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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일본해해전과 다케시마            

日露戦争・日本海々戦と竹島

2011.09.01 게재

서두 
 올해 들어 러일전쟁, 특히 일본해해전에 관한 자료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우선 1905(메이지38)년 5월 28일, 일본해해전에서 일본해군의 추격을 받아 시마네현 고츠시(江津市) 와키쵸(和木町) 앞바다에 침몰한 물자수송선 이르티슈호(イルティッシュ号)를 현장에 달려가 스케치화로 그린 시마네현립 제2중학교(현 시마네현립 하마다고등학교)의 미술과 교사 스기우라 히스이(杉浦非水)(주)의 2장의 그림이 게재된 잡지(사진1), 시마네현 이즈모시(出雲市)의 골동품점에서 발견된 일본해해전 기념그림엽서(사진3), 두 명의 연구자가 다케시마자료실에 기증해주신 『러일전사(日露戦史)』, 『러일전쟁실시(日露戦争実記)』(모두 하쿠분칸=博文館에서 메이지시기에 간행). 이를 통해 몇 가지 알게 된 점을 보고하고자 한다.  

1. 러일전쟁과 다케시마 문제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메이지37)년 9월 29일,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郎)는 「량코섬 영토편입 및 대하원(リヤンコ島領土編入並びに貸下願)」을 내무대신, 외무대신, 농상무대신에게 제출했다. 내무성에서는「내무당국자는 이 시국에(러일전쟁 중) 한국 영지일 가능성이 있는 황막한 일개 불모의 암초를 수중에 넣어 타국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가 한국병합의 야심이 있다는 의심을 증폭시키는 것은 이익이 극히 작은 것에 비해 사태 결코 쉽지 않다(内務当局者ハ此時局ニ際シ(日露開戦中)韓国領地ノ疑アル莫荒タル一箇不毛ノ岩礁ヲ収メテ、環視ノ諸外国ニ我国ガ韓国併呑ノ野心アルコトノ疑ヲ大ナラシムルハ、利益ノ極メテ小ナルニ反シテ事体決シテ容易ナラズ)」고 난색을 표했지만 외무성의 정무국장인 야마자 엔지로(山座円二郎)는「씨는 시국이기 때문에 더욱 영토편입이 시급히 필요하다 한 것이다. 망루를 세우고, 무선 혹은 해저 전선을 설치하면 적함을 감시하는데 요긴하게 되지 않을까, 특히 외교상 내무의 고려가 필요하지는 않다(氏ハ時局ナレバコソ其領土編入ヲ急要トスルナリ、望楼ヲ建築シ無線若クハ海底電信ヲ設置セバ敵艦監視上極メテ屈竟ナラズヤ、特ニ外交上内務ノ如キ顧慮ヲ要スルコトナシ)」고 했다. 이 청원은 최종적으로 「1903(메이지36)년 이후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자가 해당 섬에 이주해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건 관계서류에 따르면 명백함으로 국제법상 점령 사실이 있다고 인정해 이를 일본 소속으로 하고 시마네현 소속 오키도사의 소관으로 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明治三十六年以来中井養三郎ナル者該島ニ移住シ漁業ニ従事セルコトハ関係書類ニ依リ明ナル所ナレバ国際法上占領ノ事実アルモノト認メ之ヲ本邦所属トシ島根県所属隠岐島司ノ所管ト為シ差支無之儀ト思考ス)」는 각의 결정을 통해 최종 결정되었다. 이와 같은 경위로 러일전쟁과 일본의 다케시마 소속에는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연구자가 존재했으며, 구제적인 해전이 다케시마 주변에서 일어나기도 해 의혹을 불식시키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5월 27일, 28일에는 다케시마에서 나카와타세 니스케(中渡瀬仁助) 등 오키 어부들이 강치잡이를 하고 있어 발틱함대 여러 척을 목격하고 있다는 점과 군사시설의 가능성이 지적되었던 임시망루(감시소)는 일본해해전보다 후인 같은 해 8월에 건설되었다는 점이 해군자료를 통해 확인되었고, 다케시마 근처에서 4척의 러시아함대가 이를 추격한 일본함대에 포위되어 투항한 것도 후술하는 것처럼 우연한 사건이었다는 것이 명백해져 현 상황에서는 러일전쟁과 다케시마의 의도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2.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와 다케시마
  러일전쟁은 청일전쟁으로 획득한 일본의 권리를 삼국간섭으로 반환시킨 후, 러시아가 중국의 청 왕조와 조선으로 진출한 것을 배경으로 1904년 2월에 발발했다. 이 전쟁은 러시아가 남하를 추진한 요동반도와 만주에서의 육지전과 아프리카 경유로 섬나라 일본을 향한 당시 세계 최강의 러시아 발틱함대와 일본해군의 해전으로 실시되었다.

