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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7 다케시마자료실 소장

「 다케시마략도(竹島略図)」확인에 대해  

시마네현홈페이지 2013.03.18

2013년 3월 18일
총무부 총무과
山﨑
TEL: 0852-22-6766
FAX: 0852-22-5911
Mail: soumu@pref.shimane.lg.jp
 
 이번에 다케시마자료실 소장 자료 중에 쇼와초기에 다케시마로 건너갔을 때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는 지도인「다케시마략도(竹島略図)」(복제)를 확인했습니다. 확인한 내용은 별첨파일과 같습니다.

<별첨파일>

■다케시마자료실 소장「다케시마략도(竹島略図)」확인에 대해

2013년 3월 18일
총무부 총무과
山﨑
TEL: 0852-22-6766
Mail: soumu@pref.shimane.lg.jp

이번에 다케시마자료실 소장 자료 중에 쇼와초기에 다케시마로 건너갔을 때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는 지도인「다케시마략도(竹島略図)」(복제)를 확인했습니다. 확인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기(記)

1. 자료개요
① 지도표제:「다케시마략도(竹島略図)」
② 지도작성년월: 쇼와26(1951)년 이전
③ 지도작성자: 불명
④ 소장자: 시마네현 총무부 총무과 다케시마자료실
⑤ 수록자료명: 쇼와26(1951)년『섭외관계철(渉外関係綴)』수록, 「다케시마 조사의뢰에 대한 회답(竹島の調査依頼に対する回答)」(1951년 9월 14일자, 시마네현 총무부장 발신, 외무성 정무국 특별자료과 가와카미=川上 사무관 앞)

2. 특기사항
① 다케시마문제연구회 및 다케시마자료실에 의해 다케시마자료실 소장자료를 조사한 결과, 쇼와26(1951)년『섭외관계철(渉外関係綴)』수록「다케시마 조사의뢰에 대한 회답」(1951년 9월 14일자, 시마네현 총무부장 발신, 외무성 정무국 특별자료과 가와카미 사무관 앞【※】)에서「다케시마략도(竹島略図)」를 확인했다. 이 외무성에 보낸 답변은 기본적으로는 1951년 9월 10일, 오키지청장이 총무부장에게 보고한 문서를 토대로 하고 있다. 「다케시마략도」는 이 오키지청장이 발신, 총무부장에게 보낸 문서 끝에 들어있는 것으로 오키지청이 이 조사 때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가와카미 사무관은 후에『다케시마의 역사지리학적 연구(竹島の歴史地理学的研究)』를 발표한 가와카미 겐죠(川上健三) 씨를 가리킴.

②「다케시마략도」아래에는「쇼와3(1928)년 9월(9월 27일부터 10월 20일까지 24일간 섬에 머무름)(昭和三年九月(九月二十七日より十月二十日まで二十四日間在島))」이라 되어 있는데 선으로 이 부분으로 지우고 있다. 오키지청이 문서를 제출할 때 이 부분은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지웠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 기재를 통해 1928년 9월에 다케시마로 도항했을 때의 상황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③ 이 지도는 측량도가 아니기 때문에 지도로는 미숙하지만 지금까지의 기록과 증언으로 판명되었던 다양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귀중한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1)지도에 기재되어 있는 섬 체재 기간과 시기는 전전(戦前) 다케시마 어업권을 가지고 전전 다케시마에서의 어업조업실태를 기록한 오키노시마쵸 구미(久見)의 하시오카 다다시게(橋岡忠重) 씨(고인)의 기록에 의하면, 쇼와10(1935)년에는 5월 20일부터 7월 10일, 9월 15일부터 10월 10일까지의 두 차례, 강치잡이와 전복채취를 위해 1개월~1개월 반 정도 체재하고 있어 이 기록과 대략 일치한다.

