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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신보』와 러일전쟁

(『隠岐新報』と日露戦争)

2009.08.31 게재

스기하라 연구고문의 연구리포트

서두 
  오키노시마쵸(隠岐の島町) 도서관장인 고무로 겐지(小室賢治) 씨가 메이지시대 오키섬에서『오키신보(隠岐新報)』라는 책자가 간행되었다는 정보를 주셔서 다케시마자료실에서 조사한 결과, 도쿄대학 메이지신문잡지문고에 1904년 1월부터 매월 1회 발행되었던 책자 16호분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04년, 1905년으로 말하자면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郎)가 메이지정부에「량코섬 영토편입 및 사용청원(りやんこ島領土編入並びに貸下願)」을 제출하고 정부는 각의 결정으로 량코섬을 시마네현 소속이라 결정하고 시마네현에서는 지사인 마츠나가 다케요시(松永武吉)가 현 전체에 이 섬을 다케시마로 고시한 때로 오키의 최신정보를 실은 새로운 자료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어 꼭 열람할 생각이었다.

  그 후, 시마네현립도서관의 배려로『오키신보』16권 전체에 대한 복사본을 입수하게 되어 이번에 시간을 들여 살펴보았다.

 1904년 1월 4일에 발행된 제1호에는 정월을 축하하는 「잠수기어업 나카이요사부로(潜水器漁業中井養三郎)」에 대한 광고와 이 책자의 간행을 축하하는 오키도사 히가시 분스케(東文輔)의 축사 등이 게재되어 있어 다케시마 문제에 관한 많은 기술을 기대했지만 관련되는 내용은 1904년분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 관한 내용이 오키에서 출병한 병사에 대한 정보를 중심으로 매우 많은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다. 아래에 『오키신보』의 개요와 러일전쟁과 오키를 테마로 소론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리고『오키신보』에 대해서는 표제글씨가 다소 작고 매월 1, 11, 21일에 발행되는 분량이 적은 간행물이 1907년 1월 1일부터 발행된 사실이 오키에서 1989년에 발행된『일본해에 떠있다-고향앨범 사이고-(日本海に浮かぶ−ふるさとアルバム西郷−)』라는 책자에 사진으로 게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최근 깨달았지만 1904년과 1905년 것과의 관계는 실물을 입수할 수없어 불분명하다.

1.『오키신보』에 대해                            
  『오키신보』는 1904년 1월에 간행된 제1호부터 남아있는 1905년 3월의 제16호까지 모두 발행소는 시마네현 스키군(周吉郡) 사이고쵸(西郷町) 니시마치(大字西町) 355번지의 오키신보사(隠岐新報社)이고 발행인은 오사다 요시이치로(長田能一郎) 씨다. 오사다 요시이치로 씨는 당시 후세무라(布施村) 출신으로 메이지시기 오키의 지리와 역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오키도지(隠岐島誌)』편집에 심혈을 기울여 그때에 수집한 다케시마 관계자료를 후에 시마네현에 제공한 오키도청 서기관 오사다 와카지(長田和加次) 씨의 친형이다. 오사다집안은 에도시대 회선업(廻船業)으로 재력을 쌓았으며 후세무라의 중요한 직책에도 있었던 집안이기도 하다.  

 (오키신보)제1호에서 오사다 요시이치로 씨는「발행사」를 쓰고 사회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데도 오키도민은 그 변화를 의식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 새로운 지식과 개혁의 목표를 함양하고 실행하기 위해 이 잡지를 발간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친구인 사이토 이치로(斎藤一郎)라는 인물도 오사다 요시이치로 씨가 평소에 공공사업에 전력하면서 현재의 오키섬의 문화와 경제의 뒤처짐을 한탄했다고 밝히면서 이 잡지 발간에 기대를 걸고 있음을 축사로 쓰고 있다.

