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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9월 21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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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문제로 우왕좌왕하는 약소국가 일본

근원은 미국의 전략「동아시아분할통치」다!

내외전망 - 국내정세 


런던올림픽 축구 동메달 쟁탈 한일전을 목전에 둔 8월 10일 오후, 한국 이명박대통령이 다케시마에 상륙했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 한국주재일본대사를 그날 귀국시키고 국제사법재판소로의 제소를 검토하는 등 이제까지 없었던 강경자세를 보였지만 각료 중에서는「한국 내정상 요청에 의한 것」(모리모토 방위장관)이라는 실언도 튀어나오고 있다.

요즈음 러시아 메드베데프 총리가 북방영토를 방문하고, 중국의 어업감시선이 센카쿠열도 해역을 침입하는 등「우리나라(일본) 고유영토」가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다. 간 나오토(菅直人),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에 이은 민주당정권이 약체화되고 있는 것을 간파한 것 같은 주변국들의 거침없는 난폭함에 (일본)국민들의 불쾌지수는 떨어질 줄 모른다. 이 기회에 일본이 안고 있는 영토문제의 본질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다케시마 문제에 관한「일반적인 상식」
이제 와서 일부러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다케시마는 예부터 일본의 영토로, 1905(메이지38)년 1월 28일엔ㄴ 다케시마의 행정구획을 시마네현 오키군 오키노시마쵸로 각의 결정했다. 이 해의 2월 22일에 시마네현지사가 소속 및 소관에 대한 고지를 실시한 것을 빌어 시마네현은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竹島の日)」로 삼고 있다.

메이지 신정부가 다케시마의 소관 및 관할을 결정하고부터 5년 후인 1910(메이지43)년에는 한일병합조약이 맺어져 대한제국은 일본이 영유하는 것이 되었다. 한반도가 통째로 일본의 영토이기 때문에 일본해에 떠 있는 작은 다케시마의 존재의의는 누구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에서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인 일본은 1945(쇼와20)년 8월 이후, GHQ(연합국최고사령관총사령부)에 의해 점령 지배당한다. GHQ란 포츠담선언 집행을 위해 설치된 기관이다.

일본점령이라는 특이한 상태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맺어진 것이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이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은 1951년 9월 8일에 서명되어 같은 해 11월에 국회승인, 일왕의 비준서 인증을 받아 다음 해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었다. 6년간에 걸쳐 연합국의 점령 지배를 받은 일본은 1952년 4월 28일에 정식으로 독립국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서명되고 이 조약이 발효되기 직전인 1952년 1월 18일에 한국 이승만대통령이 갑자기 일방적으로 한일 양국 간의 해역에 「이승만라인」이라는 선을 긋고 다케시마를 한국영역이라 선언했다.
이후 한국은 다케시마를 군사점령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상이 다케시마 문젱 관한 일반적인 인식으로 일본정부도 마찬가지로 「이승만라인 설정으로 한국이 일방적으로 다케시마가 한국의 지배하에 있다고 선언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다. 또한 일본정부는 1965년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으로 이승만라인 폐지가 합의되었기 때문에 다케시마에 대한 불법적인 군사점령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 일본은 1959년 이후, 여러 차례 국제사법재판소로의 회부를 제안했지만 한국은 이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에는 당사국 중 어느 한쪽이 거부할 경우 심의를 행하지 않는 원칙이 있어 한국이 거부할 경우 심의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일본이 회부제안을 거듭할 때마다 이를 거부하는 한국에 대해 국제여론의 비판이 높아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케시마 문제의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이유」
다케시마의 역사와 현 상황을 이와 같이 보면, 한일 양국이 서로 다가설 기운이 생길 것 같지 않다. 다케시마를 불법 점거하는 한국에 일본의 국민 대중은 하나 되어 분노를 느끼고 있고 한편으로 한국의 반일감정이 수그러들 조짐 따위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문제는 조금 더 깊숙이 파악할 필요가 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 직전이라는 타이밍을 노리고 공해상에 제멋대로 선을 그은 「이승만라인」이란 대체 무엇이었나.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평양전쟁(大東亜戦争)의 의의, 포츠담선언의 의미, 나아가 GHQ의 목적 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대한 역사를 원점에서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어 도저히 협소한 지면으로는 다 언급할 수 없다. (이에)여기서는 GHQ가 패전직후 일본에 무엇을 요구했는지에 대해서 만을 쓰고 이후 한일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GHQ가 점령 하에 있던 일본에게 요구한 주요항목은 아래와 같다.

