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본부는    · 시작페이지로    · 즐겨찾기    · 오시는길    · 메일보내기    · 사이트맵

2018년 10월 17일 수요일

내용검색  

독도위기자료

한일어업협정

영유권문답

독도위기칼럼

독도영유권위기 논문

세계가 보는 독도

일본의 독도정책

동영상강좌

  현재위치 > 독도본부 > 독도영유권위기 > 일본의 독도정책 > 일본의 독도역사 왜곡

 


교과성  |  동영상  |  정부  |  민간  |  일본공작문서  |  일본의 독도역사왜곡

1902년 외무성 통상국 편찬「통상휘찬」이 말하는 울릉도

1902年外務省通商局編纂の「通商彙纂」が語る鬱陵島

스기하라 연구고문의 연구리포트

서두 
  메이지시대, 외무성 통상국이 각지의 영사로부터의 보고를 정리해 간행한 「통상휘찬(通商彙纂)」이란 것이 있다. 그 중에 1902(메이지35)년도의 것에는 울릉도경찰관주재소의 경부(警部) 니시무라 타마조(西村圭象)가 부산영사관의 이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 : 1872년 8월 11일~1951년 3월 10일.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1945년 10월 9일부터 1946년 5월 22일까지 제44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그 이전에는 외무 차관, 주미 대사, 가토 내각· 하마구치 내각의 외무대신을 지냈다. 그는 외무대신 시절, 일본 군부에 저항해 미국과 영국에 대한 협조, 중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등의 외교 방침을 지향하였고, 전 후에는 일본 천황에게 조각 명령을 받아 미군의 점령 하에 시데하라 내각을 조직하였다. 또, 부인 마사코와는 런던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혼인하였는데, 부인은 미쓰비시 재벌의 창립자 이와사키 야타로의 넷째 딸이었다. <출처: 위키백과>) 영사에 대한 1902년 5월의 보고를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부록 한국 울릉도사정(付録 韓国鬱陵島事情)」이라는 부분이 있다.

  1902년으로 말하면 직전인 1900년에 조선에서는 칙령41호로 울도군(鬱島郡)이 생겼고, 직후인 1906년에는 나카이 요사부로, 오쿠하라 헤키운 등 45명의 시마네현 조사단이 울릉도를 방문하고 있어 이들과 연관시키면 매우 흥미로운 자료라 하겠다.

 아래에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울릉도의 지세에 대해 
  우선 이 기록은 울릉도 본토의 지세(地勢)를 강원도 울진으로부터의 거리, 둘레 9리반이라는 섬의 크기, 가파른 절벽이 많고 모래사장이 적지만 섬 내부는 울창한 수목이 번식하고 있는 형상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데츠세미섬은 와달리 앞바다에 있으며 일본인은 이를 다케시마라 속칭한다, 둘레는 약30정, 「다브」해장죽 울창하지만 식수가 없어 이주하는 자가 없다고 한다(テツセミ島ハ臥達里ノ前洋ニ在リ、本邦人之ヲ竹島と俗称ス、周回三拾丁余、「タブ」女竹繁スト雖トモ飲料水ナキヲ以テ移住スルモノナシト云フ)」라며 1개의 섬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 연구자 게리 비버스(Gerry Bevers) 씨는 데츠세무섬(テツセム島)이란 죽서(竹嶼)라는 한국식 발음의 일본어표기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리고는 「정석포 해상에 쌍촉석 및 도목의 도협있다, 둘레 20정, 일본인 이를 관음도라 칭한다, 그 곶을 관음곶이라 말하고 그 사이를 관음의 좁은 해협이라 부르고 쌍촉석은 삼암이 높게 자리 잡고 있어 3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亭石浦ノ海上ニ双燭石及び島牧ノ島峡アリ、周回二十丁、本邦人之ヲ観音島ト称シ、其岬ヲ観音岬ト云ヒ、其間ヲ観音ノ瀬戸ト呼ヘリ、又双燭石ハ三岩高ク樹立スルニヨリ三本ノ名アリ)」라며 현재 3개서있는바위(三本立ち岩)라 불리고 있는 암초도 지금도 관음도(観音島)라 불리는 섬을 소개하고 있다. 「통상휘찬」은 울릉도의 지세에 대해 이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1900년, 조선에서는 칙령41호로 울릉도(蔚陵島), 죽도(竹島), 석도(石島)의 3개 섬으로 구성된 울도군(鬱島郡)이 탄생했다. 석도가 3개서있는바위(三本立ち岩)와 관음도(観音島)의 총칭일 경우 「통상휘찬」에서 말하는 지세와 딱 맞다.

