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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카쿠열도문제와 일본의 대응

(尖閣諸島問題と日本の対応)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12.06.15

실사구시 제36회 



 2010년 9월 7일, 센카쿠열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중국어선에 의한 충돌사건은 중국의 전통적인 패권주의를 부활시켜버린 듯하다. 중국에서는 새롭게 왕조가 세워지고 국력이 증강하면 근린제국에 무력으로 침공하고는 복속시켜 주변국과 책봉체제를 확립하는 역사를 반복해왔다. 현재 급격히 국력이 증강된 중국은 이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도 되풀이되어온 것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됨과 동시에 중국공산당은 동투르키스탄(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는 그 일부임)을 공격하고 티베트를 제압했다. 그리고 지금 중국은 센카쿠열도와 난사군도(南沙諸島)에 대한 영유를 주장하고 한국과는 한국의 배타적경제수역 내에 있는 이어도(해수면 아래 4,6m의 암초・중국명: 쑤옌자오=蘇岩礁)를 둘러싸고 격렬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확인해둘 게 있다. 난사군도(南沙諸島)는 1938년에 일본이 영유를 선언하고 신난군도(新南群島)라 이름 짓고 패전까지 타이완 가오슝시(高雄市)의 일부였다는 사실이다. 센카쿠열도는 1895년 1월 14일, 각의결정을 통해 일본령으로 편입된 이래 일본이 지속적으로 실효지배를 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센카쿠열도에 대해 중국과 타이완이 관심을 보이게 되는 건 1971년 6월, 오키나와반환협정이 미일 양국 정부 간에 맺어지고 그 오키나와제도 안에 센카쿠열도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타이완정부는 같은 달에 외교부 성명을 통해 「해당 열도는 타이완성(台湾省)에 부속되며 중화민국영토의 일부」라 하자, 중국정부도 같은 해 12월에 센카쿠열도는 「타이완의 부속도서다. 이들 도서는 타이완과 마찬가지로 예부터 중국 불가분의 영토의 일부다. 미일 양국 정부가 오키나와반환협정 안에 우리나라(중국)의 댜오위다오(釣魚島) 등의 도서를 반환구역에 편입하는 건 불법」이라며 「중국 인민은 반드시 댜오위다오(釣魚島) 등, 타이완에 부속된 도서를 회복할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현재 중국정부가 오키나와제도를 제1열도선(第一列島線)으로 삼고, 타이완과 센카쿠열도를 「핵심 이익」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1971년 12월 31일의 외교부성명이 지금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서 센카쿠열도 탈환은 궁극의 목적인 것이다.

  그 외교현안은 재작년의 중국어선 충돌사건을 계기로 일시에 진전된 것 같다. 이때 일본은 중국의 전통적인 외교자세를 간파하고 전략적인 대응을 취할 필요가 있다.

 이에 본고(本稿)에서는 센카쿠열도가 「중화민국 영토의 일부」, 「예부터 중국 불가분의 영토의 일부」였는지 여부와 중국의 문헌을 통해 역사적인 측면에서 검증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필요성은 목전에 닥쳐왔다.
 

1. 중국의 역사인식과 그 근원
 실제로 1월 31일, 일본정부가 센카쿠열도를 포함한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 내의 39개 무인도에 이름을 짓자 중국 국가해양국은 3월 3일, 센카쿠열도의 암초를 포함한 71개 도서(島嶼)에 명칭을 붙여 공표하는 등, 보복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 또한 후지무라(藤村) 관방장관이 무인도에 대한 이름을 공표한 다음 날인 1월 17일자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센카쿠열도를 티베트와 타이완과 마찬가지로 중국이 안전보장상 양보할 수 없는 국가이익인 「핵심 이익」이라며 「예부터 중국 고유의 영토다」라는 역사인식을 보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센카쿠열도의 일본령 편입 이전에 센카쿠열도는 중국령이었다는 논리로 다케시마문제에서 한국이 일본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때 다케시마를 침탈했다는 논리와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3월 15일, 나하검찰심사회의 결정으로 어선충돌사건의 중국인 선장이 강제 기소되자 중국외교부의 류웨이민(劉為民) 대변인은 「센카쿠열도 및 그 부속 도서는 예부터 중국 고유의 영토다」. 「일본은 이 해역에서 어떠한 공무도 행할 권리가 없으며 일본이 중국국민에 대해 적용하는 그 어떤 사법절차도 위법이며 무효하다」고 주장. 그 다음 날에는 (중국)국가해양국 소속의 해양조사선 2척이 센카쿠열도 부근 일본의 영해 내에 침입했다. 이 해양조사선은 일본의 해상보안청 순시선의 질문에 대해 「이 해역에서 순항임무를 실시하고 있다. 댜오위다오(釣魚島)를 포함한 기타 섬은 중국의 영토」라고 답했다. 이때도 「예부터 중국 고유의 영토」라는 역사인식이 행동원리의 근저에 있었다.

