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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모르는 10가지 독도의 허위 제5회

「한국이 자국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는 안용복의 공술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습니다.」(일본 외무성)의 정당성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11.10.19

조사연구 성과・보고 다케시마문제연구회

 동북아역사재단은 일본 외무성이 간행한『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의 포인트』가운데 「5.한국이 자국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는 안용복의 공술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습니다(韓国が自国の主張の根拠として用いている安龍福の供述には、多くの疑問があります)」를 아래와 같이 요약하고 아래의 1~3을 근거로 「일본의 주장은 이래서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요약】「한국이 자국 주장의 근거로 인용하는 안용복의 진술내용은 자신들이 불법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에 대한 취조 시에 행해진 것으로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으며 일본 기록에는 없는 내용도 있다. 」


【한국 측의 비판1】 안용복의 일본으로 건너간 활동에 관해서는 조선의 비변사에서도 철저한 조사가 이뤄진 것으로 이를 기록한 조선 관찬서의 기록이 진실이 아니라는 일본 측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조선의 기록에 있는 것이 일본의 기록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의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고 하는 건 부당하다.
 ※안용복의 도일(渡日)활동은 『숙종실록』, 『승정원일기』, 『동국문헌비고』등, 한국의 관찬서와 『죽도기사(竹嶋記事)』,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竹嶋渡海由来記抜書控)』, 『인부년표(因府年表):1693년과 1696년에 오카지마가 저술한 안용복의 도일에 대한 일본 측 자료.』, 『죽도고(竹島考)』등, 일본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날조】 
 다케시마(독도)문제에서 최대 쟁점이 되는 건 조선시대의 안용복이 공술한 증언의 신빙성이다. 이는 1696년 5월, 오키도(隠岐島)에 밀항한 안용복이 돗토리번(鳥取藩)에 의해 가로탄(加露灘)에서 추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귀환한 후, 돗코리번주(鳥取藩主)로부터 「울릉도와 우산도는 이미 조선령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마츠시마(松島)는 우산도(于山島)다. 이도 우리 조선의 땅이다」라고 공술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안용복의 공술은 『숙종실록』, 『동국문헌비고』 등에 수록, 기재되어 『동국문헌비고』의 분주(「여지지에서 말하는 울릉・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 우산은 즉 왜의 소위 마츠시마(松島=현재의 다케시마=독도)다」)의 성립에도 영향을 미쳐 독도를 한국령이라 하는 한국 측의 문헌적 근거가 되어 왔다. 

