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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6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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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권은 지금이야말로 「역사문제」정치이용에 종지부를 찍어라

한국인 연구자와의 만남으로 통감한 「다케시마 문제」의 불모

(「韓国人研究者との出会いで痛感した『竹島問題』の不毛」)

『정론(正論)』2008년 2월호 (산케이신문사 간행)
타쿠쇼쿠대학 교수 시모조 마사오(下條正男)


●대조적이었던 「두 번의 만남」
  얼마 전 11월, 다케시마 문제와 관련해 두 번의 만남이 있었다. 첫 번째는 11월 16일, 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가 주최한 심포지엄. 두 번째는 11월 상순, 우연히 한국에 문헌 수집을 위해 갔을 때 한국의 국제법연구자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 한일관계와 다케시마 문제에 대해 환담했던 일이다.

  이 두 번의 만남은 노무현 정권말기의 한국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첫 번째 만남은 대통령의 방침으로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두 번째 만남은 사실에 근거해 한일관계를 개선하고자하는 건설적인 것으로 차기 정권과 이어지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정권교체가 다가오면 전정권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새로운 시점이 싹트고 수정되곤 한다. 다케시마 문제도 이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주최 심포지엄은 다케시마가 한국령이라는 사람들이 기획한 것으로 보이며 기조강연을 한 시마네대학 명예교수인 나이토 세이츄 씨는 일본 외무성이 주장하는 「다케시마 고유영토론」을 비판하는 것으로 한국에서는 저명한 학자로 통하고 있다.

  심포지엄 안내에는 연제가 「다케시마 고유영토론 재고」로 되어 있어 이 심포지엄의 성격은 명확하다. 다른 패널리스트로는 역사문제에서는 일본에 비판적인 사이트인 반월성통신을 주재하는 박병섭 씨, 도쿄대학 부교수 현대송 씨와 스가 유타카(菅豊) 씨가 있었다.

  이 가운데 나이토 세이츄 씨, 현대송 씨는 필자가 시마네현 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좌장을 하고 있었을 때 연구회에 초대한 적이 있다. 다만 나이토 세이츄 씨만은 필자가 연구회를 불참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 주장을 듣는 해프닝이 있었다. 

  따라서 나이토 세이츄 씨와는 첫 대면이었지만 국립대학에서 그것도 「일본의 주장」을 하나도 들을 수 없는 이상한 상황에서 심포지엄이 개최되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일반참가 형식으로 청강하기로 했다. 마지막 질의응답 때에 나이토 세이츄 씨에게 직접 질문하고 외무성이 주장하는 다케시마 고유영토론을 비판하는 논거를 질문했는데 나이토 씨는 답변하지 못했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후술하기로 하겠다.

  한편, 한국의 국제법연구자와의 환담을 보자. 그와의 만남은 같은 이웃동지, 성의를 다해 대화를 나눈다면 서로의 의견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었던 귀중한 경험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쪽에서 다케시마 문제는 「국제법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감상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내에서 주장되고 있는 다케시마의 역사와는 달리 일본의 다케시마 연구를 처음으로 듣고 역사전문가들 사이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한일관계가 다케시마 문제로 미묘한 상황에 있어 필자와 만난 사실을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래도 한국에도 이성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케시마 문제도 무엇이 문제인지, 한일 쌍방이 생각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예감하게 했다. 정권이 바뀌면 이도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국은 역사문제를 지나치게 정치적 수단으로 삼고, 일본은 너무나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은 미국 하원을 비롯해 캐나다, 네덜란드, 유럽 등의 의회에서도 위안부문제를 「강제적인 일본군의 성적노예」라며 일본에 대한 비판결의안을 채택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 국제사회에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고 있다.

  이도 「다케시마의 날」조례로부터 2년이 지나 역사문제에 대한 한국의 전략이 다방면으로 확산될 결과다.