 그럼 이렇게까지 중국이 당당하게 나오게 만드는 역사인식은 어디서 유래되고 있는 것일까. 그 논거가 되고 있는 건 이노우에 기요시(井上清: 1913년 12월 19일~2001년 11월 23일) 일본의 역사학자. 교토대학 명예교수. 일본사 전공. 메이지유신과 군국주의, 센카쿠열도문제 등에 관한 저서가 있음. <출처: 위키백과>) 씨가 1972년에 간행한 『센카쿠열도-조어제도의 역사적 해명-(尖閣列島-釣魚諸島の史的解明-)』이다. 이노우에 씨는 이 책의 서문에서 「센카쿠열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에게서 빼앗은 것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중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대일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승낙하고 항복한 순간부터 이 선언의 영토조항에 기초해 자동으로 중국에 반환되었어야 한다. 이를 지금 다시 일본령으로 삼으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일본제국주의의 재기(再起) 그 자체가 아닐까」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1971년 12월에 있었던 중국 외교부의 성명과 공통된 인식으로 중국에서는 최대한 이노우에 기요시 씨의 저서를 인용하고 있다. 실제로 센카쿠열도에서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중국 외교부의 장위(姜瑜) 대변인은 9월 15일, 이노우에 기요시 씨의 저서를 근거로 「센카쿠열도는 중국령」이라 강조했다. 이노우에 기요시 씨가 『센카쿠열도-조어제도의 역사적 해명-(尖閣列島-釣魚諸島の史的解明-)』을 집필한 동기는 다음 2가지에 대한 실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1)센카쿠열도(釣魚諸島)는 원래 무주지가 아니라 명나라 시절부터 중국령이었다.
(2)(일본의 센카쿠열도)영유는 청일전쟁의 승리에 편승한 약탈이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타이완과 중국에도 있지만 일본인 학자의 연구라는 점에서 일찍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중국에서는 소중히 대접받고 있다. 그런 센카쿠열도를 중국령이라고 한 이노우에 기요시 씨의 견해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었던 것일까. 센카쿠열도를 둘러싸고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국의 역사인식을 검증해보고자 한다.


2. 중국 주장의 문제점
 중국이 센카쿠열도를 중국령이라 하는 근거는 류큐국(琉球国/현재의 오키나와현=沖縄県)에 책봉사가 파견되었던 명나라와 청나라 시절에 센카쿠열도를 항로의 지표로 삼은 사실이 있다. 또한 명나라 시절부터 중국령이었다고 하는 논거는 항해안내서인 『순풍상송(順風相送)』(1403년)에 센카쿠열도의 하나인 조어서(釣魚嶼)의 이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센카쿠열도가 역사적으로 중국령이었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명나라 이래 류큐국에 파견된 책봉사들의 기록을 증거로 삼아왔다. 센카쿠열도(조어서=釣魚嶼・조어대=釣魚台)란 이름은 진간(陳侃)의 『사유구록(使琉球録)』(1534년), 곽여림(郭汝霖)의『중편사유구록(重編使琉球録)』(1562년), 왕즙(汪楫)의 『사유구잡록(使琉球雑録)』(1683년), 서보광(徐葆光)의 『중산전언록(中山伝信録)』(1719년), 주황(周煌)의 『유구국지략(琉球国志略)』(1756년), 이정원(李鼎元)의 『사유구록(使琉球録)』(1800년), 재곤(齋鯤)의 『속유구국지략(続琉球国志略)』(1808년) 등에 등장하며 서보광(徐葆光)의 『중산전언록(中山伝信録)』과 주황(周煌)의 『유구국지략(琉球国志略)』에는 조어서(釣魚嶼: 일본명 우오쓰리지마), 황미서(黄尾嶼:일본명 구바지마(久場島) ), 적미서(赤尾嶼: 일본명 다이쇼지마(大正島))가 그려진 「침로도(針路図)」가 첨부되어 있다.