 이 일본해군을 통괄하고 있던 건 연합함대 지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였다. 도고는 1847년에 가고시마현에서 태어나 사츠에이전쟁(薩英戦争: 1863년 8월 15일~1863년 8월 17일. 나마무기 사건의 해결을 요구하는 영국과 사쓰마 번간의 가고시마 만에서의 포격전이다. 사쓰에이 전쟁의 결과로 영국은 종전의 막부지지 방침을 변경해 사쓰마 번에 접근했고, 사쓰마 번은 양이의 실현 불가능을 깨닫게 되었다.<출처: 위키백과>), 보신전쟁(戊辰戦争: 1868년부터 1869년 사이에 일본에서 일어난 일련의 내란이다. 한자를 음역해 무진 전쟁(戊辰戰爭)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울러 1868년은 무진년에 해당하는 해이다.<출처: 위키백과>)에 참가한 후 해군견습사관으로 영국에 유학했다. 귀국 후에는 해상근무에 종사해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는 순양함「나니와(浪速: 구일본해군의 방호순양함이다. 나니와급(浪速型)의 1번함이다. 함명은 오사카의 옛이름인 나니와에서 따서 붙여졌다. 1884년、영국、뉴캐슬의 암스트롱 휘트워스社(Armstrong Whitworth)의 조선소에서 1886년 2월15일 준공되어 당시 일본의 군함 등급분류에 의해 2등함으로 정해졌다. 일본해군이 채용한 최초의 방호순양함이다. <출처: 위키백과>)」의 함장으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이 도고가 일본해해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05년 6월 23일에 발행된 『러일전쟁실기(日露戦争実記)』제77편에 「천년 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대문자-해전 역사상의 신기원=제국함대의 장훈위적(千載不磨の大文字-海戦史上の新紀元=帝国艦隊の壮勲偉績)」이라는 제목으로 일본해해전에 관한 수기를 싣고 있다. 개요를 소개하면 발틱함대가 남쪽 바다(南洋)의 안남(安南 : 안남(安南)은 당나라가 하노이에 설치한 안남도호부에 유래하여 현재의 베트남 북부에서 중부를 가리키는 지리적 명칭이다. <출처: 위키백과>) 연안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일본해군은 조선해협을 향해 전속력으로 출동해 대기했다는 것(구마다 다다오=熊田忠雄 저『그곳에 일본인이 있었다(そこに日本人がいた)』신쵸샤=新潮社에 따르면 미국 동쪽에 있는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섬에 구마모토현 아마쿠사(天草) 출신의 아카사키(赤崎伝三郎) 부부가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38척의 발틱함대가 휴식, 식량・식수보급을 위해 이 섬에 기항해 전보로 일본으로 알렸다. 전후 제국해군은 아카사키의 애국적인 행동에 감사장을 보냈다고 한다), 5월 27일 오전 5시 남방초함(南方硝艦) 시나노마루(信濃丸)가 처음으로 적함을 발견했다는 것, 같은 날 오전 10시가 지나 이키(壱岐 : 이키 섬(이키노시마)은 규슈와 쓰시마 섬 사이에 있는 섬이다. 나가사키 현에 속하며, 섬 전체가 이키 시에 해당한다. 주위에 21개의 부속섬(유인도 4, 무인도 17)이 있으며 합쳐서 이키제도(壱岐諸島)라고 한다. 보통은 부속 섬을 합쳐 이키 섬이라고 부르며, 이키 섬만을 따로 이키본섬(壱岐本島)라고도 한다. <출처: 위키백과>), 쓰시마(対馬) 사이에서 일본의 가타오카(片岡) 중장이 이끄는 순양함부대와 발틱함대 사이에 포격전이 시작되었다는 것, 정오가 지나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의 기함「미카사(三笠)」를 비롯한 주력전함이 러시아의 주력전함인「오슬라비아」「시소이베리키」「나바린」「나리모프」로 구성된 하나의 부대와 이어지는「니콜라이1세」외에 3척의 해방함(海防艦)으로 구성된 하나의 부대를 쫓아가 시야 내에 있는 일본의 전 함대에게 「황국의 흥망은 이 전투에 있으며 각자 한층 더 분려 노력하라(皇国の興廃此の一戦に在り、各員一層奮励努力せよ)」는 신호를 내보냈다는 것, 일본의 포격은 사정거리 단축과 더불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해 먼저 주력함인「오슬라비아」가 포격을 입어 큰 화재를 일으켜 전열을 이탈했다는 것, 오후 2시에 기함 「끄냐즈 수보로프(:Knyaz Suvorov.) 」도 큰 화재를 입었으며 후속 모든 함대도 화재를 입는 것이 많아 그 솟아오르는 연기가 서풍에 휘날려 해상 전체를 뒤덮었다는 것, 이 날은 오후7시28분에 전군에게 북항해 익일 아침에 울릉도에 집합하라고 전령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28일은 오전5시20분부터 일본해군은 울릉도 해역에서부터 행동을 시작했지만 곧바로 북동방향으로 이동하는 적함이 목격되어 오전10시30분에 다케시마 남방 약18해리 지점에서 러시아 전함인 「니콜라이1세」등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순양함 「이줌루트」만은 포위망을 빠져나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도주했지만 다른 전함 4척은 투항 의사를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도고는 「적함대 사령관 네보가토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네보가토프(1849년 4월 20일 ~ 1922년 8월 4일)는 러시아 제국의 해군 소장으로써 쓰시마 해전에 참전했으나 일본 함대에 패배했다. 1905년 러일 전쟁 말기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과 함께 발트 함대를 이끌고 태평양 제3 함대의 기함 니콜라이 1 호(종전 후 일본이 소유함. 함명도 '이키'로 교체됨.)와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해안 방어 전함 아드미랄 우샤코프 호, 아드미랄 세냐빈(전후 일본이 소유. 이름도 '미시마'로 교체), 게네랄 그라프 아프라크신(전후 일본이 소유. 이름도 '오키노시마'가 됨) 등을 이끌고 출전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베트남을 지나 9개월 만에 전투지로 도착했으나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 함대에게 함선의 대부분이 궤멸 당하게 되고 1905년 5월 28일 남은 전함과 제독들과 함께 일본군에 항복하고 만다.<출전: 위키백과>) 소장은 그 부하와 함께 항복 의사를 표시하고 본관은 특히 그 장교 이상에게 검 휴대를 허가해 이를 받았다」며 「이 대전에서의 적의 병력, 우리와 크게 차이가 없었고 적의 장졸도 또한 그 조죽을 위해 최선을 다해 분투했음을 인정한다(此対戦における敵の兵力、我と大差あるにあらず、敵の将卒もまた其祖国の為に極力奮闘したるを認む)」며 패자에 대한 배려의 마음도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틀간의 전투로 우리 함대가 잃은 건 수뢰정 3척 뿐으로 기타 약간의 손해를 입기는 했지만 향후 임무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또한 사상자는 전군을 통해 장료 이하 전사자 116명, 부상자 538명으로 그 자세한 내용은 별도 보고하겠다(此二日間の戦闘に於て我艦隊の失ひたる所は、水雷艇三隻のみにして、其の他多少の損害を蒙りたるものの、一として今後の役務に支障あるものなし、又た死傷は全軍を通じ、将校以下戦死百十六名、負傷五百三十八名にして、其細別は別に報告せる)」며 일본의 손해도 보고하고 있다.

