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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 외교사절’ 사명대사를 아시나요

사명대사 친필 일기로 보는 ‘임진왜란’ 진짜 기록‘

사명대사(1544~1610)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義僧軍)을 이끌고 왜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워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스님의 진면목은 전쟁 중 당시 일본 지휘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협상을 갖고 왜군 철수 등을 협의하는 등 탁월한 외교 전략을 펼친 데서 찾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이런 스님의 외교회담 기록들이 한글로 번역돼 책으로 나왔다. 동국대 불교학술원(원장 보광스님)의 한글본 한국불교전서 <송운대사분충서난록>이다. 송운(松雲)은 스님의 또 다른 호. 스님의 친필 일기 내용과 조영록 동국대 명예교수의 ‘송운대사분충서난록 해제’를 바탕으로 전쟁 중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과 전쟁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교섭내용을 정리했다.

“조선에 어떤 보배가 있는가.” 임진왜란이 나고 2년 후인 1594년, 일본 지휘관 가토 기요마사의 물음에 사명대사가 거침없이 답했다. “우리나라에선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 보배는 일본에 있다.” 사명대사의 대담한 발언과 칼날 같은 선기에 가토 기요마사는 움찔했다. 조선을 초토화한 일본 지도부를 향한 일갈에 왜장은 끝내 칼날을 드러내지 못했다.

이는 사명대사(1544~1610)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만나 주고받은 필담(筆談)이다. 왜군의 진영에 들어가 적진을 정탐하고 정전을 모색하기 위해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 간 자리였다. 사명대사는 서생포왜성(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 5월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장기전에 대비해 돌로 쌓은 일본식 평산성, 지금의 울산 울주군 서생면에 위치)에서 세 차례의 회담을 통해 왜군의 허실과 정세 흐름을 파악해 정부에 그 대책을 고하는 등 국면 전환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사명대사에게 ‘조선 최고 외교 사절’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일견 당연한 귀결이다.

대사가 처음 왜장 영중으로 들어가 회담하게 된 것은 전쟁 발발 2년이 가까워오는 1594년 4월. 당시 전쟁은 소강상태에서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전쟁 초기 일본군 선봉장이자 가톨릭 신자)와 명나라 정부 측 인사인 심유경 간에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협상이 오고갔지만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이에 조선정부와 명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적대 관계였던 가토 기요마사를 부추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불화를 조성해 일본을 스스로 물러가게 하려 했다. 이때 적임자로 의승도대장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가 발탁된다. ‘갑오년 4월에 청정의 진영에 들어가서 정탐한 기록’이 대사의 첫 번째 회담이다.

4월9일 청정에게 편지를 보낸 뒤 12일 일행 20여명과 함께 출발, 13일 왜성에 도착했다. 대사는 왜성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생포 옛 성을 지나 적의 성문 밖에 이르니, 뭇 왜적들이 조선의 사자가 왔다는 기별을 듣고 앞 다퉈 성문을 나와 길 양쪽에서 구경하는 자가 5000여명에 이르렀다. (중략) 부장(部將) 희팔의 안내로 인사할 때 왜장(청정)이 기뻐하는 기색으로 ‘우리나라에서 큰일을 의논할 때 고승을 불러 상의하는데, 귀국도 고승을 보내온 것은 이일을 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고 말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가토 기요마사, 대사와의 첫 만남에서 금강산 ‘귀승(貴僧)’을 만나 기쁘다며 존대한 것이다.

필담으로 진행된 이날 회담은 전쟁에 종군승(從軍僧)으로 참여한 닛신(日眞, 本妙寺 주지)스님이 소통을 도왔다. 가토 기요마사는 명나라 사신 심유경과 고니시의 회담이 이뤄지지 않기를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본의 요구 조건은 ① 일본 관백이 중국 천자의 딸과 혼인할 것 ② 조선 영토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③ 전과 같이 교린을 계속할 것 ④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 보내 영주토록 할 것 ⑤ 조선의 대신을 인질로 들여보낼 것 등이었다. 그러나 대사는 이런 망국적 강화 조건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일본은 이유 없이 군대를 움직여 생민(生民)을 짓밟아 죽이고 우리 종사를 도탄에 빠트렸다. 영웅의 눈물은 밥을 먹는 사이라 하더라도 마를 때가 없는데 여느 겨를에 왕자를 거친 바다 밖으로 보내 이국에서 영주하게 하겠는가. 일개 스님의 몸으로 백 번 죽는 일을 받을지언정, 왕자를 보내는 의논은 한사코 따를 수 없다.” 이 역사적인 회담으로 인해 조선 정부는 그때까지 명·일간 비밀리에 진행되던 자국 영토 할양이나 왕자 인질 등 놀랄 만한 내용을 비로소 알게 됐다.

3개월 뒤인 7월 2차 회담이 열렸다. 왜장은 이 회담에서 “송운 한 사람만 거짓이 없고 나머지는 모두 속이고 거짓말을 한다”고 말해 대사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시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지난번 제시한 5개 항은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므로 누구도 어길 수 없다” 하면서도 “만일 교린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대사는 2차 회담부터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곤 “물건 유무 상통과 서로 왕래하며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라고 답했다. ‘보배로 삼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장군의 머리’라고 한 대사의 일갈은 몇 번째 회담인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두 번째 회담이었을 것으로 학계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회담 이후 대사는 그간의 내용을 토대로 갑오상소를 올렸다. 일본에 대한 강화와 토벌의 장단점을 각각 고하고,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개혁론을 펼쳤다. <왕조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이 상소를 읽고 대사를 불러 “그대는 산인으로 전공을 많이 세웠고 적굴에 출입해 온갖 위험을 겪었으니 만일 속인으로 돌아가면 마땅히 백 리의 땅을 맡기고 3군의 장수를 삼을 것이니 이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했으나 대사는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라며 사양했다.

