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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낀 삶

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

부산 아지매(아주머니)들이 마실 삼아(동네를 산책한다는 의미) 우동 먹으러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쓰시마(對馬島)는 가까웠다. 현재 3만의 일본주민이 살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때가 되면 거의 본섬으로 떠나기 때문에 고등교육기관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한다. 그런데 이즈음 일 년에 20만 이상의 한국인이 다녀간단다. 그 가운데 6할이 당일치기라고 했다. 필요한 면세품 한 개만 제대로 구입하면 왕복비용이 빠진다는 농담은 그만큼 거리가 가깝다는 뜻의 우회적 표현이리라. 
 
그동안 쓰시마행을 기억으로 가만히 더듬어 보니 벌써 서너 번은 되는 것 같다. 어디로 가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랑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여행계의 명언은 이번 나들이에도 어김없이 몇 번씩 반복해서 들었다. 식탁 위에 어떤 음식이 올라오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맞은 편 의자에 누가 앉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요리계의 명언도 빠질 수는 없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말이 잦을수록 먹을 것과 볼거리가 별로 없는 여행지라는 의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또 올 일이 더 있을 터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고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소박할지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지정학적, 역사적 무게가 주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낀 틈새 국가로서 생존을 위한 주민들의 역사는 절박함 그 자체였다. 섬의 90%가 산지이므로 의식주 등 모든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적지 않는 물자를 원조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 반도도 열도도 모른 척했다. 양쪽에서 모두 버림받은 땅이었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했던가. 근대 이후 배를 만드는 조선술 및 운행하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군사적, 교통적 요충지로서 가치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반도와 열도에서 동시 구애를 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오래 전부터 두 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얼마나 잘하느냐 하는 것이 도주(島主)의 1차 정치능력 척도였다. 한일(韓日)의 경계인으로서 외교적 수사학의 극치기법을 임진란 때 보여줬다. 정명향도(征明嚮導: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안내를 해달라)에서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길을 빌려달라)로 바뀌더니 마지막에는 가도입명(假道入明 길을 빌려서 명나라로 들어가고자 한다)이란 문서까지 등장토록 만들었다. 마지막 ‘명나라에 들어간다’는 용어에는 전쟁이라는 의미까지 완전히 탈색시킨 것이다. 레토릭도 이 정도면 꾸미가 아니라 실력이다. 권력자의 전쟁의지까지 바꿀 순 없었지만 덕분에 문서를 수발하던 쓰시마 출신 외교사절의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임란 후에도 쓰시마가 살기 위한 방편으로 조선과 국교를 재개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결국 조선통신사를 유치해 관계 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쓰시마 세이잔지(西山寺·서산사)는 영빈관이었다. 이곳은 조선통신사 유숙처이기도 했다. 지금도 관광객과 참배객에게 숙방(宿坊·유스텔)을 제공하면서 자기만의 오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게이테츠 겐소(景轍玄蘇,1537~1611)스님이 창건했다. 그는 1580년 쓰시마로 이주한 후 1611년 이 절을 지었다. 당시 절 이름은 이테이안(以酊庵·이정암)이었다. 정(酊)은 그가 태어난 정유(丁酉)년이라는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만약 직접 이 이름을 붙였다면 자존감이 엄청 강한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다. 사전적으로 정(酊)은 ‘술 취하다’라는 뜻이다. 제정신으로는 하루도 살 수 없었던 시절이었을까? 아니면 묵는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든지 몽롱한(?)상태로 아주 편안한 휴식을 주겠다는 다짐이었을까? 

어쨌거나 겐소 스님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선말을 할줄 안다’는 이유로 반강제적으로 경계인의 삶에 편입됐다. 사무라이(武士)시대에 개인 의사가 존중될 리 없었다. 복종과 죽음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임란 이전에는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첩자 노릇을 했고 임란 때는 종군해 참모 노릇을 했으며 종전 후에는 국교 재개를 위한 외교사절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임진란을 배경으로 하는 대하사극에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한 까닭에 우리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조선과 일본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런저런 역할과 중재자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인물에 대한 평가 역시 부정과 긍정이 극단으로 함께 존재한다. 조선과 일본이라는 진영논리의 충돌 속에서 두 국가를 객관적으로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중도주의자의 삶은 수시 변신을 강요당하는 고달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처해진 상황에 따라 중간자로서 경계인으로 최선을 다했다. 양국 사이에 끼여 고통받는 쓰시마인과 함께 아파하면서 고심한 까닭이다.

많은 한국인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정서와 생활방식을 배려하지 않는 막무가내식 관광 때문인지 곳곳에 기본예절을 갖춰 줄 것을 요구하는 한글 안내문이 걸려있어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든다. 임란 직전에 세이잔지(西山寺)를 방문한 조선의 학봉 김성일(金誠一,1538~1593) 선생은 “한 집에서 의관을 갖춘 두 나라의 신하(一堂簪盖兩邦臣) 지역은 비록 다르지만 의식(儀式)은 비슷하구나.(區域雖殊義則均)”라는 시를 남겼다. 두 국가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경계지 여행’이 주는 의미를 좀 더 살릴 수 있도록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겠다.  [아시아경제 2016.11.29]

독도본부 2016.12.05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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