 또한 각 방면으로는 5월 29일, 30일에 「리앙쿠르암 부근(リヤンコールド岩付近)」에서의 승리로 해군으로부터의 타전으로 전했는데 『관보(官報)』 6월 5일자의 「정정」란에 「지난 달 29일 관보 호외 본란 일본해해전 전보 항 3 및 6월 30일 동일 일본해해전 속보 항 그 5 중에 「『리앙쿠르암(リヤンコールド岩)』을 모두 『다케시마(竹島)』로 정정함」이라 되어 있다. 이 해의 2월에 리앙쿠르섬에서 새롭게 다케시마로 섬 이름이 바뀐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도고는 1907(메이지40)년 5월 후에 다이쇼일왕(大正天皇)이 되는 황태자 동궁(東宮)전하의 산인(山陰道) 행차(行啓)의 수행원으로 시마네현을 방문하고 있다. 5월 14일, 마이즈루항(舞鶴港)에서 군함「가시마(鹿島)」에 승선해 미호세키(美保関)에 착안해 5월 15일 사카이항(境港)으로 상륙, 돗토리현을 들른 후, 5월 21일에 시마네현으로 들어가 야스기(安来), 마쓰에(松江), 이마이치(今市/현 이즈모시=出雲市), 오타(大田), 고츠(江津), 하마다(浜田), 오키(隠岐)를 방문하셨다.