GHQ에 대한 비판 금지
연합국 및 조선인에 대한 비판 금지
대일본제국 및 대동아공영권의 옹호 금지
국기게양 금지
전쟁범죄인 옹호 금지
등등.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입장에서 가장 증오해야만 상대는 대륙으로 침출(侵出)하려 한 대일본제국으로,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 건 「엔경제권구축(円経済圏構築)」을 통해 동아시아를 하나로 뭉치려한 것이었다. 포츠담선언도 GHQ의 일본점령 지배도 목적은 두 번 다시 일본이 회생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그 체재를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약체화를 위해, 그리고 일본 감시를 위해 조선인을 쓰는 건 GHQ의 애초부터의 심산이었다.

연합국군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GHQ의 이러한 목적을 완수했다고 할 수 있다.

GHQ최고사령관 맥아더는 1945년 8월 30일에 아쓰기(厚木/해군비행장)에 내렸는데 이 불과 3일 후에 어선을 포함한 모든 함선의 이동을 금지하고 있다. 연합국과 GHQ에게 공포는 일본군 잔류병사가 제멋대로 이동하는 일로, 특히 대륙과 반도와의 왕래에는 엄중한 감시체제가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 만들어진 것이 「맥아더라인」이었다.

지금은 「맥아더라인」과 「이승만라인」을 아는 사람이 적어졌다. 용어는 알고 있었도 그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더 적다. 「맥아더라인」이란 일본어선의 활동범위를 제한한 것으로 당시 미 정부 스스로가 「무원칙 선(arbitrary line)」이라 부른 것처럼 확고한 규정과 명확한 해역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맥아더라인 때문에 일본어선의 활동범위는 좁아졌다. 특히 한반도에 접근하는 게 매우 어려웠다는 건 GHQ의 기본방침에서 생각해보면 당연히 이해가 간다.

일본이 GHQ의 점령 하에 놓인지 6년 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를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자유주의진형의 첨병이 되어 동쪽 국가들과 대치된다고 하여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을 자유진형에 편입시켜 첨병으로 만들면서도 일본이 대륙에 침출(侵出)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계속 품었다. 엔경제권이 반도와 아시아로 침투, 진출되는 것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초안이 만들어졌던 1951년 7월, 이승만대통령은 미국 정부에 「맥아더라인」의 지속을 요구하고, 나아가 다케시마(竹島)와 파랑도(波浪島)를 한국령으로 해주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들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이 거절에 관해서는 「러스크서한」이라 불리는 공식답변서가 있으며 다케시마가 일본령이라는 하나의 증거로도 되어 있다.

이승만에겐 한국의 어업보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때 한창이던 한국전쟁의 경계해역이라는 의미에서 맥아더라인의 지속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를 거부. 이에 이승만은 맥아더라인을 대신하는 것으로 「이승만라인」을 만들고 제멋대로 영해를 넓혀 그 안에 다케시마를 포함시켜버렸다.