 시마네현 오키지구의 행정상의 리더로 도사(島司)라는 직책이 있어 리앙쿠르섬의 섬 이름을 다케시마로 변경해 이름 지은 히가시 분스케(東文輔) 씨도 축사와 함께「오키신보를 세상에 널리 알림을 축하한다(隠岐新報てふ書を世に弘めしを寿まいらせて)」며 말미에 쓰고 축하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히가시 분스케 씨에 대해서는 1904년 8월의 『오키신보』제8호의 삽화에 「오키도사 히가시 분스케의 가정(隠岐島司東文輔の家庭)」이라는 제목으로 분스케 씨와 부인, 4명의 자제에 대한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오키신보』의 1904년도분에서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건 오키의 4개 군(郡) 내의 정촌(町村)합병에 따른 문제와 미래에 대한 전망 등에 관한 기술이다. 즉, 1904년 1월에 시마네현 고시로 도고(島後)의 스키군(周吉郡)과 오치군(穏地郡), 도젠(島前)의 치부리군(知夫郡), 아마군(海士郡) 산하의 3개의 정(町)과 50개의 무라(村)가 4월부터 1개의 정(町)과 12개의 무라(村)로 합병축소된 것에 따른 여러 문제에 대해서다.

 그리고 제1호부터「사림(詞林)」이라는 페이지에 한시(漢詩), 단가(短歌), 하이쿠(俳句) 등을 게재하여 문예지 분위기도 더해 잡지 내용에 독자와의 교류도 소중히 하고 있다. 그 밖에 오키도에서 오키도 밖으로 옮기는 사람들의 새로운 주소를 게재해 독자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으며, 자금 확보를 위해서인지 광고도 접수, 오키도 밖에서도 상당히 많은 광고의뢰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시마네현과 돗토리현을 중심으로 각 방면의 광고가 게재되고 있다. 

 또한 오키도 내에도 인쇄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발행을 시마네현 오하라군(大原郡) 기스기쵸(木次町)의 기스기활판소(木次活版所)가 인쇄소로, 인쇄인도 기스기쵸의 모리와키 진스케(森脇甚助)라는 인물의 이름이 기재되어있다.『기스기쵸지(木次町誌)』(1972년)에 의하면 기스기활판소는 1904년에 5명의 출자자로부터 설립되어 설치장소인 기스기쵸 23번지는 출자자 중의 한 사람인 이시바시(石橋) 씨의 지번이다. 인쇄인 모리와키 진스케는 기스기쵸 459번지 임시거주라 되어 있는데 이 지번은 출자자 중의 한 사람인 호소키(細木) 씨의 주택이 있었던 장소다. 지금의 운난시(雲南市) 기스기쵸(木次町)에는 모리와키라는 성(姓)을 가진 집이 3채 있는데 모두가 선조 중에 진스케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아 인쇄기술을 가진 다른 곳에서 모셔온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키신보』는 제13호부터 1905년에 발행되었다. 13호의 신년축하 광고에는 1905년에도「잠수어업 나카이 요사부로(潜水漁業中井養三郎)」광고가 있다. 이 무렵부터「스키군이소무라통신(周吉郡磯村通信)」처럼 각 지역자치단체(町村)의 통신원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페이지가 등장한다. 1905년 1월에는 임시형식으로 제14호가 발행되었고, 남아있는 마지막 3월에 발간된 제16호에는「사고(社告)」로「내년부터 한 달에 2회 발행」이라는『오키신보』의 확대와 내용의 충실함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있다.      

 그럼 이 제16호에 같은 해 2월 22일에 오키도사의 소관이 된 다케시마에 대한 것이 처음으로 게재되었다. 우선 「사설(社説)」부분에 「오키국경의 확장(隠岐国境の膨張)」이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내용은 예부터 오키도민이 도항했던 2개의 도서와 수많은 작은 도서가 이번에 공적으로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오키의 영토가 된 일은 기쁘다. 섬 자체가 왜소하기 때문에 강치 외 기타 해산물은 지나치게 취하지 않고 무한의 이익의 땅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감이 있다. 또한 「잡보(雑報)」부분에도 「오키의 새로운 섬(隠岐の新島)」이라는 기사가 있으며, 다케시마의 위치와 오키도에서부터의 거리 등을 쓰고 상세한 내용은 다음호에 게재하겠다고 하고 있다. 그 다음호인 제17호가 현재 발견되지 않아 애석할 따름이다.
                  

사진1: 『오키신보』제1호(1904년 1월 1일 발행) 개인소장

 2.『오키신보』와 러일전쟁
  『오키신보』가 발간된 직후인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오키발 러일전쟁 전반의 정보가『오키신보』를 통해 제공되고 있다. 이를 아래에서 보고하고자 한다.

