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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가 시집간 섬나라...이웃동네 대마도

조선왕조가 잃어버린 우리 땅, 한국인지 일본인지...

 <조선일보 주최 대마도 역사기행>울창한 숲의 보물섬, 잃어버린 우리땅에 가다허 동혁 /뉴데일리 객원논설위원

대마도(對馬島)는 부산에서 50km정도 떨어진, 육안으로 보이는 가까운 이웃섬이다.
반면 도쿄를 출발해서 대마도에 간다 함은 서울에서 울릉도를 가거나 뉴욕에서 알라스카나 아메리칸 사모아에 가는 기분과 같이 멀게 느껴지는 변방이다.
대마도는 한때는 한국과 공식적인 교류나 교통편이 거의 없던 시절이 있어서, 서울서 동경가는 것처럼 머나먼 외국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시모노세키로 가는 페리를 타거나 부산가는 비행기에서 대마도가 보이는데, 섬에는 아무런 건물도 보지이않아 하늘에서는 무인도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일본에서는 츠시마(對馬)를 츠시마지마(對馬島)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는데 왜 한국에서는 대마도라고 부르는가. 조선 시대에는 대마도가 한일 양쪽에서 특수영토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대마도는 별로 크지도 않은 섬인데 남북을 종단하는데 차로 두시간 걸린다는 섬, 부산에서 불꽃놀이를 하면 부산보다 훨씬 아름답게 보인다는 섬, 일제때 섬 어부들이 부산가서 영화보고 와서 자랑했다는 섬, 이곳의 일본어는 한국어 억양이 미묘하게 섞여있다는 섬, 그리고 러시아군이 상륙했을 때 주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섬이라 일본 본토보다 섬나라 기질이 더 강할 것 같은 섬...
이렇게 알고 있었다.



▲ 대마도 정중앙에 위치한 카미사카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대마도 리아스식 해안선.

여행 첫날 부산항에서 이즈하라 행 고속선을 탔다.
졸린 눈을 뜨니 금방 대마도가 오른쪽에 보인다.
이즈하라 항 도착직전까지 계속 한국 휴대폰 신호가 잡혔다.
일본에서 대마도를 지칭할 때 흔히 쓰는 ‘국경의 섬’임을 실감케 하는 한 증거였다.
대마도에 상륙하는 순간은 일본에 왔다기 보단 이렇게 금방 한국을 벗어 날 수 있는가,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한국은 현재 정치적 섬나라(島國)가 되어버린 상태라서 제일 가까운 외국땅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대마도, 조선 후반까지 한국땅이었던 역사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 후쿠오카보다 부산에서 절반이나 더 가까운 대마도 여행시간 지도.(관광자료에서)

대마도는 한국과 같은 노년기 지대의 완만한 산악 지형, 말머리처럼 생긴 두 섬이 마주보는 형태라서 우리 조상들은 대마도라 이름지어 불렀다.
자연경관만 놓고는 경상남도와 별로 다를 바 없다.
화산이 만든 일본 본토 특유의 험준한 산악이나 평야지대는 없다.
이런 환경속에 일본식 건물과 간판이 늘어서 있으니 역시 한국 아닌 일본이라는 이국적인 풍경이 신기하다. 

대마도는 한국 서해안에도 이런 복잡한 해안이 있을까 생각될 정도의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해
있었다.
평야가 적고 농경지가 별로 없어 예로부터 물자조달을 무역에 의지했다는 설명에 쉽게 납득이 갔다.
섬 종단에 두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산악 지형 때문이다.
버스에서 본 산자락 나무의 밀도는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빽빽했다.
이를 모두 베어다 팔면 일본 경제를 3년간 지탱할 수 있을 정도의 나무가 대마도의 보물이라고 한다.
부산에서 바라 볼 때 무인도 같다는 인상을 받은 것도 그 울창한 숲 때문이다.

 

▲ 대마도 최북단에 서 있는 팔각정 한국전망대.