 그러나 『동국문헌비고』에 인용된 『동국여지지』의 원문에는 「일설에 의하면 우산, 울릉 본래 한 섬(一説、于山、欝陵本一島)」으로 「마츠시마(松島)는 우산도(于山島)다」라고 한 안용복의 공술은 그 신빙성을 잃었다. 이에 외무성의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의 포인트』에서는 안용복의 공술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동북아역사재단은 「조선의 비변사에서도 철저한 조사가 행해진 것으로 이를 기록한 조선 관찬서의 기록이 진실이 아니라는 일본 측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조선의 관찬서」에 수록되어 있는 건 국경을 넘은 죄인 안용복의 공술조서다. 피의자의 공술을 검증하지도 않고 「진실」이라는 독단은 (우리야말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실제로 이 공술조서는 안용복의 밀항사건이 조선의 묘당(廟堂: 의정부의 별칭.)에서 의논됐을 때에 검토되어, 중신 등은 공술의 신빙성을 의심했었다. 영의정인 유상운은 안용복을「법금(法禁)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국에 일을 일으킨 란민(乱民)」이라며, 「용복(龍福), 그의 돗토리번에 도착해 그것을 행한 것」,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했다. 조선의 숙종도 안용복의 언동을 「간민(奸民)」(주1)의 행동(所作)이라 간주하고 있다. 이를 동북아역사재단은 「조선 관찬서의 기록이 진실이 아니라는 일본 측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지만 이는 조선사를 무시한 주장이다. 조선정부의 우려는 안용복의 행동을 모방해 「말세의 간민, 반드시 일을 타국에서 일으키는」(주2) 것에 있었다. 조선의 묘의(廟議: 조정의 회의.)는 공술만이 아닌, 안용복의 「도일활동(渡日活動)」자체를 중죄로 여겼던 것이다. 그럼 돗토리번주(鳥取藩主)에게 「울릉도와 우산도는 이미 조선령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며 「마츠시마(松島)는 우산도(于山島)다. 이도 우리 조선의 땅이다」라고 한 안용복의 공술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일까. 일본 측의 문헌으로 검증하면 아래의 3가지로 위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안용복은 돗토리번주와 직접 담판하고 「울릉도와 다케시마(독도)가 조선령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공술했다. 하지만 이때 돗토리번주는 참근교대(参勤交代: 산킨코타이(参勤交代, 참근교대)는 에도 시대의 대부분 기간 동안에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시행된 정책이다. 이것의 목적은 다이묘들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센고쿠 다이묘의 처자들을 오사카 성, 주라쿠 다이, 후시미 성에 살게 한 것을 계승, 보완한 것이다. 1635년에 법을 제정할 때 이미 관례화되어있었다. 이 제도는 1862년까지 지속되었다. <출처: 위키백과>)를 위해 에도에 있는 후츄(府中)에서 직접 안용복에게 「울릉도와 우산도는 이미 조선령이 되었다」고 말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2. 에도막부가 울릉도로의 도해를 금한 건 1696년 1월 28일. 안용복이 (일본에)밀항하기 약 반년 전이다. 게다가 막부가 도해금지를 결정한 도서에는 현재의 다케시마(독도)는 포함되어있지 않다(주3). 안용복의 밀항사건이 막부의 울릉도로의 도해금지조치에 영향을 미쳤다는 한국 측의 주장은 본말전도(本末転倒: ①일이 처음과 나중이 뒤바뀜 ②일의 근본(根本) 줄기는 잊고 사소(些少)한 부분(部分)에만 사로잡힘.<출처: 네이버사전>)로 역사날조다. 

