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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모르는 10가지 독도의 허위 제6회

「일본정부는 1905년, 다케시마를 시마네현에 편입하여 다케시마를 영유할 의사를 재확인했습니다」(일본 외무성)의 정당성

동북아역사재단은 일본 외무성이 간행한 『다케시마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 포인트』가운데, 「6. 일본정부는 1905년, 다케시마를 시마네현에 편입하여 다케시마를 영유할 의사를 재확인했습니다(日本政府は、1905年、竹島を島根県に編入して、竹島を領有する意思を再確認しました)」를 아래와 같이 요약하고 아래의 1~4를 근거로 「일본의 주장은 이래서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요약】「일본정부가 1905년, 각의결정을 통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건 독도에 대한 영유의사를 재확인한 것이었다. 시마네현 오키섬 주민인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郎)의 독도영유편입청원을 접수한 일본정부는 1905년 1월, 각의결정을 통해 독도를 영유한다는 의사를 재확인했다. 같은 해 2월, 시마네현 지사는 독도가 오키도사(隠岐島司)의 소관이 된 사실을 고시했다.」 

【한국 측의 비판1】 1905년 당시 일본의 독도편입의 근거는 독도가 주인이 없는 토지라는 무주지 선점론이었다. 그런데 이 주장이 1950년 이후, 영유의사 재확인으로 바뀌었다. 독도를 자국의 고유영토라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주지 선점론을 근거로 삼아 1905년에 편입했다는 것은 서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날조】
 이 비판1은 비판이 되지 않는다. 이유인즉, 동북아역사재단이 「무주지 선점」과 「고유영토」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반박이라 착각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무주지 선점」이란 메이지정부가 1905년 1월 28일, 각의결정으로 다케시마(독도)를 「타국에서 이를 점령했다고 인정할 만한 흔적이 없다(他国ニ於テ之ヲ占領シタリト認ムヘキ形跡ナク)」고 한 것처럼, 그때까지 어느 나라에도 속한 적이 없는 무주지를 영유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일본의 「무주지 선점」을 논박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다케시마(독도)가 한국령이었다는 사실을 실증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언급해 온 것처럼, 한국 측에는 다케시마(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권원이 없다. 다케시마(독도)는 역사적으로도, 국제법상으로도 한국령이 아니었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무주지 선점」한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최근 한국 측은 「독도는 한국고유의 영토」라 공언하고 있다. 이는 2005년,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竹島の日)」조례를 제정했기에 이를 따라하듯 「독도는 한국고유의 영토」라 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국제법을 토대로 이미 일본령이 된 다케시마(독도)를 침탈한 한국 측에 원천적으로 「한국 고유의 영토」라 칭할 자격은 없다. 다케시마(독도)는 1905년, 「타국에서 이를 점령했다고 인정할 만한 흔적이 없다(他国ニ於テ之ヲ占領シタリト認ムヘキ形跡ナク)」고 일본령으로 편입되어 무주지라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한국고유의 영토」라 칭하는 건 한국 측이 「고유영토」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여기서도 거짓 역사를 날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측의 비판2】 영유의사에 대한 재확인은 독도가 자국의 고유영토라는 주장을 토대로 하고 있다. 하지만 독도가 일본고유의 영토라는 주장은 1877년, 일본의 최고행정기관인 태정관이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는 관계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한 사실과 정면에서 대치된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날조】
 동북아역사재단을 비롯해 한국 측의 다케시마(독도)연구에는 특징이 있다. 문헌의 일부를 확대해석하고 문헌비판을 게을리 하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1877년의 「태정관지령」해석이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1877년의 「태정관지령」을「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는 관계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태정관지령」에서 「다케시마 외 한 섬 일본과 관계없다(竹島外一島本邦関係これ無し)」고 된 외 한 섬(外一島)은 3년 후인 1880년 9월 13일, 천성함(天城艦)의 측량으로 울릉도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외무성의 촉탁을 받은 기타자와 마사나리(北澤正誠)는 그 측량결과에 의거해 『죽도고증(竹島考証)』(1881년)을 작성함에 따라 울릉도가 마츠시마(松島)로도 불리게 된다.

