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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구시  〜일한의 가시, 다케시마문제를 생각한다〜

제22회 박병섭 씨의 「메이지정부의 다케시마=독도인식」(「동북아문화연구」제28호)를 반박하다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09.08.07



  21회에서는 「시모죠 마사오가 선전하는 것처럼 사서(史書)의 「날조」와 「개찬」은 없었다(下條正男が宣伝するような史書の「捏造」や「改竄」はなかった)」라고 주장한 박병섭 씨의 「시모죠 마사오의 논설을 분석한다(下條正男の論説を分析する)」(한국・영남대학교「독도연구」제4호 수록)에 대해 이것이 사실무근의 허위기술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번에는 박병섭 씨의 「메이지정부의 다케시마=독도인식(明治政府の竹島=独島認識)」(돗토리단기대학『동북아문화연구(北東アジア文化研究)』제28호 수록)을 도마 위에 올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병섭 씨는 「메이지정부는 다케시마(竹島)・마츠시마(松島)를 일본의 영토 밖」이라 했다고 주장하지만, 박병섭 씨 입장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해지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병섭 씨에 따르면 「메이지정부는 다케시마(竹島)・마츠시마(松島)를 일본의 영토 밖이라는 방침을 1905년 「량코섬(リャンコ島/다케시마=竹島=독도=独島)편입」까지 일관적으로 견지」(36페이지)했지만,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때 「때가 때인 만큼 이 영토편입을 급선무로 한다(時局なればこそ、その領土編入を急務とするなり)」는 판단에서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영토편입을 각의 결정했다. 그때의 명분은 다케시마=독도는 「무주지」라는 것이었다」(49페이지)고 하고 있다.

  여기서 박병섭 씨는 자설(自説)의 정당함을 강조하면서 「시모죠 마사오는 「다케시마 외 한 섬(竹島外一島)」의 비정(比定: 동질(同質)의 것이 없는 경우, 다른 유사한 것과 비교하여 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추정하는 것을 말함. )에 관한 견해를 매년 바꾸고 있어 독특함이 주목된다」(37페이지)며, 필자의 견해를 「자설을 변경」(37페이지), 「또 자설을 바꾸었다」(38페이지), 「이례(異例)」(38페이지) 등이라 비난했다.

  그럼 박병섭 씨가 말하는 「다케시마 외 한 섬(竹島外一島)」이 비정(比定)에 관한 견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1876년 10월, 시마네현이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한 섬에 대한 지적편찬방향 문의(日本海内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를 내무경(内務卿)에 제출하고,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를 시마네현에 편입해야만 하는지를 물었을 때 태정관이 다음 해에 「다케시마 외 한 섬 일본과 관계없다(竹島外一島本邦関係これなし)」며, 다케시마(竹島) 외 한 섬(外一島)인 마츠시마(松島)를 일본영토와는 관계없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문제는 그 4년 후인 1881(메이지14)년 8월, 외무성의 명을 받아 조사했던 기타자와 마사나리(北澤正誠)가 「외 한 섬(外一島)」에 해당하는 마츠시마(松島)를 울릉도라 판정하고, 이것이 메이지정부의 견해가 된 사실에 있다. 1877년, 태정관지령으로 「다케시마 외 한 섬 일본과 관계없다(竹島外一島本邦関係これなし)」고 된 마츠시마(松島)는 1881년에는 울릉도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현재의 다케시마(竹島)는 태정관지령과는「관계없다(関係これなし)」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내무성과 외무성, 육군, 해군, 태정관 등, 관련기관이 이 섬을 조선령이라 생각했다」(48페이지)며,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을 침략이라 하는 박병섭 씨의 주장이 와해됐음을 의미한다. 박병섭 씨는 「다케시마 외 한 섬(竹島外一島)」과 관련된 필자의 견해를 비판함으로써 사실은폐를 도모한 것은 아닐까. 박병섭 씨는 마지막 정리부분에서 결론을 아래와 같이 맺고 있다.