  3. 안용복이 「마츠시마(松島)는 우산도다」라고 한 우산도는 1711년, 울릉도 현지조사를 한 박석창의 『울릉도도형』이래 울릉도 동쪽에 「소위 우산도」라 부기(附記)된 죽서(竹嶼)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주4). 「마츠시마는 우산도다」라고 한 안용복도 쓰시마번(対馬藩)에서의 취조에서는 우산도를 울릉도 동북에 있는 섬이라고 공술했기 때문이다(주5). 안용복이 「마츠시마는 우산도다」라고 한 우산도는 울릉도 저동(苧洞)에서 동북쪽에 보이는 죽서(竹嶼)로 울릉도 동남쪽에 위치하는 마츠시마(松島=독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 1〜3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건, 안용복의 공술은 사실무근으로 위증이었다는 것이다. 안용복은 돗토리번주와 담판한 사실도 없고, 돗토리번에 밀항하기 반년 전에 결정됐던 울릉도로의 도해금지조치를 스스로의 공적이라 공술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조선의 기록에 있는 게 일본의 기록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의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고 하는 건 부당하다」고 반론하지만, 이는 국경을 침범한 죄인 안용복의 공술을 「진실」이라고 하는 선입견에서 문헌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으로 전혀 역사연구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애석하게도 동북아역사재단에는 「조선의 기록에 있는 게 일본의 기록에 없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안용복의 공술을 담은 『숙종실록』은 정사(正史)가 아닌 실록(実録)이다. 『숙종실록』의 경우, 숙종 때의 역사가 편년체(編年体: 역사기록을 연 · 월 · 일순으로 정리하는 역사편찬의 한 체재로 동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오래된 역사편찬체재이다.)로 편찬되어 있다. 그 중에는 쓰시마번(対馬藩)과 조선정부가 다퉜던 울릉도 귀속문제도 포함되며, 비변사가 신문한 안용복의 공술조서도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실록의 특징으로 쓰시마번과 조선정부의 외교교섭과 공술조서가 수록, 기재되어 있을 뿐으로, 안용복의 공술내용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은 아니다. 안용복의 공술을 「진실」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관련 문헌을 세밀히 조사해 논증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안용복이 조선 측에 공술한 증언을 일본 측 문헌을 통해 실증하지 못하고 반대로 공술내용을 부정당한다면 안용복의 공술은 허위인 게 되는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상상하는 것처럼「안용복의 도일활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안용복은 1693년, 다케시마(竹島=울릉도)로 국경을 넘어 침범한 산 증인으로 체포되어 1696년에 스스로 돗토리번에 밀입국했다. 이 밀항사실은 일본 측의 『죽도기사(竹嶋紀事)』, 『인부년표(因府年表)』, 『죽도고(竹島考)』 등에도 기록이 남아있는데, 여기에는 안용복이 공술한 내용을 실증할 수 있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반대로 안용복의 공술이 위증이었다는 「진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를 동북아역사재단은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지도 않고, 「조선의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고 하는 건 부당하다」고 강변하지만 이 반론이야말로 부당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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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1)『표인령래등록(漂人領来謄録)』제6권, 병자 10월 15일조.
 (주2)『숙종실록』숙종22년 병자 10월 병신조. 『표인령래등록(漂人領来謄録)』제6권,    병자 10월 15일조.
 (주3)「한국이 모르는 10가지 독도의 허위」제4회
   (주4)우산도를 그린 지도에는 『동국여지승람(東国輿地勝覧)』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박석창의 『울릉도도형』에서 유래 하는 2가지 계통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우산도는 『태종실록』의 기술에 따라 울릉도가 그려져 있으며, 『울릉도도형』의 우산도는 죽서(竹嶼)이다. 『여지도』, 『팔도여지도』, 김정호의 『청구도』 등은 박석창의 『울릉도도형』의 계보에 속한다. 
 (주5)『죽도기사(竹嶋紀事)』권1, 「1694년 12월 5일자, 高勢八右衛門가 多田與左衛門에게 보낸」답신