일본 하면 섬 안에서의 생존을 위한 자기들만의 독특한 생활방식과 폐쇄적 성질이 특징인 섬나라기질(島國氣質)을 발휘하는 대표적인 나라 아닌가.
더구나 19세기중반 러시아군이 대마도에 상륙했을 때 대마도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사실 때문에, 일본보다 섬나라 기질이 훨씬 더 강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과 직항로가 개설된 지 20년이라지만, 본토 일본인들과는 달리 대마도인들은 한국인들과 상대하면 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이 섞인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올해 대마도 방문 한국 관광객이 20만을 넘었다는데, 이 20만 한국인 관광시대에 직항로 개설 20년이란 세월만으로는 인구 3만명 대마도인들의 외면적 규범(타테마에, 建前)을 정립하기엔 아직 부족한 모양이다.
이는 해방이후 한반도와 공식 교류가 한동안 끊겨서 생긴 일이지만, 어째든 대마도는 싫거나 좋거나 지정학적 위치상 일본과 대륙 (한반도)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 왔으며, 어떤 식으로든 한반도와 대륙을 계속 상대해야 했다.

신라의 박제상이 이곳에서 신라 눌지왕을 기리며 순국했고, 원나라의 침략군을 제일 처음 받아야 했으며, 임란때는 대마 번주(藩主) 종(宗: 일본 발음 소)씨가 조선침공의 선봉에 섰고, 그 후 조선통신사의 일본측 영접 기지였고, 해방 후 제주도 4.3사태때 발생한 난민의 피난소 역할을 했다.
이후 80년대까지는 한국 밀수 기지가 되어 마을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한다.
 
여기저기 보이는 한국어 간판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데, 식당이나 가게 점원 중에는 간단한 한국어를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고, 어떤 가게는 원화로 현금 결제도 가능했다.
세상에 한국 외에서 원화 현금 사용이 자유로운 곳, 처음 가본 대마도가 한국의 일부처럼 다가왔다.
옛부터 영남 상권이었다더니, 한국의 경제 위상이 커지고 관광객이 급증하여 생긴 현상이리라.

 
▲ 고추장을 넣어주는 우동 전골, 한국 관광객용 요리.

일부 식당에서는 한국인 입맛에 맞춘 요리가 나왔다.
우동 전골에 고추장이 들어 있었는데, 처음에는 대마도 전통 요리인줄 알았다.
물어보니 한국 단체 손님이 올 때 따로 내놓는다고, 매운 맛은 역시 덜했다.
지금 대마도에는 톤챵 とんちゃん 이라는 향토요리가 있다.
해방 후 재일한국인에 의해 전해진 일종의 제육볶음인데, 수십년간 대마도의 소울푸드로 정착해 왔다.
일본 본토에서 온 관광객들은 여기가 일본이야 한국이야 하면서 이국정서를 느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갈등도 있다.
우선 몇 년 전 마산시의회에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시위를 벌였고, 이를 전해 들은 일본 우익단체들이 떼거지로 몰려와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한다.
소위 혐한(嫌韓)시위.
지금은 한일 양쪽 서로 적응이 많이 되었지만, 3년 전 한국인 관광객의 매너문제를 일본 TV에서 다룬 일도 있다.
또한, 그 유명한 대마도 불상 절도 사건은 대마도 내에 충격을 주었으며. 한국인 출입금지 푯말을 붙인 가게도 얼마전만 해도 꽤 있었다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불어나는 한국 관광객으로 인해, 그런 푯말은 모두 사라졌고, 암묵적으로 한국인을 받지 않는 가게가 몇개 남아있는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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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 최대규모의 대저택.

이렇게 한국은 대마도의 식문화와 정신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그러나 주거문화는 그렇지 않았다.
어딜가나 완전한 일본식 건축양식이었으며 한일 절충 양식 같은 건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부산을 바라보는 한국전망대 팔각정이 내가 본 유일한 한국식 건축물이었으나, 바닷가에 서 있는 탓에 이 팔각정은 목제가 아닌 콘크리트 구조물이며, 바닷바람 피해를 줄인다며 처마 끝도 짤막하게 줄여놓은 모양새이다.
 
