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본부는    · 시작페이지로    · 즐겨찾기    · 오시는길    · 메일보내기    · 사이트맵

2018년 06월 21일 목요일

내용검색  

독도위기자료

한일어업협정

영유권문답

독도위기칼럼

독도영유권위기 논문

세계가 보는 독도

일본의 독도정책

동영상강좌

  현재위치 > 독도본부 > 독도영유권위기 > 일본의 독도정책 > 일본의 독도역사 왜곡

 


교과성  |  동영상  |  정부  |  민간  |  일본공작문서  |  일본의 독도역사왜곡

오키 어부 와키타 사토시, 가와하라 하루오가 말하는 쇼와기의 다케시마

隠岐の漁師脇田敏、河原春夫が語る昭和期の竹島

2010.03.30 게재

스기하라 연구고문의 연구리포트

서두 
  오키제도(隠岐諸島) 도고(島後)의 오키노시마쵸(隠岐の島町)에서 에도시대에 지속적으로 울릉도와 다케시마로 도해한 건 고카(五箇)지구 후쿠우라(福浦)와 구미(久見)지역의 어부였다. 그리고 그 후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미어업협동조합에 소속된 11명이 다케시마에서의 일본인의 마지막 어로가 되는 1954(쇼와29)년 5월의 출어에 참가했다.

 이때의 상황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체험자 야와타 나오요시(八幡尚義) 씨(2008년 12월 사망)로부터 직접 들은 일이 많았지만 이번에 당시 구미어업협동조합장이었던 와키타 사토시 씨가 쓰신 「다케시마어업권행사의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 발견되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와키타 씨와 함게 다케시마로 도항했던 가와하라 하루오 씨가 1965년 6월의 한일기본조약, 한일어업협정 체결로 이승만라인은 소멸되었지만 다케시마는 잠정수역 안에 놓여 반환되지 않았던 비통함과 분함을 6월의 특집을 꾸민 주간지 『여성자신(女性自身)』을 통해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 두 분이 말하는 1955년 전후부터 1965년경의 오키 어민들의 다케시마에 대한 마음을 정리해두고자 한다.

1. 쇼와30년 전후의 다케시마 
  1951(쇼와26)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국제사회로 복귀함과 동시에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도 확정했다.

 이 해의 11월, 다케시마의 현황을 확인하기 위해 돗토리현립 사카이고등학교(鳥取県立境高校) 수산과의 교원 등은 실습선인 「아사나기마루(朝凪丸)」로 다케시마로 건너갔다. 이 도항에 참가해 다케시마에 조선인들이 남긴 유물을 확인한 요시오카 히로시(吉岡博) 교사는 도해일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섬의 현황을 호소해 하루라도 빨리 적절한 조치를 취해 일본어민이 출어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世人に島の現状を訴え、一刻も早く適切なる処置をとって日本漁民の出漁出来ることを願うものである。)」고 기록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효력을 발하기 직전인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의 이승만대통령은 해양자주선언, 이른바 이승만라인 설정을 발표하고 다케시마를 자국 영해로 포함시켰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1월 28일자 구상서(口上書)를 통해 항의했다.

 1953년 5월 28일, 일본해의 쓰시마난류 조사를 하고 있던 시마네현 수산시험선인 「시마네마루(島根丸)」는 다케시마에서 한국기를 내건 동력선 6척, 무동력선 6척이 해조와 패류를 채취 중인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울릉도에서 건너 온 어민이 30명 정도 있다는 것도 판명되었다.

 시험선「시마네마루(島根丸)」는 두 번째 조사 중인 1953년 6월 15일, 16일에 다케시마에 조선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1주일 후인 6월 23일, 외무성은 한국에 엄중히 항의했다. 같은 날에 한국은 다케시마는 한국영토라고 답변해왔다.