  「그 후, 제국주의국가로 발전한 일본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때가 때인 만큼 이 영토편입을 급선무로 한다(時局なればこそ、その領土編入を急務とするなり)」는 판단에서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영토편입을 각의 결정했다. 그때의 명분은 다케시마=독도는 「무주지」라는 것이었다. 이는 현재의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다케시마 고유영토」설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49페이지)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여기서 박병섭 씨의 「메이지정부의 다케시마=독도인식(明治政府の竹島=独島認識)」(돗토리단기대학 『동북아문화연구』제28호 수록)에 대해 그 문제점을 지적해보기로 한다.

(1)「관찬지지(官撰地誌)의 다케시마(竹島)・마츠시마(松島)」에 대해
  박병섭 씨는 메이지정부가 다케시마(竹島=울릉도)와 마츠시마(松島=현재의 독도)를 「일본의 영토 밖(日本の領土外)」이라 한 근거로 관찬(官撰)인 『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권의50)의 「오키(隠岐)」를 들었다. 논거가 된 이 관찬서의「도서(島嶼)」에서는 시마츠섬(島津島)와 마츠시마(松島)에 이어 「오키(隠岐)」의 속도가 아래와 같이 열거되어 있다.

  「오모리섬. 오치군 츠도무라에 속함. 마츠시마의 북이십정. 둘레 이십오정오십칠간. 동서칠정. 남북오정. ○본주 소속. 치부군 사십오. 아마군 일십육. 스키군 칠십오. 오치군 사십삼. 합계 이백칠십구. 이를 총칭해 오키의 소도라 부름. ○ 또는 서북에 마츠시마 다케시마 두 섬 있음.(후략)(大森島。穏地郡津戸村に属す。松島の北弐拾町。周回弐拾五町五拾七間。東西七町。南北五町。○本州の属島。知夫郡四拾五。海士郡壱拾六。周吉郡七拾五。穏地郡四拾三。合計壱百七拾九。之を総称して隠岐の小島と云。○又西北に方りて松島竹島の二島あり。土俗相伝えて云ふ。穏地郡福浦港より松島に至る。海路凡六拾九里参拾五町。竹島に至る。海路凡百里四町余。朝鮮に至る海路凡百三十六里参拾町)」

  이 『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의 기술에서 박병섭 씨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 관찬지지에서 다케시마(竹島)・마츠시마(松島)가 본주(本州)의 속도(属島)와는 별도로 기재되었는데 이는 중요하다. 두 섬이 본주(本州)의 속도라면 물론 규슈(九州)와 홋카이도(北海道)의 속도도 아니고, 두 섬은 일본의 영토 밖으로 취급된 것으로 해석된다」(34페이지)

  박병섭 씨는 여기서 본문의 「본주의 속도(本州の属島)」를 글자 그대로 본주(本州)라 해석하고 이 말에 이어지는 「○ 또는 서북에 마츠시마 다케시마라는 두 섬이 있다(○又西北に方りて松島竹島の二島あり)」의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를 본주(本州)의 속도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의 「오키(隠岐)」에서 말하는 「본주(本州)의 속도(属島)」는 「오키(隠岐)의 속도」를 의미한다. 이는 『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오키(隠岐)」)의 「형세(形勢)」라는 항에서 오키는 치부섬(知夫島). 서도(西島). 중도(中島)라는 세 섬과 도고(島後)라는 한 섬의 「4개 도서가 하나의 주(州)를 이룬다」고 했으며, 「현치(縣治)」라는 항에서는 「전주(全州). 돗토리현(鳥取県)이 겸해서 다스리다」라고 하고 있는 것처럼, 1주(州), 전주(全州), 본주(本州)의 주(州)는 오키(隠岐) 자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오키(隠岐)」에 속하는 도서로 시마츠섬(島津島), 마츠시마(松島), 오모리섬(大森島)의 이름을 거론, 이어「본주(本州)의 속도. 치부군(知夫郡) 사십오. 아마군(海士郡) 일십육. 스키군(周吉郡) 칠십오. 오치군(穏地郡) 사십삼. 합계 일백칠십구. 이를 총칭하여 오키의 소도(小島)라 칭함. ○ 또는 서남에 마츠시마(松島) 다케시마(竹島) 두 섬 있음」이라 기록한 건, 「오키(隠岐)」에는 시마츠섬(島津島)과 오모리섬(大森島) 외에 179개의 소도(小島)가 존재하고, 그 서북 방향에는 또한 「마츠시마 다케시마 두 섬(松島竹島の二島)」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박병섭 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에는 「다케시마(竹島)・마츠시마(松島)가 본주(本州)의 속도와는 별도로 기재된」사실이 없다. 이런 것을 「두 섬이 본주(本州)의 속도가 아니라면 물론 규슈와 홋카이도의 속도도 아니며 두 섬은 일본의 영토 밖으로 다뤄졌다고 이해」하는 건 견강부회의 설이라 하겠다.