  대체 한일관계는 어디서 톱니바퀴가 뒤틀려버렸을까, 본론에서는 한일 양국의 역사문제를 중심으로 향후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극복해나가면 좋은지. 두 번의 만남을 통해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한국폭주”의 계기가 된 중국과의 역사문제
  5년 전, 취임 초기의 노무현대통령은 역사문제는 「거론하지 않겠다」고 명언했었다. 하지만 2002년, 중국이 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동북공정(프로젝트)」를 추진하여 그때까지 한국이 한국사로 가르쳐 온 고구려사를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의 역사로 한 것으로 사정이 바뀌었다. 때문에 노무현대통령은 일본과 다케시마 문제를 다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도 고구려사문제로 다투게 된 것이다. 이는 노무현대통령이 2004년에 중국의「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고구려사재단」을 발족시킨 것과, 2005년의 시마네현의회에 의한「다케시마의 날」조례 제정에 대해「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올바른 역사정립기획단」을 설치하여 역사문제를 외교정책으로 삼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정권말기가 되어 단말마적인 공세로 바뀌어 한일, 한중관계를 불쾌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럼 왜 한국은 폭주한 것일까. 그건 한중일 삼국이 생각해야 할 과제다. 고구려사문제에는 복선이 있었다. 1999년, 당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재외동포법」을 제정하고 중국동북부 조선족을 포함한 재외조선족에게도 한국국민과 동일한 권한을 부여하고자 해 중국은 위기감을 느꼈다. 중국은 2002년에 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한「동북공정(프로젝트)」를 추진하고 한국에서 한국사로 가르치고 있는 고구려사를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의 역사로 하고 예방선을 펼쳤던 것이다.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고구려사재단」을 발족시켜 중국의「동북공정」에 대항했다. 이는 후술한 것처럼 고구려사문제의 배경에는 영토문제가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는 이전에 간도라 불려 1909년에 청의 영토가 된 역사가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는 돌연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역사재건」이 시정방침이 되어 원상복귀 의식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시대에 실시된 구조선총독부청사 철거 등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억이 새롭다. 이「역사재건」은 현 상황을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는 전통적인 「반정(反正)」관념을 토대로 하고 있어 역사적으로는 권력투쟁의 상투적인 수단이었다. 한국의 정권교체 시에 반동이 심한 건 이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다케시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도「다케시마의 날」조례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국민의 요구는 역사의 대의를 기초로 한다」고 한 것처럼 영토문제를 역사의 대의로 삼아 역사적 사실은 문제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통령의 자세는 전통적인「역사재건」으로 이어져 2005년 4월 20일에는 다케시마 문제와 일본의 역사교과서의 잘못을 규탄한다며 대통령직속의「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올바른 역사정립기획단」을 설립하기까지 했다. 이미 여기서는 대화의 단계를 벗어나 일본규탄모드로 들어갔다. 이는「다케시마의 날」조례제정 당시 외교통상부장관이었던 반기문 씨(현 유엔사무총장)가 다케시마 문제에 대해「한일관계보다도 상위개념」이라 발언한 것에서도 분명했다. 한국에서는 역사의 사실보다도 역사인식이 상위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발상은 1952년, 외무부장관 변용태 씨가 「조선침략 최초의 희생지」라고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다케시마 문제가 떠오르면 독도(다케시마)는 일본에 의한「최초의 희생지」가 되어 온갖 수단을 강구해 저지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의 연사인식에 불과하다. 한국이「일본에 의한 조선침략 최초의 희생지」라는 다케시마는 1905년부터 전전(戰前)까지 일본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이를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일방적으로「이승만라인」을 선언하고 다케시마를 그 안에 포함시켜 1954년부터 반세기 동안 무력점거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 한국이다. 침략한 건 한국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에도 「학자의 진솔한 탐구와 상호이해가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인물도 있다. 주일대사를 역임한 공노명이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한일 양국에 대화는 없었다.