이승만라인에 대해 당시의 일본정부는 반발했고 미 정부도 「러스크서한」(1951년) 또는 「밴 플리트 극동사절단 보고서」(1954년) 등에서 이승만라인을 비난하고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지배를 부당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라인이 만들어진 1951년 1월로 말하자면, 태평양전쟁 종전으로부터 5년 5개월, 한국전쟁은 격전이 펼쳐져 서울이 두 번째로 함락된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 군정은 미국의 지배하에 있어 이승만라인도 다케시마 영유도 미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비난하고 있지만 미 정부의 의향을 무시하고 한국정부가 제멋대로 해상라인을 긋거나 도서영유선언을 내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역사서를 읽어도 인터넷을 검색해도 이 시기의 정확한 사정은 쓰여 있지 않다. 그러나 동아시아에 대한 오랜 기간의 미국의 욕망, GHQ의 일본지배방침, 그리고 한국의 상황에서 생각할 경우, 다케시마 문제는 한일 양국의 마찰거리를 영원히 남기기 위해 미국이 만든 덫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덜래스의 협박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막을 내리는 게 확정된 1945년 8월 8일 심야에 소련은 일소중립조약 파기를 통고하고 그 몇 분 후인 8월 9일 오전0시에 구만주와 한반도 북부, 쿠릴열도(千島列島) 등에 격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9월 2일까지 지속. 그 후, 1948년에는 일소 양국의 민간무역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정부 간 외교루트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동서냉전이라는 틀 안에서 일본이 서쪽 진영의 첨병이 될 것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1950년에 중국공산당인민해방군이 중국전역을 거의 장악했을 무렵, 소련은 중국과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소련, 중국 양국은 일본의 군국주의부활에 엄격한 문언을 명기. 다음 해인 1951년에 일본은 미국과 영국 등의 자유주의국가 진영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서명. 일본과 소련과의 사이에는 더욱 깊은 골이 구축되어 갔다.

일본과 소련 간의 골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은 스탈린의 서거(1953년) 후, 요시다 시게루의 퇴진과 하토야마 이치로 정권의 탄생(1954년) 이후에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하토야마 이치로의 일소국교정상화를 위한 열의는 높았고 1955년에 시작된 일소교섭은 몇 차례의 좌절과 중단을 거치면서도 전진했다. 일소교섭에서 최대 난관은 북방영토교섭이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는 「쿠릴열도 및 1905년의 포츠담조약으로 취득한 카라후토(사할린) 일부」의 권리와 청구권 등 전부를 일본이 포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문제는 하보마이(歯舞), 시코탄(色丹), 에토로후(択捉), 쿠나시리(国後)가 쿠릴열도의 범위 내인지, 아니면 홋카이도의 부속 섬인지의 판단에 있었다.

참고로 현재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조인한 46개국의 공통인식으로 구소련, 즉 지금의 러시아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비준도 하지 않고 조인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약문장 중의 「연합국」에 해당하지 않아 러시아의 쿠릴열도, 남사할린 등의 영유는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해석은 그렇다하더라도, 하토야마 이치로가 일소국교정상화를 위해 최종적으로 일소평화조약 체결을 생각했던 1955년 당시, 일본은 하보마이와 시코탄은 일본령이지만 쿠나시리와 에토로후는 쿠릴열도라 생각했다.

고노 이치로=흐루쇼프 제1서기 회담에서 일소 양국은 서로 양보, 드디어 1956년 10월에 하토야마 이치로가 모스크바를 방문해 흐루쇼프 총리와 「일소공동선언」에 서명하기로 했다. 여기서 일소 양국은 국교를 회복시키고 이후에 「일소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 이 조약체결과 동시에 하보마이와 시코탄 섬을 일본에 반환한다는 약속을 나눴다.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때, 자유주의진영의 첨병이던 일본이 소련과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이에 분기탱천한 것이 미국이다.

미국의 앨런 덜래스 국무장관은 즉시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 외무대신을 불러 「만약 일본이 하보마이, 시코탄 섬 반환만으로 소련과 평화조약을 체결한다면 미국은 영원히 오키나와를 반환하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한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덜래스의 협박」이다.