 조선에서 발행되었던 「황성신문」의 1906년 7월 13일자 기사에 울도군의 범위를 나타내는 것이 있지만 이도 이 (통상휘찬의)지세와 맞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에서는 석도를 울릉도에서 92km 떨어진 장소에 있는 일본의 다케시마라는 설이 주류다.

2. 울릉도 거주 조선인의 상황 
  「통상휘찬」은 2번째로 울릉도의 조선인들의 활동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영주자가 없었던 울릉도에 1881년에 강원도에서 배기주(裴季周), 김대목(金大木), 도경운(卜敬云), 전사일(田士日)이라 자칭하는 4명이 울릉도에 거주하기 시작해 개척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공도정책의 종료임과 동시에 1895년부터 울릉도의 도감(島監)이라는 최고의 직책에 올라 활약하는 배기주가 개척의 선구자의 한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존되어 있는 「울릉도재류민단속을 위해 경찰관 파견의 건 상신(鬱陵島在留民取締ノ為警察官派遣ノ件上申)」이라는 문서도 「배기주는 인천의 맞은 편 영종도의 주민으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울릉도에 이민 개척을 계획하고 솔선해 해당 섬으로 도항하여 그 개척에 종사했다(裴季周ハ仁川ノ対岸永宗島ノ住人ニシテ今ヨリ二十年前鬱陵島ニ移民開拓ノ挙ヲ計画シ率先シテ該島ニ渡航シ其開拓ニ従事シ)」며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배기주는 도감 시절인 1898년에 돗토리현과 시마네현 사람이「울릉도에 개인적으로 건너가 수목을 남벌(鬱陵島へ私航、樹木濫伐)」하고 있다며 직접 돗토리현 사카이항(境港)과 시마네현 마쓰에(松江)에 나타나 재판소에 고소하기도 했다. 조선본토에서 강원, 경상, 함경, 전라도 사람을 중심으로 이주민이 늘어나 1901년 단계에서는 3,340명이 556가구의 가족으로 생활하고 있었다.「각지에 산재해 개간을 부지런히 힘써 오로지 농업을 영위하고 어업에 종사하는 자는 적었다(各地ニ散在シ精励以テ開墾ヲ為シ専ラ農業ヲ営ミ漁業ニ従事スルモノハ僅少ナリ)」, 「일반 풍속은 실로 소박하고 검소했으며 흉악하고 잔인한 이들이 없었으며 어느 곳이든 자주 서당을 세워 아동을 모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가르쳤다(一般ノ風俗ハまことニ淳朴質素ニシテ兇暴、残忍ノともがらナク、到ル処往々書堂ヲ設ケ児童ヲ集メテ孔孟ノ教ヲ授クル)」, 「인정이 온후하고 성실하고 무역에 있어서도 이전에 분란을 양성하는 일 없이 재류 일본인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있어서도 원활했다(人情温厚誠実ニシテ彼我貿易上ニオイテモ曾テ紛擾ヲ醸シタルコトナク、在留本邦人トハ常ニ直接ノ関係ヲ有スル二ヨリ至テ円滑ナリ)」는 등 일본인이 본 울릉도 조선인에 대해 소묘하고 있다.
    
3. 울릉도의 일본인에 대해 
  「통상휘찬」은 1901년에 울릉도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548명, 가구 수 79채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섬으로 건너간 역사로 「옛 세키슈 하마다, 하쿠슈 경계지방에서 본섬으로 건너가 수목을 벌채해 수출한 적이 있다(昔石州浜田、伯州境地方ヨリ本島ニ渡リ樹木ヲ伐採シ輸出セシコトアリ)」, 「1879(메이지12), 1880(메이지13년)에 오사카에서 도쿄사가 다수의 나무꾼을 데리고 와서 느티나무를 벌채해 교토의 어느 절을 건축하는 목재로 제공한 적도 있다(明治十二三年中大阪ヨリ東京社ハ多数ノ樵夫ヲ連レ来リ槻(ケヤキ)ヲ伐採シテ京都某寺ノ建築用材ニ供シタルコトアリ)」, 「1829년에 이르러 오키국에서 제목꾼 여러 명이 도항해오기 시작해 임시 오두막을 짓고 영주하기에 이르렀다(明治二十五年ニ至リ隠岐ノ国ヨリ製材者数名渡航シ来リ始テ始テ假小屋ヲ構ヘ永住スル二至レリ)」라는 등을 기록하고 있다. 문장 중의 도쿄사(東京社)는 도쿄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郎)가 조직한 오쿠라구미(大倉組)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쿠라구미(大倉組)가 행한 울릉도에서의 개척 사업을 말한다.