 게다가 진간(陳侃)의 『사유구록(使琉球録)』에는 구메지마(久米島; 일본 오키나와현 남부, 나하시에서 서쪽으로 약 100㎞ 떨어진 동중국해 동부 해역에 있는 섬.<출처: 네이버백과사전>/오키나와현 구메지마쵸=久米島町)를 「즉 류큐에 속한다(すなわち琉球に属するものなり)」라고 했고, 왕즙(汪楫)의 『사유구잡록(使琉球雑録)』에는 구메지마(久米島)와 적미서(赤尾嶼) 간을 「중국 밖의 경계(中外の界なり)」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노우에 기요시 씨와 중국은 이를 근거로 센카쿠열도를 중국령이라 단정 지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 2005년 가을, 중국 고본시(古本市)에서 『부생육기(浮生六記)』의 일문(逸文: 흩어져 일부분만 전해진 글)으로 보이는 「해국기(海国記)」가 발견되었으며, 이 안에 「13일 진각(辰刻 :오전 7-9시 )에 조어대(釣魚台)를 보다」라는 기술이 있어 중국에서는 이를 센카쿠열도가 중국령이었다는 확고한 증거라 했다. 중국의 해석으로는 「해국기(海国記)」는 『부생6기(浮生六記)』의 주인공이 1808년 책봉사인 재곤(齋鯤)과 함께 류큐로 건너간 기술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국기(海国記)」의 기술을 근거로 센카쿠열도가 중국령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책봉사인 재곤(齋鯤)은 1808년 윤5월 상순, 복주(福州)를 출발해 오호문(五虎門), 계롱산(雞籠山), 조어대(釣魚台), 적미서(赤尾嶼), 흑구양(黒溝洋), 고미산(姑米山), 마치산(馬歯山)을 거쳐 윤5월 17일 밤, 나하(那覇)항에 입항했다. 이 재곤(齋鯤)의 문집인 『동영백영(東瀛百詠)』의 「항해팔영(航海八咏)」에서는 태평항(太平港)에서부터 류큐국의 나하항에 입항할 때까지가 읊고 있으며 타이완 부근에서는 「계롱산(雞籠山)(산(山), 타이완부(台湾府)의 뒤에 있다)」이라는 제목의 오언율시(五言律詩)를 남기고 있다. 재곤(齋鯤)은 이 시에서 타이완부(台湾府)의 계롱산을 「猶是中華界」(이는 중화(中華)의 경계(界)다)라 하고 타이완부(台湾府)의 계롱산을 청나라의 강계(疆界:강토의 경계. 국경. )로 하고 있었다.

 또한 배가 류큐국에 가까워지자 재곤(齋鯤)은 「고미산(姑米山)」(구메지마=久米島)을 읊고, 그 표제의 분주(分註)에서는 「此山入琉球界」(이 산(山), 류큐의 경계에 들어가다)고 하고 있다. 이는 타이완부(台湾府)의 계롱산을 청나라의 영역의 경계라 했던 재곤이 고미산(구메지마)을 류큐의 국경이라 보고 있었다는 것으로 계롱산과 고미산 사이에 있는 조어대(釣魚台)와 적미서(赤尾嶼)는 필연적으로 청나라에도 류큐국에도 속하지 않는 무주지였다는 것이 된다.

  게다가 재곤이 계롱산을 「중화의 경계」라 하는 건 「항행팔영(航海八咏)」에 이어 「渡海吟用西墉題乗風破浪圖韻」(바다를 건너 서용(西墉)의 승풍파랑도(乗風破浪圖)란 제목의 운을 사용해 노래하다)에서도 마찬가지로 「계롱산(雞籠山), 중화의 경계」라 기록하고 있다. 재곤은 계롱산을 청나라의 강역이라 했으며,구메지마를 류큐의 강역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해국기(海国記)」에 「13일 진각(辰刻: 오전 7-9시)에 조어대(釣魚台)를 보다」라고 한 기술이 있다고 해서 이를 센카쿠열도가 중국령이었다는 확고한 증거는 안 된다 하겠다.
 

