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본부는    · 시작페이지로    · 즐겨찾기    · 오시는길    · 메일보내기    · 사이트맵

2021년 11월 27일 토요일

내용검색  

녹둔도

대마도

울릉도

제주도

간도

위화도

이어도

  현재위치 > 독도본부 > 영토와 섬 > 대마도

 


대마도 특공대 밀수 <상>

日 정부 '변칙무역'으로 비호


▲ 1950~60년대 활개를 쳤던 특공대밀수선. 부산세관 제공

1950년 중반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일간 민간무역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해 달려든 것이 특공대밀수꾼이다. 특공대밀수는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한국경제가 한창 발돋움하려는 1969년까지 부산항을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를 무대로 한 해상밀수였다.

대마도의 이즈하라항을 거점으로 한 밀수였기 대문에 흔히들 '대마도특공대밀수' 또는 '이즈하라특공대밀수'라고 불렀다. 폭력배·권력기관 등 개입 1966년엔 160척 신고돼이 밀수는 일본 정부의 비호 아래 이뤄진 탓에 한·일간의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일본 상품이 우리나라에 잠입하려면 한·일해상분계선 가까이에 있는 하나의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이즈하라항은 조선시대부터 부산과 왜관무역을 해온 대마도 남단에 있는 가장 큰 항구였다.이들은 주로 10t 남짓한 소형 쾌속선에 단시간에 속력을 높이기 위해 중고 탱크에서 나온 엔진을 달고 땅거미가 내려앉을 즈음 이즈하라항을 빠져나와 공해선상에서 분위기를 파악한 다음 야밤을 틈타 한반도를 향해 질주를 한다.

이렇게 국내 잠입을 하게 되면 밀수품을 남해안의 도서나 해안에 내리거나 아니면 다른 배에 옮겨 싣기도 하고 해저에 투하하는 기법을 썼다. 이 특공대밀수는 집단적 조직체로, 폭력배와 권력기관이 개입돼 있어 난폭하고 정보가 밝았다. 문제는 이러한 일들이 일본 정부의 묵인 아래 공공연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특공대밀수를 변칙무역으로 인정을 하고 합법성을 주장해 비호했다. 이런 까닭에 1965년 당시 이즈하라항에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평균 30여 척의 밀수선이 정박을 해 놓고 있었고 이들에게 일본상품을 공급하는 무역상도 20여 개나 됐다.

1966년도 이즈하라세관에 신고된 밀수선은 160척, 신고금액은 32만 8천달러였으나 1967년도에는 밀수선이 190척, 신고금액은 69만 달러로 더 증가했다. 이것은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밀수가 극성을 부렸다는 증거로, 대일 밀무역의 절반 가량인 48%가 대마도 이즈하라항을 통한 것이었다.

초창기 밀반출 품목은 탄피와 같은 고철과 해초류였고, 밀반입 품목은 화장품류와 직물류가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약품류와 학용품, 오토바이, 자전거, 텔레비전, 양산과 같은 생활용품도 포함됐다.1960년대 이즈하라항이 밀수본거지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밀항자 이정기가 밀수왕으로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밀수에 본격적으로 손을 댄 것은 자유당 말기인 1958년이었는데, 당시 남해안 밀수왕으로 이름을 떨치던 한국필(1962년 사망)과 부산에서 어울리면서다.이 씨는 활달한 성격으로 머리회전이 빠르고 주먹이 강해 밀수에도 능수능란한 실력을 발휘했다. 훤칠한 키에 미남인 그가 유흥가에 나타나면 돈을 잘 써 여성들로부터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부산일보 2016.03.22]

독도본부 2016.03.28 www.dokocenter.org

관련
내용
관련내용이 없습니다

 


| 개 요 | 이 책은 2008년도에 일본 중의원에서 독도문제와 ...

 

 
  Copyright ⓒ 2001.독도본부. All rights reserved
전화 02-747-3588 전송 02-738-2050 ⓔ-Mail : dokdo2058@korea.com
후원 :국민은행 024-047973-01-019(독도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