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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선전물 만든 日 정부, 이를 퍼뜨린 美 외교관

‘주일 미국대사’ 시볼드가 미국과 맥아더사령부 배포
일본 외무성 “울릉도·독도는 일본 영토” 팸플릿 제작


1951년 1월 도쿄의 한 리셉션장에서 자리를 함께 한 덜레스 미국대통령특사, 시볼드 주일미정치고문, 요시다 시게루 일본총리(왼쪽부터). 친일적이었던 시볼드는 독도 문제에서 노골적으로 일본 편을 들었다.

독도 부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국 어선을 일본 어선이 공격한 것이 한국에 알려져 독도 문제가 관심사로 떠오르던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은 『일본 본토에 인접한 소도서(小島嶼)(Minor Islands Adjacent to Japan Proper) 제4권(Part IV)』이라는 영문(英文) 팸플릿을 간행했다.

1946년 11월 제1권, 1947년 3월 제2·3권이 각각 간행된 이 팸플릿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종결하는 연합국과 일본의 평화조약 체결을 앞두고 일본이 주변 섬들의 영토 귀속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연합국 측에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에 대한 처리 방침을 밝힌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 제8항은 “일본국의 주권은 혼슈(本州)·홋카이도(北海道)·큐슈(九州)·시코쿠(四國) 및 우리들이 정하는 작은 섬들(Minor Islands)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일본은 연합국에게 바로 그 ‘작은 섬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알리려고 한 것이었다. 이런 의도는 지리적 인접성을 표현한 것으로 느껴지는 영문 팸플릿의 제목보다 함께 간행된 일본어 팸플릿의 제목 『일본의 부속소도(付屬小島)』에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 팸플릿의 제1권은 소련과 영토 분쟁이 있는 쿠릴열도 남단의 ‘북방 영토’, 제2권은 오키나와 등 중국해의 섬들, 제3권은 오가사와라(小笠原)제도(諸島) 등 일본 남쪽의 섬들을 다루었고 제4권은 태평양과 동해의 섬들을 수록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의 부속소도』 제4권에 울릉도와 독도가 들어있었다. 일본이 연합국에게 독도뿐 아니라 울릉도까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는 팸플릿에 함께 수록된 지도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동해는 ‘일본해(Japan Sea)’로 표기하고 울릉도는 ‘Utsuryo’, 독도는 ‘Take’라는 일본 이름을 붙였다.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이 만든 '일본의 부속소도' 제4권에 첨부된 지도.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시했다.

팸플릿의 본문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각각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울릉도) 일본은 1004년부터 울릉도를 우루마섬으로 불렀다. 한국 정부는 1400년 이래로 이 섬에 대해 공도(空島) 정책을 고집했다. 그 사이 일본인이 이 섬에 진출하여 일본 어업기지가 됐다. 17세기 초부터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 섬의 소유권을 둘러싼 협상이 벌어졌고, 1697년 일본 막부(幕府)는 일본인이 울릉도에 가는 것을 금지했다. 하지만 한국은 이후에도 공도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일본인은 울릉도 개발을 주장하며 건너갔고, 한국 정부도 스스로 개발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결과를 내지 못했다.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으로 울릉도는 일본 땅이 됐다.

(독도) 일본은 고대부터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904년 시마네현 오키섬 주민들이 울릉도를 기지로 활용해서 독도에서 바다사자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울릉도는 한국 명칭이 있지만 독도는 한국 이름이 없으며, 한국에서 만든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서술은 울릉도에 대해서는 사실과 허위를 교묘히 섞어서 전체적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인식되도록 만들었다. 독도에 대해서는 대부분 허위 기술이었다. 일본 외무성이 이런 엉터리 내용을 담은 팸플릿을 만든 것은 당시 일본이 울릉도는 물론 독도 부근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을 어떻게든 뒤집어보려는 안간힘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뒤 일본에 진주한 미군은 연합국최고사령부(SCAP·Supreme Commander for Allied Powers)를 통해 일본을 점령 통치했다.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이름을 따서 맥아더사령부로도 불린 SCAP은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SCAP Instruction)으로 구체적인 행정 지시를 내렸다.

1946년 1월 29일 발표된 SCAPIN 제677호는 SCAP이 관할하는 일본과 남한의 행정구역을 지정하면서 독도를 제주도·울릉도와 함께 한국에 포함시켰다. 이어 1946년 6월 22일 발표된 SCAPIN 제1033호는 일본 선박이 독도 12해리 이내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다. ‘맥아더 라인’으로 불린 이 해양선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실효적 지배를 공식적으로 차단하는 결과를 낳았다.