(2)지명에 대해 주목할 만한 건, 동도(東島)를「메시마(女島)」, 서도(西島)를「오시마(男島)」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오키에서의 청취조사(이하「청취조사」라 함.)에서도 쇼와초기에 다케시마에서의 어업조업을 한 자손들로부터 「동도(東島)」, 「서도(西島)」가 아닌 「메시마(女島)」, 「오시마(男島)」라 읽었다고 들은 사실이 판명되었다. 다케시마는 당초에 「메시마(女島)」, 「오시마(男島)」라 불렸다는 자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서도(西島)의 후미에는「수(水)」라는 표기가 있다. 이는 청취조사에서도 판명된 것처럼 동굴 속에 물이 솟는 장소라고 생각된다. 또한 서도(西島) 북쪽에는「강치 잡는 곳(トド狩場)」이라는 표기가 있다. 이도 청취조사에서 서도(西島) 북쪽 부근에서 강치를 자주 목격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어 이 또한 청취조사 결과와 일치하고 있다고 하겠다.

(4)동도(東島)와 서도 중앙에는「혈(穴)」이라는 기재가 있다. 서도(西島)는 조사성과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 동도(東島)의 「혈(穴)」은 청취조사로도 판명된 것처럼 화산 분화구로 보인다. 지도에서는 혈(穴)에서부터 북(北)으로 점선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혈(穴)이 북쪽으로 이어져있음을 나타내고 있고, 당시 신문기사에서도 분화구 구멍이 북쪽으로 이어져있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5)동도(東島)의 서해안에는 모래사장과 작은 오두막과 같은 기재가 있는데, 작은 오두막은 다케시마에서의 작업장소로 추측된다. 다케시마에서의 어업조업 실태가 이 기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6)동도(東島)의 정상 부근에 있는 □마크는 러일전쟁 때(일본해해전 후인 메이지38(1905)년 7월)에 설치된 가설망루의 흔적으로 보이며, 망루터 남쪽에는 「전적(畑跡)」이라 쓰여 있다. 이 밭은 메이지39(1906)년 3월, 히가시 분스케(東文輔) 오키도사의 다케시마시찰복명서(竹島視察復命書(『시마네현 다케시마 신연구(島根県竹島の新研究)』p.61)에 의하면, 「실제로 망루대원이 경작한 흔적이 존재하는 것도 2묘보 정도 있다(現に望楼隊員が耕作せる形跡の存せるもの二畝歩許あり)」라며, 동도에 망루대원이 경작했던 밭이 2묘보(畝歩) 존재했던 사실이 확인되고 있어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메이지39(1906)년의 다케시마 도항 상황을 발표한 오쿠하라 헤키운(奥原碧雲)의 『다케시마 및 울릉두(竹島及鬱陵島)(메이지40(1907)년)』에는 동도 정상에 「출어자의 식량으로 채소류 등을 재배할 수 있을 것 같다(出漁者の食料とすべき蔬菜類等を栽培するを得べき見込あり)」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시마네현 오키지청편(編)『오키도지(隠岐島誌)』(1933년)에는 「출어자의 식량으로 야채류를 재배할 수 있을 것 같다(出漁者の食料として蔬菜類を栽培し得べきが如し)」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청취조사에서는 쇼와초기에 다케시마에서의 어업조업을 했던 오키노시마쵸 구미의 야와타 이사부로(八幡伊三郎) 씨(고인)로부터의 증언으로 다케시마 도항 시에는 잘 자랄 수 있는 잎파를 1다발 가져가 동도의 밭에 심었다. 그리고 무, 배추 종류도 가져가 밭에 심었다. 20~30일만 지나면 무와 배추도 잎이 나오기 시작해 먹을 수 있었다. 다케시마 밭에서 자란 푸성귀는 된장국의 재료로 해서 먹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와도 들어맞는다.

④ 우리나라(일본)에서는 메이지38(1905)년 전후의 영토편입청원, 어업권신청원, 그리고 시마네현의 실측조사 등의 자료를 통해 다케시마지도가 확인되었는데 이번 지도의 존재로 쇼와초기에도 오키 어민들에 의해 다케시마가 경제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이는 우리나라(일본)에 의해 실효 지배되었다는 구체적인 실태를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3.기타
향후 다케시마자료실에서는 이 「다케시마략도」복제판을 전시할 예정입니다.
문의는 다케시마자료실(0852-22-5669)로 부탁드립니다.

 

 

독도본부 2013. 04. 12.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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