 5월 27일, 이마이치(今市)에서의 밤은 「이날 일본해해전의 기념일이 되어 오후7시 도고 해군대장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함(此日日本海々戦ノ紀念日ナルヲ以テ午後七時東郷海軍大将ニ御陪食仰ラレタリト)」이라며 황태자가 식사를 함께 해 축하술을 도고에게 권하셨다고 한다.

3. 다케시마에서 일본해해전을 목격한 나카와타세 니스케               
 「5월28일 아침의 일로 섬에서는 그날 아침 굉장할 정도로 강치가 잡혀 이에 몰두해있었는데 서쪽 앞바다에 굉장히 큰 대포 소리가 들리고 흐느적거리며 4척의 군함이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그 무렵은 일본해 어부 중에 군함을 가려내지 못하는 자가 없었을 정도로 잘 살펴보니 틀림없이 적의 군함으로, 어떻게 해서든 우리 함대에 알리고 싶었지만 새도 다니지 않는 섬에서 그것도 불가능해 분한 눈물을 흘렸는데 만약 밀려 올 경우 무라타총(村田銃 : 사츠마번(薩摩藩)의 일본육군 화기(火器)전문가였던 무라타 츠네요시(村田経芳)가 프랑스의 그라스(Gras)총의 국산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개발해 1880년에 일본군이 채용한 최초의 국산 소총. <출처: 위키백과>)으로라도 대응하려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대방은)움직일 기력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우리 군함이 위풍당당하게 다가와 잡아 전쟁은 (일본의)대승리다!, 대일본제국 만세!라고, 우리 어부는 포대(砲台) 대신에 강치를 잡아 강치의 목을 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후에 들어보니 이것이 니콜라이1세, 세냐빈 등의 유명한 군함이었다고 한다」
 
 이는 1934(쇼와9)년 6월 오사카 아사히신문 기자가 다케시마로 건너가 강치잡이를 했던 오키 어부들로부터 「섬의 좌담회(島の座談会)」로 취재했을 때 나카와타세 니스케라는 인물이 일본해해전을 다케시마에서 목격한 추억을 말한 내용이다. 좌담회에서는 이와 더불어 강치의 생태를 조사하기 위해 섬에 와있던 테라우치(寺内)라는 수의사가「발틱함대의 기함나포의 역사적 광경말이군요, 유명한 네보가토프 사령관의 패전훈시『우랄의 산이 높다고는 해도 때는 언젠가 무너진다, 흑해가 깊다고는 해도 때가 지나면 마른다, 천지의 사물 모두 하늘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ウラルの山高しといえども時いずれは崩る、黒海の水深しといえども時いたれば乾す、天地の事物悉く天意の命に従はざるべかざる)』라는 비통한 말은 이 해상에서 내뱉은 말이군요」라고 발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사의 마지막에는「때마침 이날 밤 6월 19일은 고 도고 원수의 삼칠일, 모두 잠시 감개에 젖어 옛 전쟁터의 석양에 묵도를 올렸다(ちょうどこの夜六月十九日は故東郷元帥の三七日、一同しばし感慨深く古戦場の夕焼けに黙祷した)」고 되어 있다.

 1905년 5월 28일, 다케시마에 있어 일본해해전을 목격했다는 나카와타세 니스케에 대해서는 조금 조사한 것이 있어 아래에 그에 대해 보고한다.