  2006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이「고구려사재단」과「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한 올바른 역사정립기획단」을 「동북아역사재단」이라 개조(改組)하고나서 그 경향이 더 강해졌다.「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 전 세계 시민사회 및 평화세력과의 네트워크전략 수립」을 목적으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 다케시마 문제, 일본해표기문제, 고구려사문제 등의 문제점이 세계로 홍보되어 일본비판에 제동이 걸리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로파간다로서의 고구려사 드라마
  이는 고구려사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사문제의 발단은 1909년, 일본의 통감부시대에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으로 간도가 청나라의 영토가 된 것에 있다. 이를 한국에서는 역사교과서를 통해 일본이 청에게 영토를 주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의 주장의 정당성 여부다. 고구려사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필자의 저서인「고구려사 논쟁과 간도문제」(『해외사정』2004년 12월호)「간도문제고」(『해외사정』2005년 10월호)에서도 논한 것처럼 한국에는 간도영유권을 주장할 역사적 근거는 없다. 그러나 전후 한국에서는 간도의 귀속문제를 거론, 역사교과서에도 일본에 의해 청나라에 할양된 영토로 기술되어 「반정」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최근 한국이 자주 고구려사와 관련한 영화나 TV드라마를 제작한「주몽」과「태왕사신기」로 이어졌다.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로 고구려 건국신화가 모티브로 되어 있다. 표면적으로는 역사드라마로 치장하고 있지만 이는 한국에겐 역사수정이었다. 한류스타인 배용준이 연기한「태왕사신기」의 주인공은 고구려 광개토왕으로 역사적으로는 한국의 국가적 뿌리로 여겨지는 신라를 침략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함으로써 이전의 침략자를 영웅시하여 드라마에 등장시킨 것이다. 이것이 역사인식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의 무서움이다. 이는 지금의 역사 지식으로 말하자면 1950년에 북한에 의한 한국침공을 북한에 의해 해방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한류스타가 출연하는「주몽」과「태왕사신기」는 역사문제와는 관계없이 환영받아 고구려의 역사를 한국 역사의 일부로 생각하는 바탕이 양성되었다. 실제로 한류드라마의 영향인지 고구려와 연고가 있는 고려신사(高麗神社)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는 고구려사 드라마의 지나침을 비판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신화와 역사적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까지 현재의 해석으로 영상화하고 이를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방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사태를 냉정하게 보는 사람이 꽤 있다. 이는 한국에서 만난 국제법 연구자와도 일맥상통하는 이성적인 세계다.

  이는 다케시마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명지대학 석학교수인 최서면 씨는「한국의 신문과 방송인이 나와 인터뷰를 하고 독도가 한국령이라고 소개하지만 제발 그것만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며 경종을 울리고 있다. 최서면 씨의 지론으로는 한국은 아직 다케시마를 한국령이라 할 실증을 마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해는「남획의 바다」가 되었다
  한국이 소리 높여「독도는 한국령」이라 외치는 건 일본이 너무나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전술은 확실히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치명적이다. 한국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 하에 「다케시마의 날」조례 제정을 계기로 일본해호칭문제, 해저지명문제, 배타적경제수역문제, 위안부문제 등 연달아 외교공세를 펼쳐 일본의 식민지통치시대를 단죄하고 국제사회를 배경으로 일본비난 전술을 지속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이렇게까지 움직이게 하는 건「동북아역사재단」이 이념으로 삼는「보편적 도리」에 의거해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에 있다. 그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 위안부문제였다.「동북아역사재단」은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세계각지에서 일본의 반성을 요구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위안부문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케시마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을 봉쇄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모두 과거역사와 관련되어 일본의 침략에 의한 것이라는 역사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벼운 대처요법으로는 역사인식이라는 이름의 숙환을 완치시킬 수 없다. 이 병의 근원은 다케시마 문제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전후 반세기동안 다케시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한국에서는 과거역사를「침략」과 연관 지어 일본비판을 해왔다. 이는 유엔해양법조약이 발효되어 일본정부가 한국과 배타적경제수역과 중간선 획정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해 결국 한국의 강행으로 좋은 어장인「대화퇴」의 일부를 포함한 해역을 한일 공동관리수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공동관리수역에서는 한국어선의 불법어로를 단속할 수 없어 일본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다케시마 문제만 해결했더라면 또다시 일본해가「남획의 바다」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 일본은 정부조직도 비효율적이었다. 영토문제로서의 다케시마 문제는 외무성이 담당하게 되어 있고, 후일 일어나는 일본해호칭문제와 해저지명문제는 해상보안청이, 어업문제는 수산청이 교섭에 임했으며, 배타적경제수역은 외무성이 창구로 되어있다. 다케시마 문제와 관련된 문제가 일본에서는 관련관청에 맡겨져 각각의 전문으로 대처해왔기 때문이다. 한국이「동북아역사재단」을 위해 25억 엔의 거액을 투자해 다양한 프로파간다를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에는 다케시마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전력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한국이 일본해가 아닌 동해 호칭에 고집하는 건「다케시마가 있는 장소가 일본해일 경우 일본의 영토 같아 부적절하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은 일본해를 동해로 고치는 근거로「이전의 일본제국주의∙침략주의의 유산」을 들며 과거청산과 연관지어왔다. 실제로 한국에서 일본해호칭문제를 담당하고 있는「동북아역사재단」은「동해∙독도 표기확대를 위한 국제사회 설득 및 협력」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역사적 근거는「동해는 2000년 전부터(삼국사기에 의하면 동해라는 명칭은 기원전37년부터 쓰여 있었다고 기록)사용되어 온 명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주장이 명백한 잘못이라는 점은 누차 지적해왔다. 문제는 한국이 사실무근의 논거로 마치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처럼 위조한 것이다. 그것도「유엔지명표준화위원회」와「국제수로기구」등 유엔과 국제회의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소리 높여 외쳐 일본해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은 허위 역사인식으로 세계를 속여 왔다.