  나아가 『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의 「오키(隠岐)」에서 「다케시마 마츠시마 두 섬(竹島松島の二島)」의 다케시마(竹島=울릉도)에서「조선에 이르는 항로 약136리 30정(朝鮮に至る海路凡百三拾六里三拾町)」이라 하는 건, 다케시마(울릉도=竹島)를 일본령으로 인식했던 증좌로, 때문에 조선까지의 항로로 「약136리 30정(凡百三拾六里三拾町)」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박병섭 씨는 이 『일본지지제요』(「오키(隠岐)」)에 의거해 「두 섬은 일본의 영토 밖으로 취급되었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박병섭 씨는 그 증거로 다음의 다나카 아카마로(田中阿歌麻呂)의 「오키국 다케시마에 관한 구기(隠岐國竹島に関する旧記)」(『지학잡지(地学雑誌)』1905년 17권 8호)를 인용해 「메이지시대의 지리학자인 다나카 아카마로(田中阿歌麻呂)도 그처럼 이해」했다고 하고 있다.

  「메이지 초년에 이르러 정원지지과에서 그(다케시마=독도, 필자 주)의 일본영유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그 후의 출판과 관련된 지도는 대부분 그 소재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1875년 문부성 출판 미야모토 산페이의 일본제국전도에는 이를 실었지만 제국의 영토 밖으로 두고 색을 칠하지 않았다(明治の初年に到り、正院地誌課に於て其(竹島=独島、筆者注)の本邦の領有たることを全然非認したるを以て、其の後の出版にかかる地図は多く其の所在をも示さざるが如し、明治八年文部省出版宮本三平の日本帝国全図には之れを載すれども、帝国の領土外に置き塗色せず)」(34페이지)

  하지만 여기서 박병섭 씨는 인용문에 손을 댔다. 다나카 아카마로가 「그의 일본영유라는 사실을 전혀 (其の本邦の領有たることを全然非認した)」는 「그(其)」라는 부분에 「다케시마=독도(필자 주)(竹島=独島、筆者注)」라 삽입하고 다나카 아카마로도 「다케시마=독도(竹島=独島)」를 일본영토 밖의 섬이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나카 아카마로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나카 아카마로는 다음 해의 『지학잡지(地学雑誌)』(1906년 제18권 6호)에 「오키국 다케시마에 관한 지학상의 지식(隠岐國竹島に関する地理学上の智識)」이란 제목의 논고를 발표하고, 그 권말인「부기(附記)」의 첫머리에서 아래와 같은 정정(訂正)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기사에 따르면, 본지(本誌) 제200호 201호 및 202호에 게재한 「오키국 다케시마에 관한 구기(隠岐国竹島に関する旧記)」기사는 다케시마(竹島) 기사가 전혀 아니고 울릉도(欝陵島) 기사다」(419페이지)