 그리고 6월 25일에 시마네현립 오키고등학교 수산과 관계자는 교장인 이치가와 다다오(市川忠雄)의 지시로 다케시마에 대한 현황 확인에 실습선「오토리마루(鵬丸)」로 건너가 6명의 조선인이 섬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편 시마네현과 해상보안부도 합동으로 조사대를 다케시마로 파견해 오키고등학교의 오토리마루(鵬丸)가 섬을 떠나는 것을 기다려 6월 27일에 시마네현 직원 2명, 시마네현 경찰관 3명, 해상보안관 25명이 섬에 상륙했다. 시마네현 수산상공부 직원인 澤富造, 이가와 노부오(井川信夫)는 이때의 일의 복명서(復命書)를 당시 츠네마츠 야스오(恒松安夫) 지사에게 제출하고 있어 다케시마에서의 한국인 6명에 대한 심문, 표주(標柱) 등의 설치와 1948년의 미국공군 사격훈련으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이 된 한국인 14명의 위령비의 비문명을 알고 있다.

 그 직후인 7월 12일에는 해상보안부 순시선인「헤쿠라(へくら)」가 한국으로부터 발포당하는 사건도 일어나 7월 24일의 시마네현 수산대회는 다케시마 문제해결 촉진을 결의하고 각 방면에 진정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54(쇼와29)년 5월 3일에 이번에 보고하는 구미어협관계자를 중심으로 한 다케시마에서의 어로가 실시됐다.

 이 해에 한국은 다케시마의 동도(東島)에 등대건설을 시작했다. 11월 21일에는 다케시마 주변을 초계중인 순시선「헤쿠라(へくら)」, 「오키(おき)」가 다케시마로부터 한국의 포격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1955년 이후, 국회에서 다케시마 문제에 대한 질문이 츠지 마사노부(辻政信) 의원 등에 의해 이어오고 있었지만 내각의 중추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 1896년 11월 13일~1987년 8월 7일. 일본의 정치인이다. 농상무성 장관,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일본의 정2위국화장을 받았다.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 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936년에 만주국 정부의 산업부 차관이 되어 산업계를 지배하다가 1940년 귀국하여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에 취임했다. 군수성 차관으로서 전쟁 강행을 주장하는 도조 총리와 대립하여 1944년 도조 내각이 무너지는 데 한몫을 했다. 1957년에 일본 총리가 되었으나 1960년 미일안보조약 비준을 강행하면서 대규모 군중 시위 등 혼란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출처: 위키백과>) 총리대신, 후지야마 아이이치로(藤山愛一郎 : 1897년 5월 22일~1985년 2월 22일. 일본의 정치인이자 기업인이다. 외무대신, 경제기획청 장관, 후지야마 콘체른 (藤山コンツェルン) 의 총수를 지냈다. <출처: 위키백과>) 외무대신 등으로부터는 「원만한 방법으로 해결을 도모하겠다」는 취지의 답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한일어업협정이 통과되어 이승만라인은 사라졌지만 다케시마는 일본에게 반환되지 않았다. 당시 오키의 도민들의 마음을 가와하라 하루오 씨가 전술한 주간지를 통해 말하고 있다.

2. 와키타 사토시의 「다케시마어업권행사의 경과」를 보여주는 수기 
  와키타 사토시의 위의 수기는 1954년 4월 22일부터 날짜를 기록하면서 쓰여 있다. 이날 시마네현 수산상공부의 이가와(井川) 기사(技師)로부터 전화가 와 가까운 시일 내에 구미어업협동조합으로 갈 테니 만나주었으면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가와 기사와는 전년에 다케시마에 있는 6명의 한국인에 대해 대응하기 위해 섬으로 건너간 시마네현의 직원이다.

 4월 27일에 이가와 기사가 오키를 찾아와 두 사람은 면담했다. 용건은 시마네현은 다케시마에서의 공동어업권 면허는 내고 있지만 어업권 행사에 대한 실적이 없어 구미어협에 어업권 행사인 미역채취를 실시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다케시마로의 왕복은 시마네현의 어업단속선인 「시마가제(島風)」를 사용해 이승만라인 설정 후의 비상 시기이므로 제8관구 보안본부에서 순시선 5척이 호위할 것, 현장에서 어로를 행하는 어업자 10명과 작은 배 3척을 준비해 줄 것, 이 행동은 비밀리에 행하고자 하므로 참가자에게는 가족에게도 이야기하지 말 것을 철저히 지켜달라는 것 등이었다.