  실제로 한국정부는 2006년 4월, 오스트리아에서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국제수로기구의 전 사무총장과 유엔지명표준화위원회의 전 의장 등을 초대해 일본해의 부당성을 어필했다. 문제는 이 전 사무총장과 전 의장이 현직시절인 1997년에도 서울에서 개최된「『동해』지명표준화를 위한 국제세미나」에 초청되어 발언한 사실에 있다. 하지만 효과가 없다고 판단되자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해를「평화의 바다」로 만들자고 말하고 한국 내에서는 동해보다는 조선해로 해야만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에 한국이 표적으로 삼은 건 해저지명이다. 한국은 2005년 말, 2006년 6월에 독일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에서 다케시마 주변의「해저지명」을 한국식으로 고칠 것을 제안하기로 한다.

  이에 대해서는 해상보안청이 움직여 이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 4월, 30년 만에 측량선을 돗토리현 사카이항으로 파견했다. 당황한 한국은 함정 20척을 동해안으로 집결시켜 측량선 나포와 격파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자세로 나왔다. 이때 무얼 생각했는지 외무성의 다니우치(谷内) 사무차관은 해저지명을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명명하자고 제안하고, 나카가와 히데나오(中川秀直) 정조회장(당시)은 해양조사문제와 역사문제를 분리해야만 한다며 미봉책을 제시했다. 해저지명문제의 근간에는 다케시마 문제가 있다. 이는 한국이 내거는 새로운 해저지명에「이사부」,「이규원」,「안용복」등 다케시마 문제와 관계 깊은 인물 명칭이 사용되고 있는 것에도 나타나있다. 한국의 의도는 명확하다. 이를 위해 한국은 국제수로기구와 국제지명표준화위원회에 호소해 일본해를 동해로 하고, 해저지명을 한국식으로 고침으로써 다케시마 영토권을 확립하려는 프로파간다를 멈추지 않고 있다.

  해상보안청은 성공할 가망도 없이 측량선을 파견했는데 일본정부의 자세도 결정되지 않았다. 이에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자 측량선을 되돌려 겨우 생긴 다케시마 문제해결의 길을 끊어버렸다. 한국의 보도에 의하면, 측량선 소환을 추진한 건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였다고 한다. 5월, 한일의원연맹회장인 문희상 씨의 요청을 받은 모리 전 총리가 다니우치 사무차관을 한국으로 보내 측량선을 되돌렸다고 한다. 이 소환은 다케시마 문제뿐만 아니라 배타적경제수역문제에서도 일본을 궁지로 몰게 되었다.