 문장 중의 1892(메이지25)년에 영주를 시작한 오키국(隠岐国) 사람으로 구체적으로는 치부군(知夫郡) 우가무라(宇賀村/현재의 오키군 니시노시마쵸 우가=隠岐郡西ノ島町宇賀)의 와키다 쇼타로(脇田庄太郎)가 유명하다. 「통상휘찬」에도 「현재 첫 도항자는 불과 재목 겸 대장장이업 시마네현 평민 와키다 쇼타로 1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고 그 외의 도항자는 길게는 7, 8년이 되었다(今ヤ初航者ハ、僅ニ製材兼鍛冶業 島根県平民 脇田庄太郎一名現住シ、其他ノ渡航者ハ長クモ七八年ニ過キス)」고 되어 있고, 외무성 외교사료관의 자료에도 「다케시마에서 대장장이업을 하여 다케시마의 생산품과 교환하는 자(竹島ニ於テ鍛冶職ヲナシ竹島ノ産物ト交換ヲスル聞ヘアル者)」로 와키다 쇼타로를 소개하고 그의 처인 기쿠(キク)도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마다 늘어나는 재류자에겐「재류민이 늘어남에 따라 불량한 자들이 들어와 단속할 필요가 생겼다(在留民ノ増加スル二従ヒ不良ノ徒入込ミタルヲ以テ取締ノ必要起リ)」, 「도항자는 대략 무지몽매한 자들로 자주 분란을 일으키고 강함은 약함을 능가하고 지자는 우자를 속이는 게 심해져 흉기를 지니고 폭행을 범하고 타인의 물건을 강탈하는데 이를 제지하는 자가 없다(渡航者ハ概ネ無智文盲ノともがらニシテ二尾紛擾ヲ起シ、強ハ弱ヲ凌キ、智者ハ愚者ヲ欺キ甚シキに至テハ兇器ヲ携ヘ暴行を加ヘ、他人ノ物件ヲ強奪セシコトアルモ之ヲ制止スルモノナク)」며 문제도 발생했다. 이를 위해 유지(有志)가 도모해「본 조합은 울릉도 일상조합이라 칭하고 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합으로 조직사무소를 도항에 마련한다(本組合ハ鬱陵島日商組合ト称シ在島日人合議ヲ以テ組織事務所ヲ道洞ニ設ク)」는 등 34개조의 규칙으로 구성된 합의제 조직을 설립했다. 당초에는「섬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완전히 2파로 분립되었다(在島の本邦人ハ全然二派ニ分立シ)」며, 하타모토당(ハタモト党/하타모토 요시조=畑本吉造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과 와키다당(ワキタ党/와키다 쇼타로=脇田庄太郎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라 불리는 2대 세력의 항쟁도 있었지만 1901년에는 서로 양보해 대립도 해소되었다.

 이 해의 8월 단계에서의 일상조합(日商組合)의 임원은 조합장이 하타모토 요시조, 조합부장(組合副長) 가타오카 요시베(片岡吉兵衛), 이사 후카다 진타로(深田甚太郎), 와키다 쇼타로(脇田庄太郎) 등 12명이 의원으로 모두 조합원의 선거로 선출되었다.

 1906년 3월 27일 시마네현의 조사단은 울릉도를 방문했지만 이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오쿠하라 헤키운(奥原碧雲)은 3월 28일에 「가타오카, 와키다, 요시오 씨 등의 저택으로 나뉘어 휴식을 취했다」고 「다케시마도항일지(竹島渡航日誌)」에 기록하고 있다. 가타오카는 가타오카 요시베(片岡吉兵衛), 와키다는 와키다 쇼타로(脇田庄太郎), 요시오는 돗토리현 사이하쿠군(西伯郡) 요나고마치(米子町)에서 섬으로 와서 있던 요시오 만타고(吉尾万太郎)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날에 앞선 3월 17일에 오키도청에서 와키다 쇼타로에게 조사단을 섬에서 안내해줄 것에 대한 의뢰장이, 와키다가 오키도청에 올해의 울릉도는 3월이 되어도 눈이 내려 매우 춥기 때문에 침구류 등을 준비해 섬으로 오길 바란다는 편지를 보내고 있고 그 사본이 시마네현 행정문서로 보관되어 있다.