1946년 1월 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가 발표한 SCAPIN 제677호에 첨부된 지도.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한국의 행정 구역으로 명시했다.


SCAPIN 제677호에 첨부된 지도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 부분을 확대한 것.

이처럼 명백하게 한국 영토인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터무니없는 팸플릿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광복 직후 독도 문제에 정통한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저서 『독도 1947』에서 당시 일본 외무성에서 영토 문제를 전담했던 가와카미 겐조를 지목했다. 전후(戰後) 일본의 독도 연구와 대응에 핵심 인물이었던 그가 1906년 시마네현이 울릉도와 독도 조사 결과를 담아서 펴낸 『죽도(竹島) 및 울릉도』라는 책을 참조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1909~1995)는 교토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본부와 대동아성(省)에서 근무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와 체질이몸에 밴 그는 패전 후 외무성에 들어가 인접국들과의 영토 분쟁에 관한 보고서 작성을 담당했다. 그는 훗날 소련공사를 역임했고, 퇴임 후에도 외무성 일을 도왔다.

해박한 역사·지리·국제법 지식을 토대로 ‘조약 문제의 권위자’로 활동한 가와카미는 독도 문제에도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그는 1950년대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 분쟁이 발생하자 일본 측 성명 작성을 주도했다. 그가 1953년 8월 펴낸 『죽도의 영유』는 당시까지 일본이 축적한 독도 관련 사실과 논리를 일본 측 입장에서 종합 정리한 것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독도 문제에 관한 탐구를 계속해서 1966년 『죽도의 역사지리학적 연구』를 다시 펴냈다. 이 책은 지금까지도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가와카미 겐조는 앞으로 독도 문제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 연재물의 곳곳에 등장할 것이다. 비록 적진(敵陣)의 이론가이고, 많은 부분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은폐했지만 나름대로 자기 나라의 국익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 그의 이름을 기억해 두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 외무성이 만든 팸플릿은 3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국 국무부에 20부가 발송됐다. 도쿄의 연합국최고사령부에도 10여부가 배포됐다. 일본의 영토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력 기관들에 일본 측의 입장을 담은 책자가 뿌려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도쿄에 있던 미국 외교관 시볼드였다.

윌리엄 시볼드(William Sebald·1901~1980)는 미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군인과 변호사를 거쳐 1945년 12월 외교관으로 변신했으며 그때부터 1952년 4월까지 도쿄에서 근무하며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일본어에 능통하고 부인이 일본계 영국인이었으며 많은 일본인 유력인사를 친구로 두었던 그는 대표적인 지일(知日)·친일(親日) 미국인이었다.

하급 외교관으로 출발한 그는 맥아더의 신임을 바탕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중국통(通)이자 반일(反日)적 인물로 연합국최고사령부에서 매우 중요한 직책이던 주일(駐日)미정치고문과 SCAP 외교국장을 겸임하던 조지 앳치슨이 1947년 8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고 그 자리를 경력과 나이가 부족한 시볼드가 물려받은 것은 일본에게는 다행이었고 한국에는 불행이었다.

일본 외무성 간부들은 사실상 주일 미국대사 역할을 하던 시볼드를 수시로 방문해 일본이 만든 보고서를 전달했다. 그들은 한밤중에 은밀히 만나기도 했다. 시볼드는 일본 측 공식 문건을 본국에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일본 편을 들었다.

그는 1949년 11월 미국 국무부가 대일(對日)평화조약 제5차 초안에서 독도를 제주도·거문도·울릉도와 함께 일본 영토에서 배제하자 “리앙쿠르암(다케시마)에 대한 재고를 건의함.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고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됨”이라는 전문을 보냈다. 19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 문제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쟁점으로 부상했을 때도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독도는 일본 영토가 맞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아직 정부도 수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이념 대립과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독도를 다시 노리는 일본의 조직적이고 집요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 문제에 큰 영향력을 가진 도쿄의 연합국최고사령부 중심에는 친일적인 미국 고위 외교관이 버티고 있었다. 바야흐로 한국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독도 영유권을 놓고 한·일 간의 한판 대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대는 연합국과 일본의 평화회담이 열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였다.[조선일보  2020.05.17]

독도본부 2020.05.19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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