  모리 전 총리가 측량선의 출항을 중지시켜 일촉즉발의 위기는 피한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달랐다. 한국은 그 후, 독자적으로 해양조사를 실시해 6월에는 배타적경제수역 기점을 종래의 울릉도에서 다케시마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배타적경제수역의 기점이 다케시마로 옮겨지자 황금어장인「대화퇴」가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에서 제외되어 모리 전 총리의 선거구인 이시가와현을 비롯한 후쿠이, 시마네, 돗토리, 효고, 교토의 어업은 괴멸적인 피해를 받기 때문이다. 다케시마 문제를 역사문제로 삼고 일본해문제에서도 역사적 근거를 들어 한국에 항의했다면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의 기점을 다케시마에 두고 일본은 국익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순서를 그르친 일본은 반대로 침략의 오명을 입고 한국의 집요한 비난에 노출되어 오고 있다.

  일본은「대화퇴」를 잃고 다케시마 주변에 매장된 미래에너지인 가스하이드레이트도 잃을 위험이 있다. 나아가 최근 북한정세가 유동하는 가운데 다케시마의 군사적 가치는 높아지고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해도 다케시마를 확보할 경우 대응이 빨라지기 때문이다. 1905년,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무주지인 다케시마를 시마네현으로 편입한 것도 러시아함정의 감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무현정권이 되고 한국은 북한과 갑자기 가까워졌다. 다케시마 영토문제를 방치해둘 경우 통일과 남북융화가 진행됐을 때 다케시마는 한반도의 전진기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성 있는 이야기다.「다케시마의 날」조례로 한일관계가 긴장되자 소설가 이문열 씨는 다케시마에 북한의 미사일기지를 만들게 해「일본을 공격하라」고 소리쳤지만 그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다케시마는 일본의 안전보장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다케시마를 일본은 반세기 이상 한국의 무력점거에 맡기고 피상적인 한일친선에 만족해왔다. 2007년 7월에는 해양기본법이 시행되었지만 현재 다케시마 문제에는 효과를 끼치지 못하고 있다.

●필자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했던 나이토 씨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서는 이런 상황 하에「다케시마를 한국령으로 하는 취지의 심포지엄(竹島を韓国領とする主旨のシンポジウム)」이 개최되었다.

  기조연설을 하는 나이토 씨는 다케시마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외무성의 견해를 비판하고 그 주장은 한국의「동북아역사재단」의 근거로도 되어있다. 시마네현의「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좌장을 역임한 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심포지엄인지 살펴보고 싶었다. 나이토 세이츄 씨, 박병섭 씨, 현대송 씨, 스가 유타카(菅豊)와 같은 멤버구성을 보면 일본의 주장은 소개되지 않고 외무성비판으로 일관되리라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이 심포지엄 개최가 11월 20일, 즉 싱가포르에서 실시되는 한일 양국의 정상회담 4일 전이라는 것도 신경 쓰였다. 패널리스트인 박병섭 씨는 직접 사이트를 개설해 심포지엄 개최를 공표하고 있는 것에도 위기감을 느꼈다. 일본의 국립대학, 그것도 도쿄대학에서 다케시마 문제에 대한 외무성의 견해가 비판을 당할 경우 한국에는 다케시마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정부의 근거를 무너뜨렸다며 홍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포지엄은 전체적으로 2시간 반 정도 행해져 그중 1시간이 나이토 씨의 강연, 패널디스커션이 1시간정도 이어지고 남은 30분이 질의응답으로 되어 있었다. 나이토 씨의 강연 주지는 1877년, 일본 태정관이「다케시마 외 1섬 일본과 관계없다(竹島他市島本邦関係之なし)」라 결정한 태정관지령을 근거로 일본정부는 1877년에 다케시마를 자국령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외무성이 말하는 고유영토설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나이토설은 한국사정에 맞았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령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국영토가 아니라고 부정한 다케시마를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편입한 건 조선침략을 위해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이토 씨의 이 주장은「동북아역사재단」의 총서 등에도 수록되어 한국의 중요한 논거가 되었다.