  다나카 아카마로는「오키국 다케시마에 관한 구기(隠岐國竹島に関する旧記)」를 발표한 다음 해, 스스로 다케시마(竹島)와 울릉도(欝陵島)를 혼동했던 잘못을 인정하고, 이를 「부기(附記)」를 통해 정정했다. 이를 박병섭 씨는 다나카 아카마로가 울릉도라 정정해야만 하는 부분에 일부러 「(다케시마=독도, 필자주)(竹島=独島、筆者注)」라 주기(注記)한 것이다. 『일본지지제요』(「오키」)를 곡해한 박병섭 씨는 다나카 아카마로의 논문까지도 개찬하고, 다케시마(울릉도)(竹島(欝陵島))와 마츠시마(松島, 현재의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영토 밖」이라는 논거로 삼은 것이다.

  박병섭 씨에게는 「메이지정부는 다케시마(竹島)・마츠시마(松島)가 일본영토 밖이라는 방침을 1905년 「량코섬(다케시마=독도) 편입(リャンコ島(竹島=独島)編入)」때까지 일관되게 견지했다」는 선입견이 있어, 이 선입견이 문헌의 자의적 해석으로 이어져 거짓 역사까지 날조한 것이다.

  그러나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가 일본령이라는 인식은 메이지시대에도 존재했다. 그건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를 일본 서북 한계(주1)로 했던 『은주시청합기(隠州視聴合記)』(「국대기(国代記)」)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으로, 1875년에 간행된 오츠키 슈헤이(大槻修平)의 『재각 일본지지요략(再刻日本地誌要略)』(주2)도 이를 답습하고 있다. 박병섭 씨는 「다케시마(竹島)・마츠시마(松島)와 관계가 깊은 모든 정부기관은 울릉도와 다케시마=독도를 조선령이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6페이지)라고 하지만, 그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1877년의 태정관 지령에서 「다케시마외 한 섬 일본과 관계없다(竹島外一島本邦関係之なし)」고 된 마츠시마(松島)는 그 후, 울릉도(欝陵島)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었고, 「일본과 관계없다(本邦関係之なし)」고 된 것에는 현재의 다케시마(독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태정관의 다케시마 외 한 섬 판도 외 지령(竹島外一島版図外指令)」에 대해
  1876년, 시마네현은 「다케시마 외 한 섬(竹島外一島)」을 「관내 오키국 건위에 있어 산인 일대 서부로 넣어야 하는가(管内隠岐国の乾位に当り、山陰一帯の西部に貫附すべきか)」라며,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한 섬 지적편찬방향 문의(日本海内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를 제출했는데 태정관은 1877년, 「다케시마 외 한 섬 일본과 관계없다(竹島外一島本邦関係これなし)」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잘못 판단할 여지가 있었다. 박병섭 씨 자신도 「그 무렵이 되자 외국의 잘못된 지도의 영향을 받아 울릉도를 점차 마츠시마로 부르는 민간인이 늘기 시작했다」(44페이지)고 하고 있는 것처럼,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에 대한 지리적 이해가 혼돈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태정관지령」 등을 수록한 『태정류전(太政類典)』에서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마네현이 제출한 「기죽도략도(磯竹島略図)」에는 전통적인 다케시마(竹島, 현재의 울릉도)와 마츠시마(松島, 현재의 독도=竹島)가 그려져 있지만, 시마네현이 정리한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에 관한 기사에서는 마츠시마(松島)에 대해 언급한 직후에 에도시대의 다케시마(竹島=울릉도)와 관련된 기사가 이어지는 등, 울릉도를 마츠시마라 오인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단서는 1840년, 시볼트의 「일본전도(日本全図)」에 후에 환상의 섬이 되는 아르고노트섬과 다쥴레섬이 그려져, 각각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라는 섬 이름이 부기된 것에 있다. 그 후, 다케시마(竹島=아르고노트섬)는 해도 등에서는 「미확인」으로 되어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근세 이래 기죽도(礒竹島)・죽도(竹島)로 되어있던 울릉도가 마츠시마라 표기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병섭 씨가 말하는 「외국의 잘못된 지도의 영향」이란 울릉도를 마츠시마(松島)라 하고, 다케시마(竹島)를 환상의 아르고노트섬이라 했던 당시의 지도를 가리킵니다. 현재의 다케시마(竹島)를 마츠시마(松島)라 한 시마네현의 지리적 이해도 당시의 해도 등에 기록된 다케시마와 마츠시마와는 명백히 달랐다.