대마도의 경제사는 90년대를 기준으로 한국인 대상 관광업이 주라고 한다면, 그 이전은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수산업과 한국 밀수업으로 섬 경제를 지탱했다고 한다.
대마도에서 출발한 밀수선이 부산 동백섬 같은 데로 접근하면 해녀들이 밀수품을 건져 올리는 식이었다 한다.
80년대까지 일본산이라면 우리는 환호하지 않았나...
이때 이즈하라의 유흥가는 밀수경제의 호황을 누렸다는 설명이다.
또한 지구온난화 이전의 오징어잡이를 비롯한 수산업은 활황이어서, 연간 수천만엔의 소득을 올리는 가구가 흔했다고 한다.
도내에는 대저택이 곳곳에 보였고, 청소비만 한번에 수십만엔이 나온다는 성채 같은 집도 있었다.
 
특이한 건물을 들자면 남서부 코모다(小茂田)에 남아있는 돌지붕 집을 들 수 있다.
강풍에 대비한 건축 양식으로, 돌이 많은 대마도만의 건축 양식이다. 돌집이라 쥐가 들어오지 못하는 장점도 있다고 한다.
역시 바람 많고 돌 많은 제주도의 돌담집과 기원이 비슷하다 할 것이다.
나무가 우거진 대마도 특성상 산불 대비 방재 효과도 있으며, 화재가 나도 옆 집으로 옮겨 붙지 않게 집 사이공간을 많이 비워놓고 짓는다고 한다.

 
 ▲ 바람 많은 대마도의 가옥, 돌 지붕이 특징.

다시 식문화로 돌아와서, 고유의 향토요리들 가운데 이번에 맛본 대표적인 대마도 요리는 이시야키, 즉 ‘돌구이’이다.
야채와 각종 어패류를 장에 찍은 다음 뜨거운 돌 위에 익혀 먹는 요리다.
식당의 설명에 의하면, 석영반암(石英斑岩)이라는 돌을 쓰는데, 달궈진 돌이 방출하는 원적외선이 식재료를 더욱 맛있게 해준다고 한다. 
옛날 어부들이 생선을 잡아 해안에 널려있는 돌 위에 구워 먹은 것이 시초라고. 이즈하라의 100년 넘은 향토요리집 ‘시마모토’에서는 우리 도착시간에 맞춰 돌을 1시간동안 미리 데워서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있었다.
장을 제외하곤 특별히 양념을 치는 게 아니라서 담백하면서도 식재 고유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자연 요리이다.
식사 도중에 관광객 환영 전통무용 공연까지 해주었다.

 
 ▲ 돌 구이 '이시야키' 요리(왼쪽)와 전통 공연 장면.

덧붙여 향토과자 ‘카스마키’를 소개한다.
정확히는 요즘 한국 백화점에서 흔히 보는 일본과자의 일종으로, 얇게 썰어 만든 카스텔라로 값도 싸다.
카스마키의 어원은 카스텔라와 마키(巻き, 말이)의 조합어이다.
역사가 350년이 넘은 과자로, 나가사키에 들어온 당시의 포르투갈 산 희귀과자 카스텔라에다 팥을 넣어서, 에도(동경)의 도쿠가와 막부에 정기인사차 다녀 온 대마 번주(藩主) 종(宗)씨 일가나 조선통신사들에게 주로 대접했다고 한다.
대마도와 후쿠오카 사이에 있는 이키(壱岐) 섬에도 카스마키가 있는데, 이키 섬의 카스텔라는 대마도보다 더 얇은 것이 특징이라 한다.
디저트 문화가 일천한 한국과 비교하면, 이 섬에 350년전부터 이런 디저트가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일찌기 국제무역에 눈 뜬 섬나라의 개방문화 프리미엄 같아 부러웠다.
 

▲ 수백년 된 디저트 '카스마키' 카스텔라.