4. 어업상황에 대해  
  「통상휘찬」은 그 외에 「섬의 생산물(島の物産)」,「무역개황(貿易の概況)」,「사업 환경(商況)」,「교통」,「기후」, 「전염병」등도 소개하고 있는데 주목되는 건 어업 상황이다.

 어업상황에는「본섬의 어업계절은 매년 3월부터 9월까지로 수확물은 전복, 복어, 참우뭇가사리, 김, 미역 종류에 불과하다, 어업자는 많아 구마모토의 아마쿠사, 시마네의 오키, 미에의 시마지역에서 건너왔다. 더불어 조선인 어부는 전무한 상태지만 매년 전라도 삼도지방에서 다수의 어부 등이 건너와 해안에 가득한 미역을 채취한다(本島ノ漁業季節ハ例年三月ヨリ九月迄ニシテ収穫物ハ鮑(あわび)、鰒(ふぐ)、天草、海苔、若芽ノ数種ニ過ギズ、漁業者ハ多ク熊本ノ天草、島根ノ隠岐、三重ノ志摩地方ヨリ渡来ス。而シテ韓人漁夫ハ皆無ノ有様ナレトモ毎年全羅道三島地方ヨリ多数ノ漁夫等渡来シテ海岸ニ満生スル若芽ヲ採取セリ)」고 한 후, 「또한 본섬의 정동 약50해리에 3개의 작은 섬이 있다, 이를 량코섬이라 말하고 일본인은 마츠시마라 칭한다, 이 섬에 다소의 전복이 나와 본섬에서 출어하는 자가 있다, 하지만 이 섬에 식수가 부족해 오래 출어하는 것은 불가능해 4, 5일간을 머물고 본섬으로 귀항한다(又本島ノ正東約五十海里ニ三小島アリ、之ヲリャンコ島ト云ヒ本邦人ハ松島ト称ス、同島ニ多少ノ鮑ヲ産スルヲ以テ本島ヨリ出漁スルモノアリ、然レトモ同島ニ飲料水乏シキニヨリ永ク出漁スルコト能ハサルヲ以テ四五日間ヲ経ハ本島ニ帰港セリ)」며 현재의 다케시마를 어장으로 취급하고 있다. 3개의 작은 섬이란 동도(東島), 서도(西島), 오덕도(五徳島)를 말하는 것일까. 울릉도까지는 건너오는 조선인의 량코섬으로의 도항은 기록되어있지 않다.

 이 1902년의「통상휘찬」이 출판된 다음해인 1903년, 오키의 나카이 요사부로가 량코섬에서 2년간에 걸친 강치잡이를 시작했다. 「1903년에 이르러 결연히 뜻을 정하고 자본을 투자해 어사를 짓고 인부를 옮기고 사냥도구를 준비해 먼저 강치잡이에 착수하다(구明治三十六年ニ至リ断然意ヲ決シテ資本ヲ投ジ漁舎ヲ構エ人夫ヲ移シ猟具ヲ備ヘテ先ツ海驢(アシカ)猟ニ着手致候)」, 「현재 재빠르게 성운을 항해가고 있는 일본의 강원, 함경지방에 대한 어업무역에 도움을 주는 곳, 본섬 경영의 앞날, 가장 필요하게 될 것(今日駿々乎トシテ盛運ニ向ヒツツアル処ノ本邦ノ江原、咸鏡地方ニ対スル漁業貿易ヲ補益スル所、本島経営ノ前途、最モ必要ニ被存候」며 나카이 요사부로는 1904년 메이지정부의 내무, 외무, 농상무 대신에게 「량코섬 영토편입 및 대하원(リャンコ島領土編入並びに貸下願)」을 제출했다. 여기에는 단순한 강치잡이 뿐만 아니라 울릉도와 조선본토를 내다본 마음도 담겨있다. (2010.03.30 게재)

 

 

독도본부 2013. 01. 09. www.dokdocenter.org

 

관련
내용
관련내용이 없습니다

 


| 개 요 | 이 책은 2008년도에 일본 중의원에서 독도문제와 관련해 내각에 제출한 ...

 

 
  Copyright ⓒ 2001.독도본부. All rights reserved
전화 02-747-3588 전송 02-738-2050 ⓔ-Mail : dokdo2058@korea.com
후원 :국민은행 024-047973-01-019(독도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