 이가와 기사가 이야기를 마치고 어협을 떠나자 와키타는 협동조합의 이사였던 츠쿠다 다다치카(佃忠親)를 불러 사정을 이야기하고 더불어 다케시마로 건너갈 조합원에 대한 인선을 실시했다. 38세의 와키타, 41세의 츠쿠다도 참가하고, 기타 60대 베테랑에서부터 유일한 20대 야와타 나오요시(八幡尚義)까지 총11명이 4월 28일까지 의견을 물어 승낙했다.

 4월 30일에 구미(久見) 건너온 시마네현 어업단속선「시마가제(島風)」에 3척의 작은 배를 싣고 어구는 각자가 준비해 지참했다. 5월 1일에 출항이 결정되자 와키타는 지역 신사의 궁사(宮司 : 신사의 우두머리 신관.) 야와타 가츠아키(八幡克明)에게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처해 줄 것을 의뢰했다.

 5월 1일 오후2시반에 구미항을 출발해 다른 순시선과 합류하기 위해 도젠(島前)의 벳부항(別府港)으로 향했다. 벳부에 이미 입항해있었던 건「오키(おき)」,「구즈류(くずりゅう)」,「나가라(ながら)」,「미우라(みうら)」,「헤쿠라(へくら)」라는 5척의 순시선이었다. 날씨가 나빠져 이 날의 다케시마행은 중지되었다.

 다음 날 2일의 오전 중은 출항명령이 내려지지 않아 와키타 만이 상륙을 허가받아 담배 등을 샀다. 5척의 순시선은 벳부만 내에서 방수훈련을 반복해 장관이었다고 한다. 저녁 후에 각 배의 책임자가「오키(おき)」호에 모였다. 오늘 밤 안에 출발한다는 지시가 있었다.

 3일 아침, 와키타 등 11명이 승선한 「시마카제(島風)」의 옆을「오키(おき)」가 호위하고, 다른 4척은 부채모양으로 항해하면서 나아가 오전 10시경에 다케시마에 도착했다. 곧바로 작은 배를 내려 조업을 시작하기로 되었지만 만일의 경우는 적기(赤旗)를 흔들고 사이렌을 울릴 테니 「시마카제(島風)」가 아닌「오키(おき)」로 오라는 말을 들었다.

 11명은 3척의 배에 승선해 미역채취를 시작했다. 생전의 야와타 나오요시는 미역이 길고 두꺼웠다는 것과 전복도 채취했다고 말했다.

 오후가 되어 날씨가 나빠져 오후 2시경에 조업을 마치고 다케시마를 떠나 구미항을 향했다. 순시선「오키(おき)」등은 방향을 마이즈루(舞鶴)로 향해 사이렌을 울리면서 떠나갔다. 「시마카제(島風)」는 4일 오후에 구미항으로 입항해 미역을 내리고는 마쓰에를 향해 오키를 떠났다.

 출항 때 벳부에서 대기했기 때문에 예정보다 하루 늦게 귀항해 만일을 대비해 부탁했던 궁사(宮司)가 걱정했었지만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뻐해주었다.

 이 구미어협조합원의 다케시마에서의 어업권 행사가 한국이 알았는지 여부는 불명확하지만 6월부터 한국정부가 연안경비대를 다케시마에 배치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사진: 다케시마 시험조업을 향하는「시마가제(島風)」선상에서의 기념촬영(1954년 5월 2일) 구미어협조합 출어자, 시마네현 직원 포함 11명. 적색원이 와키타 사토시 조합자, 파란원이 가와하라 하루오 씨.

3. 가와하라 하루오가 말하는 한일기본조약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었다.