 1905년 다케시마(독도)가 시마네현에 편입됐을 때, 에도시대까지 울릉도의 명칭이던 다케시마(竹島)라 명명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키도사인 히가시 분스케(東文輔)는 이 새로운 섬을 다케시마(竹島)라 명명하는 근거에 대해 「울릉도를 다케시마라 통칭하는 건 사실은 마츠시마로, 해도를 보아도 명목요연하다.(후략) (欝陵島ヲ竹島ト通称スルモ、其実ハ松島ニシテ、海図ニ依ルモ瞭然タル次第ニ有之候。左スレハ此新島ヲ措テ他ニ竹島ニ該当スヘキモノ無之。依テ従来誤称シタル名称ヲ転用シ、竹島ノ通称ヲ新島ニ冠セシメ候方可然ト存候)」는 견해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주1). 히가시 분스케(東文輔)는 새로운 섬에는 본래의 마츠시마(松島)라는 이름을 붙여야하지만, 이미 해도 등에서는 울릉도가 「마츠시마(松島)」라 표기되어 잇다. 새로이 편입되는 섬에는 울릉도의 호칭이었던 다케시마(竹島)라는 명칭을 사용해야만 한다, 고 한 것이다. 이 섬 이름의 교체는 1840년 시볼트의 「일본도(日本図)」(그림1)에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아르고노트섬에 다케시마(竹島)라 표기되고 울릉도가 마츠시마(松島)로 된 것에 기인한다.

 

                                     (그림1)시볼트「일본도(日本図)」(1840년)

  이에 1849년, 프랑스 포경선인 리앙쿠르호가 현재의 다케시마(竹島)를 발견하자 서양의 해도에는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 외에 새로이 리앙쿠르암(현재의 다케시마=竹島=독도)이 등장하고(그림2), 그 후 해도 상에 환상의 아르고노트섬(다케시마=竹島)이 사라지고 울릉도는 마츠시마(松島)가 된 것이다.

(그림2)영국해군해도『일본-일본, 규슈, 시코쿠 및 한국일부』부분(1863년)

 이 사실은 「태정관지령」이 나온 1877년 당시, 해도와 지도에 그려진 다케시마와 마츠시마는 현재의 다케시마(독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장하는 「1877년, 일본의 최고행정기관인 태정관이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 관계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한 사실」은 없으며, 태정관이 「일본과 관계없다(本邦関係これなし)」고 한 것은 환상의 아르고노트섬과 울릉도였다. 동북아역사재단은 「태정관지령」을 확대해석해 외 한 섬(外一島)인 마츠시마(松島)를 에도시대 이래의 다케시마(竹島)라 단정 지었지만 역사변천에 주의해 「태정관지령」을 읽는다면 1877년 당시의 마츠시마(松島)는 울릉도였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여기서도 역사를 날조한 것이다.
 

【한국 측의 비판3】 이와 같은 경위와 더불어 러일전쟁이라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전쟁 기간 중인 1905년 1월의 각의결정과, 2월의 시마네현의 독도편입조치는 실제로 대한제국에 아무런 문의와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또한 대한제국이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로 독도를 울릉군의 관할구역으로 지정하였기에 1905년의 일본의 일방적인 시마네현 편입조치는 당연히 무효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날조】
 한국 측에는 다케시마(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이 침략(주2)이라는 역사인식이 있다. 그 근거는 다케시마(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을 결정한 각의결정이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때라는 사실과, 1910년에는 한반도가 일본에 병합됐다는 두 가지 상황증거에 있다.

 그러나 다케시마(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을「침략」이라 하기 위해서는 다케시마(독도)가 일본령이 된 1905년 이전에 다케시마(독도)가 한국령이었던 사실을 실증해 둘 필요가 있다. 이에 한국 측은 1900년 10월 25일자인 『칙령 제41호』의 제2조에 울릉군의 관할구역이 「울릉전도와 다케시마, 석도(欝陵全島と竹島、石島)」라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 독도인 석도(石島)는 1900년 10월 시점에서 한국령이 되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견강부회의 설이다.