3. 타이완부(台湾府)의 북쪽 한계는 계롱산(雞籠山)
 그런 재곤(齋鯤)은 왜 타이완부의 계롱산을 「중화의 경계」라고 한 것일까. 그건 『동영백연(東瀛百詠)』의 「계롱산」에 「산은 타이완부의 뒤에 잇다」고 주기(注記)가 되어있는 것처럼 당시 타이완에는 타이완부가 설치되어 그 「계롱산」이 북쪽 한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청나라가 타이완에 타이완부를 설치한 건 1684년. 그때 타이완부의 강계는 「계롱산」에 설치되었다. 이를 강희연간(康煕年間)에 간행된 장육영(蒋毓英)의 『타이완부지(台湾府志)』를 보면 「북, 계롱성에 이르는 2315리(北至雞籠城二千三百一十五里)」라고 되어있으며, 1696년에 간행된 『중수타이완부지(重修台湾府志)』【그림1】(고공건=高拱乾 등 지음)에서는 「북, 계롱산에 이르는 2315리, 경계가 됨(北至雞籠山二千三百一十五里、為界)」이라며 타이완부의 강계가 명기되어 있다. 현재의 지룽시(基隆市) 부근에 있는 「계롱성(雞籠城)」과 「계롱산(雞籠山)」이 청나라 타이완부(台湾府)의 북쪽 한계였던 것이다. 재곤(齋鯤)이 『동영백영(東瀛百詠)』에서 계롱산을 「이는 중화(中華)의 경계(界)다」라 하고 「계롱산, 중화의 경계」라고 한 근거는 여기에 있다.

 따라서 명나라 시절의 『순풍상송(順風相送)』 안에 조어서(釣魚嶼)라는 이름이 있고, 책봉사의 기록에 조어대(釣魚台)라는 이름이 등장한다고 해서 센카쿠열도가 중국령이었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하겠다. 왜냐하면 타이완이 중국령에 편입된 건 청조가 되고나서의 일로 사실, 명나라(1461년) 시절에 편찬된 관찬지지(官撰地誌)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외이(外夷)」)에서는 푸젠성(福建省)과 타이완의 중간에 위치한 팽호도(澎湖島)도 류큐국에 속하고 있다. 명나라 시절 타이완은 그 속령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청나라 시절에 편찬된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에서는 타이완을 「예부터 황복(荒服: 천자(天子)의 감화가 미치지 않는 먼 나라라는 뜻.<출처: 네이버지식사전>)의 땅, 중국을 통하지 않아 동번(東蕃)이라 한다. 명(明)의 천계(天啓: 중국 명(明) 나라 희종(熹宗) 대의 연호(年號)로 1621년~1627년까지 사용됨.<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초엽, 일본국 사람이 이곳에 둔취(屯聚: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있음.<출처: 네이버한자사전>)하였고, 정지룡(鄭芝龍: 명나라 말·청나라 초의 무역상.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히라도[平戶]에서, 다가와 시치자에몽[田川七左衛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후쿠마쓰[福松:鄭成功]와 지로자에몽[次郞左衛門]의 두 아들을 두었다. 처음에는 해적이었으나, 명나라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타이완·일본을 무대로 무역을 함으로써 거부가 되었다.<출처: 네이버백과사전>)은 <후략>. 그 후, 네덜란드사람(紅毛荷蘭夷)이 거주하는 곳이 된다」고 하고 있고, 건륭판(乾隆版)의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에서는 일부러 타이완을 「일본에 속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 타이완이 청조에 편입되는 건 1684년. 이 타이완에 설치된 타이완부(台湾府)는 「계롱산」을 관할구역의 북쪽 한계로 삼았다. 그 때문에 책봉사로 류큐국으로 건너간 재곤은 타이완을 지났을 때 계롱산을 「이는 중화(中華)의 경계(界)다」라며, 「계롱산, 중화의 경계」라 한 것이다.

 사실 이 타이완부의 강역은 『타이완부지(台湾府志)』에 수록된 「타이완부총도(台湾府総図)」에 그려져 청조는 이를 기초로 관찬인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図書集成)』(1728년 간행)을 편찬하게 된다. 그러나 이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図書集成)』에 수록 기재된 「타이완부강역도(台湾府疆域図)」【그림2】에 센카쿠열도는 그려져있지 않다. 그려져있는 건 타이완부의 북쪽한계인 계롱산까지다. 1808년, 재곤이 책봉사로 류큐국으로 건너가기 전부터 계롱산은 타이완부의 북쪽한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744년에 간행된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그림3】에서는 타이완부의 북쪽 한계는 계롱성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의 「타이완부도(台湾府図)」에도 센카쿠열도는 그려져있지 않다. 이는 『해국문견록(海国聞見録)』(1793년서(年序))에서도 마찬가지로 센카쿠열도는 타이완의 일부가 아니었다.