【한국 측의 비판 2】 안용복의 활동으로 울릉도・독도에 관한 의논이 일본에서 실시되어 결과적으로 두 섬을 조선영토로 인정하게 되었다. 안용복사건으로 조선과 일본 양국 간에 영토문제가 대두하자 1695년, 울릉도・독도가 돗토리번에 귀속된 시기를 문의하는 에도막부의 질문에 대해 돗토리번은 「돗토리번에 속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날조】 
 동북아역사재단은 「안용복의 활동으로 울릉도・독도에 관한 의논이 일본에서 실시되어 결과적으로 두 섬을 조선영토로 인정하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무엇을 근거로 한 반론이란 말인가.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는 이미 조선령이 되었다」. 「마츠시마(松島)는 우산도다. 이도 우리 조선의 땅이다」라고 공술한 건 막부가 울릉도로의 도해금지를 돗토리번에 통달한 후다. 또한 「안용복의 활동으로 울릉도・독도에 관한 의논이 일본에서 실시된」 것이 아니라, 막부가 울릉도로의 도해를 금지한 후에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는 이미 조선령이 되었다」고 공술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역사의 앞과 뒤를 뒤바꾸어 허구역사를 날조한 것이다. 게다가 막부는 울릉도로의 도해를 금했지만, 「결과적으로 두 섬(울릉도・독도)을 조선영토로 인정」한 사실도 없다. 막부의 도해금지대상에 현재의 다케시마(독도)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4회에서 밝힌바와 같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동북아역사재단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역사까지도 날조하는 건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안용복 사건」(「안용복의 도일활동」)이란 것을 꾸며내어 안용복의 공술을 전제로 삼아 문헌을 연역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럼 동북아역사재단이 묘사하는 「안용복의 도일활동」(「안용복 사건」)이란 어떤 것인가. 동북아역사재단의 입장에서는 「안용복의 도일활동」으로 쓰시마번과 조선정부 사이에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귀속문제가 일어나 1695년에 막부가 돗토리번에 울릉도와 독도가 돗토리번에 속한 시기를 확인했을 때에 돗토리번이 「(울릉도와 독도는) 돗토리번에 속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건「안용복의 도일활동」의 결과라 말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북아역사재단에 의한 역사날조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안용복의 도일활동」은 두 가지로, 하나는 1693년에 다케시마(竹島=울릉도)를 침범한 안용복이 돗토리번 요나고(米子)의 오타니집안(大谷家)의 어부들에게 산 증인으로 잡힌 사건을 가리킨다. 그때 쟁점이 됐던 건 울릉도의 귀속문제로 「안용복의 활동으로 울릉도・독도에 관한 의논」이 실시된 사실은 없다. 안용복은 국경은 침범한 산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696년, 안용복이 비번사에서 공술(주6)한 것처럼 1693년의 시점에서 돗토리번으로부터 「울릉도를 오래 조선에 속한다」고 한 서계(書契: 조선시대 왜인·야인의 입국사증을 겸하였던 외교문서. 조선에서 외국인들에게 통호를 허가하는 신임장으로도 사용하였다. 왜 사신의 서계는 쓰시마도주 소씨[宗氏]가 발행하였는데 여기에는 사행(使行)의 목적, 그 인원수, 배가 머무는 포구, 체류일자 등을 적었고 진헌물(進獻物)의 목록이 첨부되었다. 왜인들이 개항장인 포소(浦所)에 도착하면 서계를 조사하여 상경시켰는데 뒤에 가서는 그들의 외교창구인 쓰시마도주를 통하지 않고 호족들도 사절과 무역선을 보내면서 서계를 보내 왔으므로 입국통제가 어려워져 입국에는 동인(銅印)의 도서(圖書)를 발행하여 입국사증 구실을 하게 하였고, 서계는 주로 외교문서 구실을 하였다. <출처: 네이버백과사전>) 를 받아 이를 1696년에 돗토리번주에게 확인 받았다고 하는 사실도 없었다. 1693년의 돗토리번은 조선어민의 울릉도 침범을 막부에 호소, 막부의 명으로 죄인 안용복을 나가사키(長崎)봉행소로 이송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695년 12월, 막부가 「울릉도・독도가 돗토리번에 귀속된 시기를 문의」한 건 4회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쓰시마번이 막부에 울릉도는 조선령이라고 상신(上申: ①관청이나 윗사람에게 일에 대한 의견 ②또는, 사정을 갖추어서 보고함.)하였기 때문에 돗토리번에 (이에 대한)사실관계를 확인한 것뿐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안용복사건」이라는 제2의 사건이 일어나는 건 막부가 돗토리번에  「울릉도・독도가 돗토리번에 귀속된 시기를 문의」한 반년 후다. 이에 안용복이 밀항해 온 건 다음 해인 6월이다. 밀항하기 반년이나 전에 돗토리번이 답변한 내용에 「안용복의 도일활동」이 어떻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일까. 동북아역사재단이 묘사하는 「안용복의 도일활동」은 황당무계하다. 「안용복사건」으로 에도막부가 「결과적으로 두 섬(울릉도・독도)을 조선영토라 인정하는 일」은 없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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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숙종실록』숙종22년 병자 9월 무인조. 『숙종실록』숙종22년 병자 10월 병신조. 

 

【한국 측의 비판 3】 1696년 1월에 내려진 막부의 도해금지령은 같은 해 8월, 요나고 주민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요나고 주민의 경우 그 이전에 울릉도로 갈 수 있었다. 따라서 같은 해 5월, 울릉도에서 일본인을 만났다는 안용복의 진술을 거짓이라 보는 일본 측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또한 2005년, 일본 오키도에서 발견된 안용복의 도일활동에 관한 일본 측의 조사보고서인 『1696년 병자년 조선배 착안 1권의 각서(元禄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巻之覚書)』에 따르면 안용복은 팔도(八道)의 이름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강원도 소속이라는 사실을 명기한 문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날조】 
 오키도에 밀항한 안용복은 귀환 후, 그 이유를 울릉도에서 조난한 일본어민을 쫓아 오키도에 표착했다고 공술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의 묘의(廟議)는 이 공술을 안용복의 위증이라 했다.