 울릉도에 두 개의 속도(属島)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1882년 이규원의 『울릉도외도(欝陵島外図)』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규원이 속도라 하고 있는 건 기타자와 마사나리(北澤正誠)가 『죽도고증(竹島考証)』에서 다케시마(竹島)라 한 울릉도 동쪽 약2km인 죽서(竹嶼=竹島)와 울릉도 동북쪽 관음기(観音崎)에서 수십 미터에 있는 도항(島項)(사진1)이다.

 이규원이 울릉도의 속도라 한 다케시마(竹島)와 도항(島項)은 1883년에 울릉도로 부임한 히가키 나오에(檜垣直枝)의 「지도」(그림3)와 1900년 아카즈카 쇼스케(赤塚正助)의 「삽도(挿図)」(그림4)에도 답습되어 대한제국이 1910년에 간행한 『한국수산지(韓国水産誌)』에서는 죽서(竹嶼)와 서항도(鼠項島)라 되어 있다. 「칙령 제41호」를 전후하여 울릉도의 속도는 모두 다케시마(竹島)와 도항(島項)이란 두 섬이었다. 그중에서도 아카즈카 쇼스케(赤塚正助)의 「삽도(挿図)」는 1900년 6월, 울릉도가 울릉군으로 승격하는 계기가 된 시찰관 우용정과의 공동조사 시에 그려져, 아카즈카 쇼스케(赤塚正助)의 「울릉도산림개황(欝陵島山林概況)」에서는 울릉도의 강역이 「동서 약 6리 이상, 남북 약4리 이상(東西凡六里強、南北凡四里強)」이라 명기되어 있다. 아카즈카 쇼스케(赤塚正助)의 삽도(挿図)에 독도는 그려져있지 않고, 「동서 약 6리 이상, 남북 약4리 이상(東西凡六里強、南北凡四里強)」라고 한 울릉도 강역에 독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석도는 독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림3)히가키 나오에(檜垣直枝)『복명서(復命書)』수록「지도」(1883년)

(그림4)아카즈카 쇼스케(赤塚正助)『울릉도 보고서(欝陵島報告書)』「삽도(挿図)」(1900년)

 그럼 석도(石島)는 이규원이 속도라 한 도항(島項)인 것일까. 힌트는 1909년에 간행된 해도(海図)(그림5)에 있다. 거기서는 도항이 서항도(鼠項島[So moku Somu])라 표기되었고, 이를 전통적인 한문의 발음표기법인 반절(反切)로 읽으면 서항도(鼠項島(「Soku=석(石)」도(島))는 석도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서(鼠[S(o)])의 첫 모임인 o과, 항(項)[(m)oku]의 첫 자음인 m이 제거되고, 서항(鼠項)의 「S(o)(m)oku 」는「Soku=석(石)」이 되어 석도(石島)가 된다). 그렇다면 이규원은 왜 도항(島項)이라 명명한 것일까. 이는 『울릉도 검찰일기(欝陵島検察日記)』 중에 도항(島項)을 「형태가 누워있는 소와 같다(形、臥牛のごとし)」, 「어린 대나무가 많다(稚竹叢あり)」고 한 것을 보아도 명백하다. 서항도(鼠項島[So moku Somu])는 이를 한국어로 읽으면 「소의 목(牛の首(項=목덜미) 섬」이 된다. 석도는 서항도(鼠項島=도항=島項)를 반절(反切)로 읽어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림5)해도 306호 「죽변만지수원단(竹邊灣至水源端)」부분

