜낸 것은 일본 자체로는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51년 9월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독도가 한국 영토로 명기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본 영토로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1951년 10월 일본 외무성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비준요청서를 중의원에 제출하면서 첨부한 ‘일본영역참고도(日本領域參考圖)’는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고 한국 영토로 표시했다. 그 방식은 1946년 1월 29일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한국의 행정구역으로 명시한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 제677호에 첨부된 지도와 동일했다.

또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되고 한 달 뒤인 5월 25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사가 발행한 『대일(對日) 평화조약』이라는 해설서에 실린 ‘일본영역도(日本領域圖)’ 역시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배제해 한국 영토로 표시했다.

이처럼 일본 정부와 언론의 담당자들조차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이 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 미 대사관과 주일 미군이 일본에 호의적이라는 점을 독도 문제에 이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1951년 10월 일본 외무성이 중의원에 제출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비준동의안에 첨부된 '일본영역참고도'. 1946년 1월 발령된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 제677호 첨부지도와 같은 방식으로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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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된 뒤인 1952년 5월 일본 마이니치 신문사가 발행한 "대일 평화조약"이란 해설서에 실린 '일본영역도'. 역시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시했다.

다행히도 1952년 9월 미군기의 독도 폭격으로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9월 15일 1차 폭격 때 독도 인근에는 울릉도 통조림 공장 소속 선박인 광영호가 해녀들을 동원해서 소라와 전복 등을 따고 있었다. 하지만 해녀들과 선원들이 비행기 소리를 듣고 바로 대피해서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9월 22일과 24일 2·3차 폭격은 학술조사대가 독도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아서 피해가 없었다.

 
1952년 9월 22일 주일 미 공군기의 제2차 독도 폭격을 보도한 9월 25일자 조선일보.

그러나 독도 폭격은 당시 한국인에게 커다란 트라우마였다. 그로부터 4년 전인 1948년 6월 8일 역시 미군기가 독도에 폭탄을 떨어뜨려 인근에서 조업하고 있던 어부 16명이 사망하고 10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어선 20여 척이 파괴되는 참사가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1948년 6월의 독도 폭격 역시 주일 미 공군에 의한 것이었다. 1947년 9월 16일 발령된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 제1778호에 의해 독도가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지로 지정됐는데 한국 어민들은 물론 주한 미군과 미군정도 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독도 폭격 사건이 발생하자 좌익 세력의 반미(反美) 선동에 이용될 것을 우려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은 막 개원한 대한민국 국회에 정중한 사과 서한을 발송하는 한편 도쿄의 맥아더에게 비밀전문을 보내 독도를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 말 독도는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폭격 사건 현장인 독도와 울릉도·강원도에 살고 있는 피해자 가족에게 조사단을 보내 배상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했다.

◇일본 어민에게는 미리 알리고 출어 금지 시켜

한국의 연구자들은 1947년 9월 독도를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지로 지정한 SCAPIN 제1778호 역시 일본의 공작에 따른 것이 아니었나 의심한다. SCAPIN 제677호에 의해 일본의 행정구역에서 제외되고, SCAPIN 제1033호에 의해 일본 어부들의 접근이 금지된 독도를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한 것이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 당시는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이 독도와 울릉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팸플릿을 만들어 미국 국무부와 도쿄의 연합국최고사령부를 상대로 대대적인 선전을 펼치고 있던 시기였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저서 『독도 1947』에서 “1947~1948년의 사례가 1951~1952년 일본 정부 책략의 원천이 된 것인지, 아니면 두 사례가 모두 일본의 독도 영유권 확보를 위한 준비된 책략의 결과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독도의 미 공군 폭격 연습장 지정, 미 공군의 폭격, 한국 어민·어선의 피해 등은 두 사례가 정확히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계략이 더욱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자기 나라 어민에게는 독도 폭격 연습장 지정을 알리고 접근을 금지시키면서 한국 어민에게는 그런 조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1947년 9월의 SCAPIN 제1778호는 독도에 가까운 오키(隱岐) 열도와 혼슈 섬의 서부 해안 주민들에게 폭격 연습이 실시되기 2주 전에 미리 통보하도록 규정했다. 또 1952년 8월 일본 외무성 고시 제196호는 독도 인근에 대한 어선 출입을 금지했다.


1948년 6월 8일 발생한 독도 폭격 사건의 희생자와 피해 어선의 사진을 싣고 대대적으로 보도한 6월 16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시종 이 사건의 보도를 주도했다.

1948년 6월의 독도 폭격 사건은 독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을 고조시켰고,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공감대를 확산시켰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은 독도 폭격 사건의 피해를 알리는 한편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강조했다. 이 연재의 두 번째 글에 썼듯이 제1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의 부단장이었던 홍종인이 1948년 6월 17일자 조선일보에 ‘동해의 내 국토/ 슬프다 유혈의 기록-답사 회고’라는 글을 실은 것도 이때였다. 국회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됐고, 언론과 정당·사회단체들은 한목소리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배상을 요구했다. 독도 폭격 사건의 희생자 유가족에게 보내는 의연금과 성금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1950년 6월 8일 독도에서 열린 조난어민위령비 제막식에서 조재천 경상북도 지사가 헌화하고 있다.

독도 폭격 사건 발생 2주년을 맞은 1950년 6월 8일 독도 동도(東島)의 몽돌해안에서 경상북도 지사 조재천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난(遭難)어민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가로 43cm, 세로 136cm, 폭 19cm의 비석에는 피해 어민들의 넋을 위로하면서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밝히는 내용이 새겨졌다. 이렇게 해서 독도는 막 독립을 되찾은 신생 대한민국의 주권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1952년 두 번째 독도 폭격 사건의 반향이 컸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조선일보 2020.06.14]

독도본부  2020.06.14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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