만약 덜래스의 협박이 없었다면 일소평화조약은 40년도 전에 성립되어 우선은 하보마이와 시코탄 섬을 반납 받았다. 이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2섬 선행반환론」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설령 40년 전에 2섬이 반환되었다고는 해도 그것으로 일소, 일러 간에 영토문제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역사에『만약』『~였다면』『~일 경우』와 같은 가설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역사에 가설을 사용하지 마라」는 말이야말로 일본인의 두뇌회로를 파괴하는 최악의 주문이다. 가설을 통해 역사적 배경이 훌륭하게 해석되는 일이 많고, 미래설계를 펼치는 능력을 익힐 수 있다.

만약 1955년에 미국의 압력이 없었다면, 또는 일본정부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일러관계는 전혀 달랐을 것이고, 일중관계, 일북관계도 극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덜래스의 협박이란 미국의 동아시아지배계획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센카쿠는 왜 「문제」가 되었나
다케시마 문제에 불이 붙은 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지만, 홍콩의 민간단체인 「보조행동위원회(保釣行動委員会)」를 중심으로 한 중국 선단이 또 센카쿠 상륙을 시도하는 활동을 펼쳐 빈축을 사고 있다. 이시하라 (도쿄)도지사의 (센카쿠)구입선언 이후, 센카쿠에 대한 화제가 거의 매일 보도되어 일본의 모든 국민이 센카쿠제도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 정리가 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센카쿠문제에서 중요한 건 아래의 3가지다.

∎센카쿠제도는 오키나와현에 소속한다.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유일하게 지상전이 실시된 장소로 전후 오랜 기간 미국영토였다.

∎오키나와반환교섭은 우여곡절 끝에 1969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린든 존슨 대통령의 회담으로 1972년의 본토복귀가 결정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오키나와현에 소속된 센카쿠제도도 이때에 반환되었다.

∎오키나와가 복귀된 해인 1972년 7월에 총리가 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는 이전부터 중국과의 국교회복을 물밑 모색해 같은 해 9월에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毛沢東), 저우언라이(周恩来)와 회견. 미국을 빼고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맺은 다나카 가쿠에이에 대해 미국이 어떤 제재를 가했는지는 아시는 바와 같다.

이것만으로 센카쿠문제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는 여기에 복잡기괴한 이야기가 첨가되어 확산된 것이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본질이 보이지 않을 우려가 있지만 대략적인 흐름을 써두고자 한다.

센카쿠제도를 류큐의 영토라 인정하는 중국의 공식문서가 현존한다. 16세기 중반(1561년)의 명 왕조시대의 것으로 아래의 공식기록상 일관적으로 센카쿠제도는 일본이 영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태평양전쟁으로 일본군이 패배하고 오키나와는 미국의 군정 아래에 놓은 시기가 있었지만 이는 점령되었을 뿐으로 영유권은 일본이 보존, 유지하고 있었다. 1945년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의 중화민국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에서는 센카쿠제도는 일본령으로 되어있다. 또한 오키나와를 점령했던 미국의 방공식별권도 센카쿠를 일본령으로 설정했다.

다시 말해, 뭐로 보든 센카쿠는 일본의 것으로 어느 누구도 이의제기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주 작은 오점으로 남는 건 미군 시정하 시기에 중화민국(대만) 어민 간에 어장을 둘러싼 다툼이 있었던 일이다.

1955년 3월에는 중국(대만)국기를 내건 해적선이 일본어선을 습격해 6명의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를 낸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조업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중화민국(대만) 어민이 센카쿠에 상륙해 밤을 지새우는 일 등도 여러 차례 이었다. 당시는 미국 군정하에 있어 일본에게는 시정권도 외교권도 없어 류큐정부가 미국에 제기해 미국이 대사관을 통해 중화민국(대만)에 불평을 전달하는 정도였다. 당시의 미 정부가 장제스(蒋介石)정권을 중용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되고 있지만 미국에게는 애초부터 동아시아에 영토문제를 만들어 두고자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장확보 이외에는 중요한 의미도 없었던 동중국해의 작은 섬, 센카쿠제도에 주목이 집중된 건 1968년이었다.