 이규원이 도항이라 명명한 것은 섬의 정상에 어린 대나무가 자라 있어 누워있는 소의 뒷덜미(項)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도항이 「칙령 제41호」에서는 석도(石島)가 되는 건 서항도라 표기하고 [So moku Somu]라 훈독해 이를 음독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반절(反切)로 서항도를 읽으면 석도가 되기 때문이다. 울도군의 행정관할구역에서 속도가 된 두 섬은 죽서(竹嶼)와 도항(島項/서항도=鼠項島=석도=石島)으로, 독도(独島=다케시마=竹島)와는 관계가 없었다 하겠다. 따라서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장하는「대한제국이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로 독도를 울릉군의 관할구역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실은 없으며, 「1905년이 일본의 일방적인 시마네현 편입조치는 당연히 무효다」라는 사실도 없었다. 다케시마(독도) 불법점거를 이어오는 한국 측의 궤변이야말로 무효인 것이다.

【부기(付記)】 「칙령 제41호」로 석도(石島)로 되어 도항(島頂)이라 명명된 것은 그 형태가 조선가옥에 …….(이하는 첨부파일을 참조해주십시오.)


【한국 측의 비판4】 한국은 1906년 3월, 울릉도를 방문한 시마네현 관리로부터 편입사실을 전해들은 후, 그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울릉군수는 이 사실을 그 다음날 즉시 강원도 관찰사와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내부대신과 찬정대신은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건 전혀 근거가 없다」하고, 사실관계를 더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미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떠한 외교적 항의도 불가능했다. 대한매일신보(1906.5.1)와 황성신문(1906.5.9) 등의 언론이 일본의 독도편입조치의 불법성을 보도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날조】
 동북아역사재단이 문제로 삼는 건 아래의 두 가지다.

  (1)「본군 소속 독도는 외양 약100리 밖에 있지만 (중략) 지금 일본의 영지가 되었다」고 한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받고 내부대신과 찬정대신이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건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한 사실.

  (2)「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떠한 외교적 항의도 불가능했다. 대한매일신보(1906.5.1)와 황성신문(1906.5.9) 등의 언론이 일본의 독도편입조치의 불법성을 보도했다」는 두 가지다.

 전자(前者)는 『시마네현고시 제40호』로 다케시마(독도)가 시마네현 오키도사(隠岐島司)의 관할 하로 들어간 다음 해(1906년) 3월 27일, 시마네현 관계자가 다케시마(독도)시찰을 했을 때의 일이다. 시찰 후, 갑자기 날씨가 악화되어 일행은 급히 울릉도 도동(道洞)으로 피난하기로 하고, 다음 날 아침(3월 28일), 울릉군수인 심흥택을 예방했다. 그때 「다케시마(독도)가 현재 일본 영지가 되었다」는 정보를 얻은 울릉군수 심흥택은 3월 29일자로 강원도 관찰사서리인 춘천군수 이명래에게「본군 소속인 독도는 외양 약100리 밖에 있지만 (중략) 현재 일본의 영지가 되었다」고 급보(急報)하고, 울도군 소속 독도가「일본령이 되었다」고 보고했다. 이를 강원도 관찰사서리인 춘천군수 이명래가 4월 29일자 「보고서 호외」로 의정부 참정대신인 박제순에게 급히 보고하자 박제순은 5월 20일자 지령 제3호를 통해 「독도영지 설은 전혀 무근이다. 해당 섬의 지리적 상황과 일본인의 행동을 더 조사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이명래에게 전달했다.

 그 후의 경과는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 약 2개월 후인 1906년 7월 13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는 「울도군의 배치전말」이란 제목의 기사기 게재되었다. 이는 통감부가 내부(内部)에 울도군의 배치전말을 묻는 기사로, 내부(内部)는 통감부에 「군청은 하태동(霞台洞)에 있고, 해당 군 소속의 섬은 다케시마(竹島)・석도(石島)이며, 동서가 60리, 남북이 40리, 총 약200리」라고 답변한 내용이었다. 또한 내부(内部)로부터의 답변에는 의거한 「칙령 제41호」에는 없는 기술이 있었다. 울도군의 관할범위를 「동서가 60리, 남북 40리. 총 약200리」라 한 부분으로 전통적인 울릉도 한 섬의 강역을 나타내는 표기로 되어있다.

