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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수선사의 현판 이야기

이석우(시인)

대마도에 가면 수선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이 절에는 74세의 노령으로 항일 의병활동을 하다 순국한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서 있다. 그 곁에서 선생의 영면을 축도하려는 듯 철따라  피고지는 무궁화꽃은 애처롭게 아름답다. 이 절은 656년 백제의 법묘(法妙) 비구니가 세운 것으로 백제의 은행나무와 더불어 대마도가 우리 역사문화 속에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해준다.
그런데 이절에는 “修善”이라고 쓴 편액에 걸려 있다. 이 편액은 친일파 남작 김학진이 쓴 것이니 역사의 아이러니는 우리를 오히려 숙연케 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반대 상소를 올리며 항일투쟁을 호소한다. 그리고 정산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일본군대의 눈을 피하려고 낮에는 병을 핑계 대고 누워 있다가 밤이 되면 미복 차림으로 태인으로 가서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모의하였다. 임병찬은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 재산을 풀어서 군기를 비축하고 있던 터였다. 홍주의병이 패하여 인심이 크게 무너진 상황이었으나 의병을 모으니 1906년 6월 4일 무성서원으로 80여 명의 유생들이 모였다. 하루 전에 상소를 올려 의병을 공개 모집한 것이었다.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에 가면 “丙午倡義 紀蹟碑”를 볼 수 있다. 최익현과 임병찬의 의병대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남원으로 출병하려던 최익현 선생은 남원의 주둔 병력이 대한제국군임을 알고 망연자실한다. 연청의 황혼 무렵에 포위망이 좁혀오고 총알이 쏟아지니 휘하 의병이 모두 흩어져 버렸다. 오직 임병찬과 11명의 의병이 사투하다 결박당하고 말았다. 최익현 선생은 군율 위반죄로 3년형을 선거 받고 1906년 7월 8일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간수가 일본 좁쌀로 지은 죽을 바쳤으나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왜인은 크게 놀라 우리 정부를 통해서 음식물을 공급 받아야 했다. 임병찬 등의 간곡한 청으로 음식을 이어갔으나 나이가 많고 위장이 역해서 먹는 것이 점점 감퇴되었다. 이어 일본인 간수가 최익현 선생의 상투를 자르려하자 거부와 더불어 단식을 결행하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최익현 선생의 나이 74세였다. 음력 11월 17일 (1907년 1월1일) 단식 31일 만에 아사순국한 것이다. 일제는 대마도의 수선사에서 장례를 모시게 하였다.

 김학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될 무렵 최익현을 옹호하는 상소를 비롯해 반일 상소를 올린다. 이로하여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구금된 일도 있었다. 이후 최익현이 의병에 함께 나설 것을 제의했으나 동조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민족과 조국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김학진은 과거에 급제한 후 권문세가에 힘입어 승승장구를 거듭하여 1894년에는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지내게 되었다. 마침 그 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흥선은 정권유지를 위해 동학군과 알게 모르게 제휴하고 있었다.

척화파 중 당시 정권 내에서 신망이 높았던 김학진은 전라 감사로 천거되었다. 당시 많은 관료들은 전라감사로 내려가는 일을 회피하고 있었다. 고종이 그를 불러들여 전라감사로 임명하니 그는 임금 앞에 엎드려 ‘편의종사(便宜從事)’의 조처를 내려달라고 하였다. 편의종사란 현지의 사정에 따라 임금의 결재 없이 일을 우선 처리하는 권한을 말한다. 상황이 급박한지라 고종은 할 수 없이 그의 청을 들어 주었다.

전주감영은 이미 동학군의 손에 떨어 있었다. 김학진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고서야 전주에 부임할 수 있었다. 이 때 '폐정개혁 12개 조항'에 합의되었다.

집강소는 동학군에 의해 운영되던 곳으로 면사무소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농민들은 집강소를 통해 정부와 타협하며 제반 폐정과 모순을 개혁했다. 김학진은 농민군의 집강소 활동을 공인하고 자신의 감사 집무실을 내주었다. 전주에 있는 회룡총 4백 자루, 크루프포 등 대포 3문과 탄알과 식량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농민군의 운량관(運糧官)이 되기도 했다.

김학진은 1906년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 유배를 떠날 때 홍문관 태학사에 오르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는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7년 사망하였다. 그 작위는 아들 김덕한이 내려 받았다. 그 덕분에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동양일보 2016.07.18]

독도본부 2016.07.26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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