 같은 해 6월 30일자 특별호에서 주간지 『여성자신(女性自身)』이「르포르타주 [다케시마]에 대한 소리(ルポルタージュ 「竹島」についての話し方)」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첫 헤드라인에「다케시마-일본해에 떠 있는 작고 작은 섬입니다. 그 섬이 일본령인지, 한국령인지, 한일조약은 귀속을 정하지 않고 조인되었습니다. 어장을 빼앗긴 어부는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는 베트남전쟁도 관계된다는…(竹島-日本海に浮かぶ、小さい小さい島です。その島が日本領なのか、韓国領なのか、日韓条約は、帰属をきめないで調印されました。漁場をうばわれた漁師は怒っています。それには、ベトナム戦争も関係するとか…)」이라며 오키와 시마네현에서의 취재를 중심으로 특집을 짜고 있다.

 이 특집 중에 오키 어부의 대표로 많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게 가와하라 하루오입니다. 가와하라는 1954년 5월, 와키타 사토시 등과 다케시마에서 어업권을 행사한 구미어협 조합원의 한사람입니다. 1965년의 취재에서도 11년 전의 추억을 말하고 어렸을 적에 다케시마에서 부친이 자주 데리고 왔던 강치가 자신이 도항했던 1954년에는 십 수 마리밖에 현지에서 보이지 않았다는 것, 미국공군의 폭격연습으로 죽었다는 한국인의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위령비가 눈에 들어왔다는 것, 다케시마는 2, 3시간이면 미역을 1인당 500관(1,875kg) 채취되었고 전복도 1인당 90관(337.5kg)이나 채취되는 보물섬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1965년경은 오키 주변은 어패류 조업이 부진해 미역과 다시마 채취에 의지했었는데 한일기본조약으로 다케시마가 반환되어 다케시마에서의 어업재개를 바라마지 않았다.

 또한 반환의 가능성을 사토(佐藤) 총리대신, 지역의 오하시 다케오(大橋武夫) 국회의원 등이 말했기 때문에 다케시마 반환이 보류되자 오키 어민들의 낙담과 분노는 컸다. 「한국인의 표류와 밀항으로 해마다 20척의 배가 시마네현으로 표류해온다. 그 뒤처리에 각 지역자치단체는 그나마 없는 예산을 쓰고 있다. 게다가 다케시마가 (반환이)보류된다면 전후 20년간의 어장 보상을 해주길 바란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있다.」며 대부분의 오키 어부들의 의견은 이와 같았다.

 당시 건재했던 다케시마 문제에 해박한 시마네현 총무과의 다무라 세자부로(田村清三郎) 씨도 다케시마 문제를 보류한다면「적어도 국제사법재판소나, 제3국의 조정을 의뢰하는 정도의 방향을 보여주길 바랐다.」는 담화와「이승만 대통령이 다케시마를 일본에게서 빼앗은 건 큰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다. 이승만은 반일적인 분위기에 편승해 인기를 얻었다. 다케시마는 이를 위해 이용된 것에 불과하다. 」는 다케시마 문제 해석을 발표하고 있다.

 『여성자신(女性自身)』의 담당자는 한일기본조약이 초스피드로 통과, 조인된 것에는 베트남전쟁의 영향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베트남전쟁이)수렁에 빠져 유럽에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1965년 5월 16일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한국군 1개 사단을 남베트남으로 파병하겠다고 약속하고 존슨 미 대통령이 악수를 요청하면서 「한일회담 타협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것, 한일기본조약의 6월 22일의 타결로 다케시마가 보류가 된 것 외에 일본이 한국에 8억 달러(2,880억 엔・차관도 포함)를 지불하기로 한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독도본부 2013. 01. 09.  www.dokdocenter.org

관련
내용
관련내용이 없습니다

 


| 개 요 | 이 책은 2008년도에 일본 중의원에서 독도문제와 관련해 내각에 제출한 ...

 

 
  Copyright ⓒ 2001.독도본부. All rights reserved
전화 02-747-3588 전송 02-738-2050 ⓔ-Mail : dokdo2058@korea.com
후원 :국민은행 024-047973-01-019(독도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