 이들은 1895년, 일본정부가 센카쿠열도를 일본령으로 편입했을 때 센카쿠열도가 무주지였다는 증좌(証左: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데 바탕이 되는 것. )가 된다. 이 계롱산 및 계롱성을 타이완의 북쪽한계라 하는 지리적 인식은 중화민국시절에 편찬된 『황조속문헌통고(皇朝続文献通考)』(1912년)과 『청사고(清史稿)』(1927년)에서도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를 답습하는 형태로 계승되어 청조를 거쳐 중화민국이 되어서도 센카쿠열도는 타이완의 일부가 되는 일은 없었다.

 중국에서는 이노우에 기요시 씨의 『센카쿠열도-조어제도의 역사적 해명-(尖閣列島-釣魚諸島の史的解明-)』를 근거로 센카쿠열도를 중국령이라 하고, 청일전쟁에 편승해 일본이 빼앗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노우에 씨의 사료(史料)조작은 두찬(杜撰: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하여 근거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조작하여 말하거나 저술하는 행위.<출처: 네이버지식사전> )이었다. 이노우에 기요시 씨의 저서는 센카쿠열도를 중국령이라 하는 논거는 되지 않는다.

 이 이노우에 기요시 씨의 연구에 대해 당시 고쿠시칸(国士舘)대학의 조교수였던 오쿠하라 도시오(奥原敏雄) 씨는 이전부터 (이 연구를)논박해왔다. 국제법학자인 오쿠하라 도시오 씨는 전문인 국제법뿐만 아니라 역사분야에서도 『타이완부지(台湾府志)』와 『지룽시지(基隆市志)』를 근거로 센카쿠열도가 타이완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그 오쿠하라 도시오 씨 이후, 역사연구에 진전이 없었다. 때문에 국제법에 의거하여 센카쿠열도가 일본령이라는 일본과 명나라 시절부터 중국령이었다는 역사인식을 근거로 하는 중국과는 쟁점이 일치하지 않아 이노우에 기요시 시의 저서를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중국의 주장을 뒤집을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을 자세히 읽으면 이노우에 기요시 시의 연구는 단독이었다. 이는 재곤의 『동영백영(東瀛百詠)』에서 「계롱산, 중화의 경계」로 타이완을 국경으로 삼았고,  고미산(姑米山=구메지마=久米島)을 류큐의 국경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일본이 편입하기 이전인 센카쿠열도는 무주지였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센카쿠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권원이 없다.

 따라서 중국이 센카쿠열도를 「핵심 이익」으로 명나라 시절부터 중국의 영토였다고 하는 때는 제국주의적인 발상에 의한 영토적 야심에서 뿌리를 둔 때라 하겠다. 이는 다케시마를 불법점거하고 있는 한국이 반대로 일본이 다케시마를 침탈했다는 발상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중국어선의 충돌사건 직후, 홍콩의 『아주주간(亜洲週刊)』(9월 26일호)이 한국이 침탈한 다케시마의 예를 배워 센카쿠열도를 점거해야만 한다고 한 사실은 검토할만한 가치가 있다. 일본의 영토문제를 자국의 영토문제에 이용한다는 발상은 관동학원대학(関東学院大学)의 인엔준(殷燕軍) 교수가 2010년 12월 14일자 『청년참고(青年参考)』(인터넷판)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영토문제에서 협력해 일본에 강한 압력을 가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으며, 중국해양발전연구센터의 욱지영(郁志栄) 씨가 2012년 2월 21일자 다유강(多維綱)에서 「필요하다면 한국, 러시아 등, 일본과 영토문제를 안고 있는 국가와 공동으로 대처해야만 한다」고 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상황 하에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북방영토문제에 대한 해결을 언급했다. 이는 센카쿠열도문제와 다케시마문제로 일본이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다. 영토문제는 빼앗은 국가가 움직이지 않는 한 해결이 어려운데 그 당사자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권두에서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전통적인 외교자세를 간파하여 「전략적인 대응」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는 지금이 영토문제해결을 위한 때이기 때문으로 이는 다케시마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그림1】『중수타이완부지(重修台湾府志)』(「타이완부총도(台湾府総図)」)

【그림2】『고금도서집성(古今図書集成)』수록「타이완부강역도(台湾府彊域図)」

 

【그림3】석인본(石印本)『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수록 「타이완부도(台湾府図)」

(타쿠쇼쿠대학 교수 시모죠 마사오)

 

 

독도본부 2012. 07. 23.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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