대사는 12월12일 왜성에 방문할 것을 서면으로 전하고 3차 회담을 시도한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측 김응서와 고니시가 이미 강화 조약을 맺고 이를 비밀에 부치고 자기를 기만하러 왔다”고 오해하고 회담을 일방적으로 거부했다. 하지만 대사는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시도했다. 밤이 깊어지자 양측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강변에 막사를 치고 밤을 지새웠다.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치고 손발이 얼어붙어 견디기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적이 탄불을 피워 줘 조금 숨을 쉴 수 있었다고 ‘3차 적정 탐정기’를 통해 밝혔다. 다음날 아침 백지 두 장을 준비해 한 장에는 양국 교린에 공적 사신으로서 대의를 적었다. 200년 동안 지속돼 온 교린 관계는 일본 침략으로 파기됐음을 지적하고 “지금이라도 군대를 철수해 지난날 우의를 회복하자”고 적고 주홍 도장을 찍었다. 다른 한 장에는 사적으로 사귄 지인으로서의 글을 써내려갔다.

“만 가지 병을 앓는 병객으로 장군과 약속을 지키기 위에 추위에 떨며 찾아왔더니 조그만 일들로 약속을 저버리니 인정상 이럴 수 있소. 강화를 하는데 떠돌아다니는 말만 믿고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 어찌 장군이 취할 일이오”하며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대사는 닛신스님의 요청으로 법어를 써 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이 법어들은 지금까지 가토 기요마사의 원찰 규슈 구마모토현(雄本) 혼묘지(本妙寺)에 소장돼 있다. 이후 대사 나이 54세 때인 1597년 2월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에서 서생포로 돌아와 대사와의 면회를 요청했다. 하지만 3차 회담에서도 왜는 왕자의 볼모 등을 제기해 성사되지 못했다. 대사는 곧바로 사태의 위급함을 비변사에 알리는 한편 따로 4월13일자 상소를 올려 대책에 만전을 기하도록 건의했다. 이 상소문에 대해 당시 사관(史官)은 “말에 조리가 있고 의리가 발라서 당시 병통을 적중시켰으니, 육식자(肉食者, 고기 먹는 자들이란 뜻으로 보통 벼슬아치들을 낮춰 부를 때 쓰는 말)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는 평을 썼다. 1598년 7월 남원에 주둔한 명의 군사들이 적과 싸울 뜻이 없자 대사는 승군 300명을 거느리고 예교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적이 물러가니, 그해 11월 7년 전쟁이 막을 내렸다.

가토 기요마사와의 외교 활동 경험은 전쟁 이후 도요토미의 뒤를 이어 일본 천하를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교섭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1599년 쓰시마 번이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화평을 맺고 싶어한다”는 전갈이었다. 조선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일본이 정말 화평을 맺으려는 건지, 침략하려는 것인지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조선은 일단 탐적사(探賊使)를 파견해 일본 정세를 정찰하기로 했다. 이때 사명대사가 또 파견됐다. 대부분의 관리들이 일본행을 꺼려했던 것에 반해, 대사는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숭고한 정신으로 활동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쓰시마 측의 인도를 받아 교토에 도착한 때가 1604년 말, 경도소사대(京都所司代) 책임자가 정중하게 영접했다. 숙소는 니치렌종(日蓮宗) 혼포지(本法寺)였다. 대사의 상담 역할은 막부의 정치외교의 고문인 세이쇼 쇼타이(西笑承兌)였다. 이듬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이 드디어 열렸다. 대사는 조선 포로 송환이 남종의 선지(禪旨)임을 시에 담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신심을 일으켜 대사를 공경하며 “지난 전쟁에 자신은 관동 지역에 머물러 전쟁에 일체 간여한 바 없다”고 변명하며 조선 피로인(被擄人, 포로로 잡힌 사람)모두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대사 일행은 4월 중순 쓰시마에 도착했다. 이때 송환된 피로인들은 48척의 배로 운송했는데 경비의 상당 부분은 대사가 지참한 노자와 일본 측으로부터 받은 금전으로 충당했다. 여기서 잠깐. 도쿠가와가 대사의 도력을 시험하기 위해 무쇠로 만든 방에 하루 머물게 하고 방안에 불을 지폈는데, 다음날 문을 열어보니 사명대사 수염에 고드름이 달린 채로 앉아있었다는 설화가 있다. 비슷한 이야기가 오대산의 취혜스님이 소장했던 ‘대사의 사적’에 언급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박인석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는 “영웅의 위로가 필요했던 시기였던 만큼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사명대사의 믿기 어려운 행적들이 전설로 회자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처럼 사명대사는 1592년 가을 고성 건봉사에서 승군을 일으켰을 때부터 1605년 6월 일본에서 조선인을 거느리고 돌아와 국왕 앞에 보고하기까지 무려 13년 동안 초인적인 활동을 수행했다.[불교신문 2015..07.01]

독도본부 2015.07.01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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