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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이즈하라 400년 뱃길

6·25 전쟁시기 한·일 밀수기지로



대마도 이즈하라 400년 뱃길 1950년 중반 대마도 이즈하라항의 모습. 포구에 접안된 선박은 우리나라에서 건너온 소형쾌속밀수선이다. 

대마번주의 경제지탱 젖줄 

곳곳에 한국 문화흔적 간직 대한해협에 있는 대마도(對馬島·쓰시마)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국경의 섬이다. 부산에서 45.9㎞ 정도 떨어져 있다. 이러한 지리적 관계 때문일까?

한일 관계 2000년이란 오랜 역사 속에서 대마도는 빠뜨릴 수 없는 애증으로 점철된 역사적인 현장이다. 그리고 대마도는 한·일간에 사람과 문물이 빈번히 오갈 때 나름대로 전성기를 누렸다. 이러한 대마도에서 오랫동안 부산항과 인연의 꼬리를 달고 번성한 도시가 있다. 오늘날 쓰시마시청이 위치한 이즈하라(嚴原)다.

임진란이 끝나고 에도막부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곳은 10만 석의 영주인 대마번주가 자리했던 부중(府中)이었다. 막부의 명령에 따라 조선과 국교를 재개한 대마번주는 1607년 두모포에 단일 왜관을 다시 열고 교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12차례에 걸친 조선통신사의 선도 역할을 맡으면서 양국 간의 교류에도 힘을 쏟았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부중에 왔을 때 비로소 이곳에 기거하던 대마번주가 앞장서서 에도까지 안내행차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부중은 대마번의 행정적인 중심지로서 조선 시대 부산왜관과 교류를 터는 포구였다. 자그마치 270여 년이 넘도록 부산을 향하는 뱃길은 부중의 경제를 지탱하는 젓줄과 같은 항로였다.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부중은 이즈하라 현(縣)으로 바뀌고 곧 조선과의 통교는 일본 외무성에서 관여하게 됨에 따라 예전처럼 조선에서의 특혜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미국의 군수물품의 생산기지가 된 일본은 활기를 되찾아 가면서 전후 생필품이 절대 부족한 한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데다 통제무역으로 인해 교역이 순조롭지 못했다.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 밀수였다. 일본 상품이 우리나라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려면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대마도 이즈하라항이 제격이었다.

부산 등에서 밀항을 해온 밀수조직들이 이곳에서 현지 업자와 거래를 하면서 야밤을 틈타 밀수품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즈하라 특공대 밀수'였다. 날로 밀수가 성황을 이루자 이즈하라항은 다시 호황을 맞았다. 시내 곳곳에 밀수꾼을 상대로 한 여관과 술집이 줄지어 들어서면서 불야성을 이루기도 했다.

1960년대 말까지 우리 정부는 부산항을 비롯한 남해안에서 할거하는 이들 특공대 밀수조직을 봉쇄하기 위한 '밀수와의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대마도는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만큼이나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곳곳에 묻어 있다. 대마도 관광이 각광받는 이유다.

1999년 7월 14일에 부산항에서 이즈하라항까지 쾌속선을 띄운 이후로 당일 외해 여행지가 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대마도를 찾는 관광객 90%가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 한국 관광객이다. 2015년 한해 대마도를 찾은 우리나라 관광객은 20만 명을 넘었다. 쓰시마시의 인구 3만3000명에 비하면 매달 현지 주민의 절반에 가까운 한국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드는 셈이다. [국제신문 2016-03-20]

독도본부 2016.03.28 www.dok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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