 러일전쟁에 관한 종래 알려졌던 오키에서의 일들은 1905년 5월 27일, 28일 다케시마 근해에서 일본해군과 러시아 발틱함대 간에 소위 일본해해전이 발발했는데 이때 다케시마에서는 나카와타세 니스케(中渡瀬仁助) 등 오키 어민이 강치잡이를 했었다는 것, 이 해전으로 사망한 러시아병사의 시체가 다수 오키로 표착했다는 것, 러일전쟁 후 다케시마 등에 전망대로 임시 망루가 건설되었는데 오키 니시노시마(西ノ島)의 다카사키야마망루(高崎山望楼)에서부터 다케시마로는 연락 전신설비가 만들어졌다는 것, 여순구(旅順口)전투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스테셀(:  Anatolii Mikhailovich Stoessel)중장이 일본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에게 보낸 군마(軍馬) 스호(寿号/노기 대장이 이름 지음)가 오키 아마쵸(海士町)에서 사육되었다는 것 등이다.

 『오키신보』창간호인 1904년 1월 1일 발행분에는 「대러문제」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어 전국의 신문 등은 활발히 대러시아문제를 매일 기사로 다뤘는데 본지에서는 지면상 이번에는 생략한다고 되어 있다.

 2월 1일에 발행된 제2호에는「기서(寄書)」라는 제목의 투서란에 익명의 사람이「시대를 감안해 과감히 사람들에게 고한다(時世を鑑み敢て諸氏に告ぐ)」는 제목으로「취로호불(鷲露虎佛)」라며 러시아를 독수리(鷲)로 프랑스를 호랑이(虎)로 표현하면서 「그들 파란 눈에 붉은 턱수염 특히 시선을 동양의 상황에 주목해(후략)(彼れ緑眼髯児毎に眼を東洋の動静に注ぎ、機に応じ変に投じて其攫慾を逞うせんと欲す)」라며 러시아, 프랑스에 대한 경계를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잡보(雑報)」부분에「러일협상폐기성명(日露協商廃棄の声明)」이라는 기사가 있는데 러시아가 일본정부에 연락하지 않고 한국 서울에 군사를 들였음으로 일본정부는 러일협상 무시라며 러시아정부에 이 협상 폐기를 통고했다고 되어 있다.

 드디어 러일 개전을 전하고 있는 건 3월 15일에 발간된 제3호로, 권두「사설(社説)」에 「전쟁과 국민(戦争と国民)」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고 지난 2월 10일에 러시아와의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 전국(戦局)의 결과는 국가의 존망과 관련됨으로 반드시 이기기 위해 국민이 하나 되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전시(戦時)라고는 해도 국내 평화는 잊어서는 안 되며 위아래가 하나 되어 같은 마음으로 협력, 농공상어(農工商漁) 등 각 직업에 열심히 종사하여 국가의 실력배양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군속(軍属)으로 출정자가 있는 가정에는 보호와 배려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잡보(雑報)」의 전쟁관련 여러 보도 부분에는 우선 「선전 조칙(宣戦の詔勅)」전문(全文)이 어명어새(御名御璽 : 천황의 서명 날인.)로 게재되어 내각총리대신 겸 내무대신인 가츠라 타로(桂太郎), 해군대신 야마모토 곤베(山本権兵衛),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아키(寺内正毅) 등 9명의 대신이 서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이미 일본육군의 상륙지점이 된 인천, 여순구에서 교전이 시작됐다는 것, 오키에서는 히가시 분스케 도사가 2월 26일 국폐중사(国弊中社 :국폐사(国幣社)는 국사(国司)가 봉폐(奉幣: 신전에 공물을 받침)를 받는 신사를 말함. )인 미즈와카스신사(水若酢神社)에서 칙사대리로 선전포고제를 거행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호의「논설(論説)」부분에「러일교제와 국제공법(日露交際と国際公法)」라는 제목의 전문가의 논설도 실어 러일개전의 이유와 전시에서의 국제법 확인 필요도 설명하고 있다.