  질의응답이 허락되어 단도직입적으로 나이토 씨에게 질문해보았다.「다케시마 외 1섬 일본과 관계없다」의 다케시마 외 1섬은 현재 어디에 있는 섬을 가리키는지 설명을 요구했다. 나이토 씬느 주저하며 답변하지 못했다. 이때 주최자인 현대송 씨는「영토문제를 어떻게 파악할지가 오늘의 테마다. 역사적 검증은 다른 장소에서 합시다」라며 중단시켜 버렸다. 나이토 씨가 답변하지 못한 사실은 11월 17일과 18일자 산음중앙신보에도 보도되어 일단 동양문화연구소의 폭주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나이토 씨가 답변하기 어려웠던 것도 당연하다. 당시 일본해에는 가공의 다케시마(아르고노트섬)와 마츠시마(다쥴레섬), 그리고 현재의 다케시마(리앙쿠르암)이 있다고 여겨져「다케시마 외 1섬」은 다쥴레섬과 아르고노트섬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토 씨는「다케시마 외 1섬 일본과 관계없다」라는 글자만을 읽고 문헌비판을 게을리 했다.「다케시마는 한국령」이라는 동양문화연구소의 저의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국립대학에서 한국의 주장만을 전해 일본의 다케시마 영유권주장의 근거를 비판하는 심포지엄이 개최된 것은 학문의 공평성에서도, 국익 면에서도 문제다. 이는 이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문제연구회가 다케시마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국의 근거에 문제점이 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의도에서 벗어난 건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다케시마 관련 사이트를 운영하는 독도본부에서는 11월 20일자로 심포지엄 개최를 전했는데 평소와는 달랐다. 종래는 산음중앙신보의 보도는 그대로 전했는데 이번에는「일본의 언론」에서 인용했다며 나이토 씨의 외무성비판 부분만을 전하고 나이토 씨가 필자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 사실은 삭제되어 있었다. 이를 대신해 필자가 심포지엄에서 질문한 사실만을 전달하고 새롭게 시마네현이 다케시마 문제로 획책하고 있는 것처럼 위기감을 선동했다. 독도본부가 보도출처를 숨기고 기사를 개찬한 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1월 6일, 전 주일대사인 공로명(孔魯明) 씨는 부산에서의 강연에서「시마네대학의 나이토 세이츄 명예교수, 그리고 나고야대학의 이케우치 사토시 교수」가 일본의 다케시마연구 잘못을 규탄했다고 말했지만 이 나이토 씨는 외무성 비판의 논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이케우치 사토시 씨의 오류는 본지 2007년 10월호에서 실증).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토 씨와 이케우치 씨의 논고가「동북아역사재단」의 총서에 수록되어 한국 내에서는 가와카미 겐조 씨 이후의 일본의 주장을 논파한 연구로 되고 있다. 물론 이 두 분의 논고가 일본의 주장을 논파한 사실은 없다. 하지만 나이토 세이츄 씨와 이케우치 사토시 씨의 연구는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나이토 씨는 자주 한국에 초대되어 근거 없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최서면 씨 등은「현재 일본에서는 다케시마가 일본령이라는 학자는 없다. 일본정부, 활동가, 일본정부의 견해를 반복하는 어용학자들만이 다케시마는 일본령이라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시마네현의「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보고서와 필자의 다케시마 연구는 종래 외무성의 연구와는 달리 한국의 잘못을 실증하고 있다. 1960년대에 끝난 일본의 연구에서는 한국의 문헌해석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까지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연구가 상당히 의심스럽다는 건 원로 중에 원로인 최서면 씨가「앞으로 우리는 다케시마가 우리나라 영토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다케시마를 반세기동안 점거한 한국에서는 앞으로 다케시마를 영유하는 역사적 근거를 연구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최서면 씨가 명지대학에서 강연을 했을 무렵, 필자는 한국의 국제법연구자를 만나 한일 양국의 장애가 되고 있는 다케시마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는 일본의 주장을 처음으로 들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국제법이 아니라 역사연구자도 교류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정권말기가 되어 한국내에서는 새로은 싹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을 중심으로 역사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시대도 끝나려하고 있다. 한국에는 머지않아 새로운 정권이 탄생한다.

  한국은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채 역사인식으로 역사문제를 외교수단으로 삼아왔다. 그것이 중국과 일본과의 역사문제로 발전해 상호불신의 원흉이 되었다. 한국식의「과거청산」은 동아시아사회를 퇴보시킨다. 망령과 같은「반정」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다케시마 문제해결이 효과적이다. 전후 한국의 역사인식문제는 다케시마 문제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2008.01.11 게재)

 

 

독도본부 2012. 12. 24.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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