 1905(메이지38)년 시마네현 오키의 소속이 된 다케시마의 강치잡이는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郎), 가토 주조(加藤重蔵), 이구치 류타(井口龍太), 하시오카 유지로(橋岡友次郎)가 공동으로 설립한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竹島漁猟合資会社)」하에 시작되었다. 당초는 다케시마에 같은 강치잡이를 노리는 밀어자가 있어 회사는 리스트를 작성해 사이고(西郷)경찰서에 고발했다. 그 고발된 사람 중에 「가고시마현 가와나베군 치란무라 미나미벳부 나카와타세 니스케(鹿児島県川辺郡知覧村大字南別府 中渡瀬仁助)」가 있다. 다만 이 밀어자들은 다케시마에 대해 잘 알고 강치잡이 기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는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에 사원으로 채용되었다. 나카와타세 니스케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카이 요사부로의 「다케시마어럽합자회사 영업성적략 메이지38년분(竹島漁猟合資会社営業成績略 明治三十八年分)」에는 밀어자를 언급하며「그 밀어자 중에 어업 허가에 참가해 본사에 들어온 자는 본사 결사 시, 혹은 (후략)(彼ノ密漁者ニシテ漁業ノ許可ニ加ハリ本社ニ入ルヲ得タルモノハ本社ノ結社ニ際シ或ハ其密猟ヲバ其侭本社ノ営業ト為シ以テ彼等ガ密猟中ニ被リタル損害ヲ巧ニ本社ニ稼セントシ)」라며 밀어자의 일부를 사원으로 삼은 것, 그들에게 경계해야만 할 요소가 있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나카와타세는 오키의 니시노시마 우라고(西ノ島浦郷)의 여성과 결혼해 그 지역에서 1907년 2월 30일자 출어를 독촉하는 회사 앞으로 보낸 서간이 남아 있는데 어느 시기부터 회사가 있는 사이고마치(西郷町字西町)로 옮기고 있다. 그는 30년 정도 매년 다케시마로 건너가 철포로 강치를 잡아 그의 솜씨는「철포명인」으로 칭찬받았다. 현재 시마네현의 산베자연관에 전시되어 있는 「리앙쿠르대왕(リヤンコ大王)」이라는 별명이 붙은 거대한 강치 박제는 나카와타세가 한발의 총탄으로 잡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나카이 요사부로의 「대리인」이라 자칭하였고 주위 사람들은「두령」이라 불러 다케시마에서의 현장책임자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카와타세는 철포 이외의 강치 포획방법도 잘 말했고 오키도에서 동굴이 많아 시기에 따라 강치가 찾아오는 니시노시마 미타베(西ノ島 三度)의 사람들과도 정보 교환을 자주 실시했다.

 또한 다케시마의 강치는 연해주에 서식하는 것과 같은 종으로 치시마열도(千島列島)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고도 말하고 있다. 1953년 당시 시마네현 도쿄사무소에 근무했던 하야미 야스다카(速水保孝) 씨 등이 오키로 가서 청취조사를 했던「나카와타세 니스케 구술서(中渡瀬仁助口述書)」(「다케시마 어업의 변천 강치국 제2과(竹島漁業の変遷 アジア局第二課)」수록)가 있는데 이때 나카와타세는 이미 고령으로 정확한 조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진1 발틱함대의 물자수송선 이르티슈호의 침몰직전을 그린 스기우라 히스이(杉浦非水)의 스케치화(「군국화보(軍国画報)」게재)    

사진2 러일전쟁도(日露戦争図)・다케시마 부근의 부분도
빨간 원으로 둘러싼 부분(○내의 글자는 항복함=降伏艦) 속에 있는 ▲표시는 군함, 항복함은 발틱함대, 이를 포위하고 있는 것이 일본해군
『일본해전기부록(日本海戦記附録)』1907(메이지40)년 발행(하마다시 향토관 소장)  

사진3 도고 헤이하치로와 동궁전하(후에 다이쇼일왕=大正天皇이 됨)
(산인도 행차 기념 그림엽서, 개인소장) 

사진4 나카와타세 니스케의 일본해해전 목격 회상을 게재한 신문기사

 

독도본부 2013. 01. 18.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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