 『오키신보』제4호는 1904년 4월 15일에 발간되었는데 그 안에 「러시아국세일반(露西亜国勢一斑)」이라는 기사가 있어 러시아의 행정시스템과 당시의 구체적인 각료의 이름, 재정과 교육제도, 군대의 조직 등이 열거하고 있다. 전쟁 상황에 대해서는 여순구 봉쇄를 위한 해군의 행동이 아주 자세히 보고되고 있으며 제2회 폐쇄작전에 분전하는 병사들과 부하를 생각하는 상관 스기노(杉野) 병조장(兵曹長 : 구해군의 수병과(水兵科)준사관의 호칭. 소위의 아래, 상등병 조(曹)의 위에 위치하는 계급을 말함.<출처: 위키백과>)과 히로세(広瀬) 중좌의 유명한 행동을 소개하고 있다. 오키 내에 대해서는「군자헌납(軍資献納)」으로 수많은 러일전쟁에 헌금한 사람의 이름과 단체명이 열거되고 있는데 헌금 중에는 고카무라에 주위사람들에게 금주를 선언하고 매월 기부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기재하고 있다.

 이어지는 제5호에는 「오키국 재향군인회」의 설치와 여순 총공격의 전시 상황이 보도되고 있다.

 6월 15일에 발간된 제6호는「사설(社説)」에서「전비와 군국민의 가계(戦費と軍国民の家計)」를 들며 근검함과 국가에 대한 봉사정신 함양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처음으로 오키 출신 전사군인 4명의 이름을 쓰고 그 명예를 칭송하고 있다. 또한 군대상관의 승임발표를 보도하고 있는데 육군에서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해군에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가 각각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임하고 있다.

 7월 15일에 발간된 제7호는「잡보(雑報)」부분 가운데, 「군사요보(軍事要報)」에 지면을 할애해 조선 북부를 중심으로 전장의 격전을 보도하고 러시아병사 포로 93명이 마쓰야마(松山)에 도착했다는 것도 전하고 있다. 문예부분인「사림(詞林)」에는 전쟁에 관한 단가(短歌)도 많은데「친형을 출정 보내며(家兄の出征を送る)」에는「용맹한 명예를 남기고 무인의 꽃이라 노래 불려 떳떳하게 죽어라(勇ましきほまれを残し武夫(もののふ)の花と歌はれ潔く散れ)」,「무인의 꽃이라 노래 불려 당신이 죽는다면(후략)(武夫の花と歌はれ君散らば我も男の子ぞいかで泣かなむ」와 아마도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 아들의 전사를 노래한「南山の戦に名誉の戦死を遂げたる乃木中尉を吊ふ」에는「温き血潮を野辺に染めなして我友逝けり勲し高く」,「勝鬨の声を幽に聞きなして笑み漏らしつつ君は眠りぬ」,「大君のへにこそ死なめと勇み行ける君が姿のまのあたり見ゆ」등도 싣고 있다.

 8월 15일에 간행된 제8호에는 고카무라에서 출정해 전사한 우노 히로시(宇野広) 씨를 친구가 추억과 마지막에 보낸 편지로 칭송하는 글을 게재하고 있다.

 9월30일에 발간된 제9호는 첫머리에 6명의 전사자 영정을 게재하는 외에 다른 전쟁터에서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열거, 귀향한 영령들의 장례식에 오키도사인 히가시 분스케 씨가 참가했다는 것 등 전시색이 농후한 지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10월 15일에 발간된 제10호도 전사자와 부상자 이름을 올리거나 전쟁터에서 온 병사의 서간소개 등이 게재되고 있다.

 11월 15일에 발간된 제11호는 권두에 오키 출신 6명의 병사들의 사진을 올리고 10월 10일에 발표된「開戦以降朕ノ陸海軍克ク其忠勇ヲ致シ、官僚衆庶其心ヲ一ツニシ、以テ朕カ命ヲ遵奉シ著々其歩ヲ進メ今日ニ及ブ、然レドモ前途尚遼遠ナリ、堅忍持久益々奉公ノ誠ヲ竭(つく)シ、以テ終局ノ目的ヲ達スルコトヲ努メヨ)」라는 천황의「칙어」를 게재하고 있다. 또한 「잡보(雑報)」부분에는 22명의 전사자와 41명의 부상자들을 전쟁터별로 쓰고 있다.

 12월 15일에 발간된 제12호는 연말다운 사설에「1904년(메이지37년)을 보내며(明治三十七年を送る)」를 올리고「충무 둘도 없는 우리 장졸은 지금도 만주 들판에서 포연탄우를 맞으며 국난의 임무에 임하고 있다(忠勇無二の我将卒は今尚満州の野に砲烟弾雨を冒して国難の衝に当りつつあり)」라며 러일전쟁에 대한 것과 「우리 오키국은 십 수 년 동안 손꼽아 기다린 자치제도 시행에 이르러(我隠岐国は十数年来待ちに待ちたる自治制度の施行に遇し)」라며 정촌(町村)합병에 따른 행정사의 새로운 출발을 중심으로 1년을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잡보(雑報)」에는 쯔마무라(都万村) 출신 병사가 전사했는데 그 군복 주머니에 부친에게 보내는 유언서가 들어있었다며 그 전문(全文)을 게재하고 있다.