당시의 미국은 악화된 베트남전쟁을 계속하던 중으로 오키나와는 후방기지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2년 후인 1970년에는 일미안보조약 연장을 앞두고 오키나와현민뿐만 아니라 국민대중 중에도 안보연장에 대한 대가로 오키나와 본토복귀를 희망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일미 교섭은 우여곡절을 거쳐 1969년의 사토・존슨회담으로 안보연장에 대한 대가로 오키나와 본토복귀가 결정되었다.

그런 와중인 1968년에 유엔아시아태평양경제위원회가 아주 대규모의 동중국해 대륙붕에 대한 해저자원조사를 실시했다. 그 조사결과로 「조사해역의 대륙붕, 특히 센카쿠제도 주변해역 해저에 석유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발표를 했다.

이때 「센카쿠제도」라는 이름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기 직전에 오키나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작은 섬이 빛나는 보물섬이었다고 발표된 것이다.

아마 많은 일본인도 이때 처음으로 센카쿠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엔아시아태평양경제위원회의 해저조사는 이후에도 1969년, 1970년으로 이어져 「이라크의 매장량에 필적하는 석유자원이 잠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

오키나와반환을 요구하는 일본과, 오키나와점령을 장기화시켜 기지존속을 도모하는 미국. 그리고 중국을 둘러싼 일미 간의 교섭. 그 미묘한 거래 속에 행해진 유엔아시아태평양경제위원회의 센카쿠제도 해역에 대한 해저자원조사. 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동아시아 분할통치
고대 로마제국은 실권을 장악한 도시국가 간이 연대하는 것을 금지하고 인접한 도시국가가 대립하는 상황을 만들어 정복한 도시의 반란을 억제하는 일에 성공했다. 이를 “Divide and rule”(분할통치)라 한다.

동아시아의 현 상황을 살펴보면 마치 고대 로마제국의 분할통치가 그대로 실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연대보다는 인접한 국가가 대립하는 상황이 만들어져있다.

1968년 이후부터 1970년까지 실시된 동중국해 대륙붕 석유자원조사 결과의 영향으로 1970년 2월에는 미국 내에서 재미중국인유학생이 중심이 된 대규모 반일데모가 일어났는데 이 데모가 내건 슬로건은「센카쿠(댜오위다오=魚釣島)는 중국영토」였다. 이를 시작으로 같은 해 6월에 대만에서, 그리고 12월에 중국본토에서 동일한 센카쿠(댜오위다오) 영유권주장 반일데모가 일어났다.

사례를 하나씩 열거할 지면은 부족하지만, 재미한국인 또는 재미중국인에 의한 반일운동이 본국으로 불똥이 튀어 격렬하게 타오르는 예는 정말 많다. 이는 영토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군위안부 문제도 그렇고, 난징사건도 그렇고, 이를 배후에서 선동하고 있는 건 「분할통치(Divide and rule)」의 원칙대로 동아시아 인접국들을 대립시키고 있는 미국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본인의 국민감정에서 중국과 한국의 반일행동을 웃어넘길 여유는 없다. 다케시마 문제와 이후의 일본정부의 대응을 비웃고 약체화되고 있는 민주당 현정권에 대해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영향력도 이전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이명박대통령을 변호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다.

애석하게도 --아니, 당연한 일이지만 서민대중은 솔직하다. 서민대중이 말도 안 되는 이웃나라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건 필연적이며 누구도 이를 막을 수는 없다.

문제는 일본을 리드해야 할 위정자들이 「진지하게 상대해야만 할 상대」를 이해하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8월 15일에 야스쿠니에 참배한 정치가들에게 그 진의를 묻고 싶다. 행정조사신문 2012.08.14

 

 

독도본부 2013. 04. 26.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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