'츠시마 버거'라는 것도 있다.
대마도산 빨간 소(赤牛)고기와 오징어를 넣은 것이 특징인데, 오징어가 들어간 햄버거는 츠시마 버거가 유일하다고 한다.
대마도가 속한 규슈 지방의 햄버거라면 미군기지의 영향을 받은 '사세보 버거'가 유명하지만, 주문을 받아 즉석에서 구워주는 츠시마버거는 빵 맛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고기가 두껍고 부드러웠다.
이 버거는 부산역 앞과 현대백화점 부산점에서도 맛볼 수 있다.
  
이번 투어는 단국대 박물관장 정영호 교수가 가이드를 맡았다.
이 분은 대마도의 한일교류역사 발굴의 산 증인이다.
1977년 이래 방문횟수가 150회를 넘었고, 100회 방문 기념비가 대마도내에 있을 정도이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발자취를 밝혀 낸 것을 비롯, 대마도에 세워져 있는 박제상 순국비, 조선 선조 옹주묘, 백제 왕인박사 현창비, 조선역관 순국비, 통신사 이예 공적비, 통신사 황윤길 현창비, 조선통신사 기념비는 모두 정영호 교수가 직접 史實에 입각해 장소를 물색하여 대마도의 돌을 써서 세운 것들이다.
특히 한국전망대 바로 뒤에 있는 조선역관 순국비는 1703년 대마 번주 취임 축하사절로 가던 통역관 112인을 실은 배가 대마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전원 익사한 것을 추모한 비석인데, 대마도에서 112개의 돌을 채집하여 조성한 기념비이다.


       
 ▲ 한국 전망대 바로 뒤에 자리한 '조선 역관 순국비'에 사망자 이름이 빼곡하다.


근세까지 대마도를 지배한 대마도 번주 종(宗: 소)씨 일가의 내력은 대마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원나라 침입때 일가 몇 명을 희생시키며 섬을 지켜 두각을 나타냈고, 임진왜란때 코니시 유키나가군의 선봉에 섰는가 하면 이후 조선통신사를 극진히 대접하며 토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 속에서 어렵게 조선과 교역하며 부산에 왜관을 두는 등 조선조정으로부터도 대접을 받았다.
산악이 많은 대마도 특성상 자급자족은 불가능하여, 일본 본토보다 가까운 조선과의 교류는 대마도 생존의 필수선택사항이었다.
특히 대마도 민속박물관에는 번주 일가가 제작한, 대마도의 편의를 위해 조선과의 교류때 사용된 토쿠가와 막부의 위조국새를 보관 전시중인데, 이는 대마도의 지정학적 생존 역사 현실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 덕혜옹주와 남편 대마도 번주의 아들 소다케시. 신혼때의 모습.(자료사진)

근세에 들어 명치유신과 함께 시행된 폐번치현(廢藩置縣: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번주 소씨는 세습지위를 반납하고 백작이 된다.
이 백작 작위를 물려받은 소 타케시(宗武志)가 바로 덕혜옹주와 결혼한 주인공이다.
그는 동경제대 영문과를 나온 미남으로도 유명했는데, 패전후 백작 작위를 상실하고 대학교수를 지냈으며, 덕혜옹주와 결별 후 재혼한 일본여인 사이에 출생한 후손들은 현재 동경 옆 치바에서 거주한다.
지금도 대마도민들은 이들이 대마도에 오면 귀빈예우를 한다고 한다.

그 외에 대마도에는 러일전쟁을 대비해 건설한, 섬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운하, 그리고 미군 공습에 대비한 구 일본군 진지 등 근현대 관련 유적도 산재한다.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와 대륙을 천 수백 년 간 상대했던 대마도와 대마도인들이기에, 일본 본토인들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내가 가게에서 직접 부딪치며 감지한 대마도인들의 그 미묘한 긴장감은 바로 그런 역사적 굴곡의 표현이 본능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여기저기 걸려있는 ‘국경의 섬 대마’(国境の島 対馬) 슬로건은 단순한 관광용 선전이라기 보다는, 독도문제와 함께 한국에 대한 일본영토 의식의 확인, 즉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직후 '대마도부터 반환하라'고 요구했던 영토분쟁의 최전선임을 새삼 강조하려는 일본정부의 선언처럼 보이기도 했다. [뉴데일리 2016.11.27]

독도본부 2016.12.05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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