 1905년 1월 1일에 임시로 제13호가 간행되어 나카이 요사부로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신년을 축하하는 광고를 권두에 게재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한 한해를 바라는 광고 다음에는 9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 「사설(社説)」인「1905년(메이지38년)을 맞이하며」에는「국민은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책임과 영광을 지닌다. 나는 이렇게 큰 책임이 따르는 특별한 신년을 맞이한다(国民は如何なる犠牲をも辞することを得ざるの責任と光栄とを有するものなり。吾人は斯くも大なる責任の横はれる例なき新年を迎ふ)」라며 러일전쟁에 대한 국민의 단결과 필승을 호소하고 있다.

 1월 15일에 발간된 제14호는 6명의 전사자와 부상자 사진으로 시작하고 있다.「담론(談論)」부분에는「보다, 듣다, 느끼다, 있는 그대로(見る、聞く、感ずる、有りのまま)」라는 제목으로 만주의 전쟁터에서 니시마치(西町) 출신인 (一歩兵少尉)가 보낸 견문기가 지면을 대폭 할애해 게재되어 있다. 혹한 속에서 금속물질을 들고 있으면 얼어버려 떼어내기 위해서는 피부도 같이 떨어져나가는 등 생생한 보고를 하고 있다. 전장의 병사가 보낸 단가(短歌) 등도 게재하고 있어 「一人一人敵の斃るるかけ見えてたまの下とも覚えさりけり」, 「時ならぬ紅葉に草をそめなしてゆふくれさむく駒のいななく」등의 단가가 있다. 이 제14호에「여순함락」이 큰 헤드라인으로 보도되어 약1년에 걸친 이 요새가 함락하기까지의 과정과 오키도청에서의 승전을 축하하는 모임 등을 보고하고 있다.

 2월 15일에 발간된 제15호는 권두에 전년도에 오키를 방문한 시마네현청의 호리 신지(堀信次) 서기관을 히가시 오키도사와 오키의 모든 지역자치단체의 장이 둘러싼 단체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그리고 시마네현지사에 착임한 후 처음으로 오키를 방문한 마츠나가 다케요시(松永武吉) 씨의 행동을 보고하고 있다.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오키출신 병사가 보낸 편지와 전사자들의 이름을 싣고 있다.

 남아있는 마지막 3월 15일에 발간된 제16호『오키신보』는 러일전쟁에 관해서는 전사자를 게재하는 외에 포로가 된 러시아병사가 마츠야마(松山), 마루가케(丸亀), 니노시마(似島), 후쿠치야마(福知山), 히메지(姫路), 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시즈오카(静岡), 오사토/사이타마(大里/埼玉), 후쿠오카(福岡)의 수용소에 총30,255명이 있다는 것과 일본은 464명이 러시아에 포로로 잡혀있다고 게재하고 있다.

 맺음말 

  1904년 1월부터 간행된『오키신보』는 발간이 거듭될수록 내용이 풍부해져 오키섬에 대한 정보도 각지에 통신담당자가 배치되어 도고(島後), 도젠(島前) 모두 균등화된 뉴스를 전하고 있다. 1905년 2월 22일에 오키도사 소관으로 고카무라 소속이 된 다케시마에 대한 보도가 좀더 많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적었고 제17호에 다케시마 문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싣겠다는 예고가 있지만 그 제17호 이후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애석하다.
사진2: 러일전쟁에 출정하는 오키출신 병사(『오키신보』제13호 1905년 1월 1일 발행)
(도쿄대학 법학부부속 메이지신문 잡지문고 소장)

 그 반면에 1904년 2월에 발발한 러일전쟁의 지역에서의 반응은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 또한 1905년 5월의 오키 근해에서의 일본해군과 발틱함대의 격돌부분에 대한 오키신보가 남아있지 않다는 건 향후 오키섬 안팎에서의 제17호 이후의 『오키신보』를 발견하기 위한 조사를 할 필요를 통감하게 했다.

 


독도본부 2013. 01. 18.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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