 이는 1711년, 박석창이 『울릉도도형(欝陵島図形)』에서 울릉도를 「둘레 200리(周廻二百里)」라 하고, 이규원이 1882년의 『울릉도 검찰일기(欝陵島検察日記)』에서 울릉도의 서동(西東)을 「대략 60리(仮量六十里)」, 북서(北南)를 「대략 50리(仮量五十里)」라 한 것과 같은 표현으로 박석창의 『울릉도도형』과 이규원의 『울릉도외도(欝陵島外図)』에는 독도는 그려져 있지 않아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 내부(内部)의 답변에서 「해당 군 소속의 섬은 다케시마(竹島)・석도(石島)로, 동서가 60리, 남북 40리. 총 약200리」라 한 사실은 심흥택이 「본군 소속 독도는 외약 약100리 밖에 있다」며, 독도를 울도군 소속이라 한 보고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울도군수인 심흥택이 강원도 관찰사서리인 춘천군수 이명래에게 「본군 소속 독도는 외양 약100리 밖에 있다」고 보고한 2개월 후, 내부(内部)는 「칙령 제41호」를 근거로 울도군의 관할범위를 「총 약200리」라 했기 때문이다. 심흥택이 「외양 약100리 밖에 있다」고 한 독도는 당연히 그 안에는 포함도지 않았으며, 울도군의 속도도 아니었던 것이다.

  박제순은 5월 20일자 지령 제3호를 통해 「해당 섬(독도)의 지리적 상황과 일본인의 행동을 더 조사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이명래에게 전했다. 그러나 이는 중앙정부가 독도의 실태를 파학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대한매일신보」(1906.5.1)와 「황성신문」(1906.5.9) 등의 보도는 시마네현이 울릉도에서 실시한 「토지 경계와 가구 수와 인구(地界の潤狭と戸口)」조사를 독도에서 실시한 것처럼 오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정부도 그렇고,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확실치 않은 보도도 그렇고, 울도군수 심흥택의 「울도군 소속 독도」라는 선입견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대한제국은 한때 소동이 일어났다.

 동북아역사재단은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한일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떠한 외교적 항의도 불가능했다」고 강변하지만, 대한제국의 내부(内部)는 그 총감부에 「군청은 하태동에 있고, 해당 군 소속의 섬은 다케시마(竹島)・석도(石島)이며, 동서가 60리, 남북이 40리. 총 약200리」라 답변하고 울도군의 행정관할구역에 독도를 포함하지 않았다. 1906년 3월 29일자 심흥택의 급보는 외교적 항의를 할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헌을 올바르게 읽지 않고 상황증거 만으로 1905년의 다케시마(독도) 시마네현 편입을 침략행위라 단정짓는 건 1906년 심흥택과 같은 과오를 재차 범하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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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1)메이지37(1904)년 11월 15일자 「서 제1073호(庶第一〇七三号)」에 대한 오키도사 히가시 분스케(東文輔)의 답변 「을서 제152호(乙庶第一五二号)」(시마네현 총무부 총무과 편『시마네현 소장 행정문서 1』(「다케시마관계자료집 제2집」)수록, 49~50페이지)

 (주2)1954년 9월, 한국정부는 다케시마(독도)를 무력 점거했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1954년 9월 25일, 다케시마(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기 위해 한국정부에 제안했지만 한국의 외무부장관인 변영태는 10월 25일, 「독도는 일본의 한국침략 최초의 희생지다」, 「일본이 독도탈취를 도모하는 건 한국 재침략을 의미한다」는 역사인식을 보이며 거부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조례를 제정한 무렵부터 동일한 역사인식을 보이고 대일공세를 강화했다. 모두 역사적 근거가 없는 정치적 발언이다.
http://www.pref.shimane.lg.jp/soumu/web-takeshima/takeshima04/dokutonokyogi/dokutonokyogi10-6.html

Web
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12.02.07

독도본부 2012.03.14.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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