 이를 동북아역사재단은 「1696년 1월에 내린 막부의 도해금지령은 같은 해인 8월, 요나고 주민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 「울릉도로 갈 수 있었다」며, 「울릉도에서 일본인을 만났다는 안용복의 진술을 거짓이라 보는 일본 측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반론한 것이다.
 
  그러나 돗토리번 요나고(米子)의 오타니(大谷)・무라카와(村川) 두 집안의 「도해면허」는 1696년 1월, 막부의 명으로 돗토리번에 「차출(差出)」되어 2월 막부에 반납되었다. 그때 오타니・무라카와 두 집안에 대해서도 「죽도강도해무용(竹嶋江渡海無用)」이라 전달되었다. 따라서 「같은 해 8월, 요나고 주민」이 「울릉도로 갈 수 있었다」고 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주장은 완전히 허구다. 안용복의 공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사실은 안용복이 오키도에 밀항했을 때, 사정을 청취했던 일본 측의 『1696년 병자년 조선배 착안 1권의 각서(元禄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巻之覚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변사의 취조에 표착했다고 공술한 안용복은 오키도에서는 「伯耆様江御断之儀」가 있다며 돗토리번에서 소송하기 위해였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안용복은 미리 「조선팔도지도」를 소지하고 「朝欝両島監税総将臣安同知騎」라고 한 기인(旗印: 1. 옛날, 전쟁터에서 목표로 삼기 위하여 기에 그렸던 무늬나 글자. 2. 행동의 목표를 내세우는 주의. 기치(旗幟). )을 준비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한 것이다.

 이를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조선팔도지도」를 「팔도의 이름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강원도 소속이라는 사실을 명기한 문서」라고 하지만, 이는 문헌을 읽지 않은 증거다. 「조선팔도지도」는 문서가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유래하는 조선팔도지도다. 안용복은 이 지도를 지참하고 「마츠시마(松嶋)는 강원도 내의 자산도」라 공술하고 이것이 『1696년 병자년 조선배 착안 1권의 각서(元禄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巻之覚書)』에 기록된 것이다.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강원도 소속이라는 사실을 명기한 문서」등을 소지하지 않았다. 

 이는 안용복이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 「조선팔도지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용복이 「마츠시마는 강원도 내의 자산도」라고 한 자산도(子山島)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유래하는 자산도(우산도)를 가리키고 있다 하겠다. 왜냐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우산도는 『태종실록』(주7)의 기사에서 유래하며, 분주에도 「일설에 우산, 울릉 본래 한 섬(一説、于山、欝陵本一島)」이라고 주기(注記)되어 있는 것처럼 울릉도의 별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와 「강원도도」에는 두 개의 울릉도가 그려져 있지만 현재의 다케시마(독도)는 그려져있지 않다 하겠다. 

 사실「팔도총도」와 「강원도도」의 우산도는 그 후 죽서(竹嶼)에 「소위 우산도」라 부기(付記)한 박석창의 『울릉도도형』과 김정호의 『대동지지』・『청구도』 등에서 수정이 이뤄져, 울릉도 동쪽 2킬로미터에 위치한 죽서(竹嶼)가 된다. 「조선팔도지도」를 근거로 「마츠시마는 강원도 내의 자산도」라 한 안용복은 오키도와 조선 비변사에서 후세까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공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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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태종실록』태종17년 정유 2월 임술조.
http://www.pref.shimane.lg.jp/soumu/web-takeshima/takeshima04/dokutonokyogi/dokutonokyogi10-5.html

 

 

독도본부 2012.03.12.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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