  그 해도 등의 오류가 수정되는 건 1880년 천성함(天城艦)의 측량에 의해서다. 마츠시마를 조선의 울릉도라 한 천성함의 보고는 1881년 6월, 일본인에 의한 울릉도에서의 벌채가 문제가 됐을 때 외무성의 지시로 조사했던 기타자와 마사나리(北澤正誠)의 『죽도판도소속고(竹島版図所属考)』에 채용되어 마츠시마는 조선령인 울릉도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이에 메이지정부는 1882년, 내무소서기관 히가키 나오에(桧垣直枝)를 마츠시마(松島=울릉도)로 파견하고, 일본인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박병섭 씨는 기타자와 마사나리(北澤正誠)가 『죽도판도소속고(竹島版図所属考)』에서 마츠시마(松島=울릉도)를 「이전부터 우리 판도 밖의 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古来我版図外の地たるや知るべし)」고 한 사실을 무시하고 1877년의 「태정관지령」만을 문제시삼아 「내무성과 외무성, 육군, 해군, 태정관 등의 관련기관이 이 섬을 조선령이라 생각했다」고 한 것이다. 필자가 졸저인 『다케시마는 일한 어느 쪽의 것인가(竹島は日韓どちらのものか)』를 통해 「현재의 다케시마(竹島=독도)를 가리키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실하지 않다」며 판단을 피하고, 『발신다케시마(発信竹島)』에서 「현재의 다케시마(독도)를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 건, 이상의 내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단지『제군(諸君)』과 같이 지면에 여유가 있는 경우는 전후로 근거를 제시한 후에 「『다케시마 외 한 섬(竹島外一島)』은 모두 현재의 울릉도를 가리키고 있었다」고 한 것이다. 이를 박병섭 씨는 「이처럼 자설(自説)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주 바꾸는 건 너무나 이례적이다」(38페이지)라고 하는데, 이는 궤변이다.

(3)「해군성의 다케시마(竹島)・마츠시마(松島) 인식」에 대해
  박병섭 씨는 「리앙쿠르열암(リアンコールト列岩)은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에만 기록되었고, 같은 시기의 『일본수로지(日本水路誌)』에 기재되지 않았던 건 주목할 필요가 있다」(45페이지)며, 「수로부가 리앙쿠르, 즉 다케시마(竹島)=독도(独島)를 일본령 외로 간주한」(46페이지) 증거라 했다.

  그러나 이는 『조선수로지』의 기술을 곡해한 것으로 그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1894년 간행된 『조선수로지』(「형세(形勢)」)에서는 조선의 강역을 「동경124도30분에서 130도35분에 이른다(東経一二四度三〇分より一三〇度三十五分に至る)」고 명기되어 있어 당연히 그 안에는 「동경 131도55분」의 리앙쿠르열암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병섭 씨가 『조선수로지』에 기재되어 있다고 하는 「일본해(日本海)」에는 리앙쿠르열암 외에 울릉도(일명 마츠시마=松島)와 와이오다암이 기록되어 있다. 이 와이오다암은 『조선수로지』에 따르면 「러시아 군함인 와이오다호의 발견과 관련된 하나의 고립된 바위로 그 개략적인 위치는 북위42도14분30초 동경137도17분(露国軍艦ワイオダ号の発見に係れる一孤立岩にして其概位置は北緯四二度一四分三〇秒東経一三七度一七分)」에 있다고 여겨져, 1895년의 영국 해군의 해도 제2405호를 기초로 한 「북주 및 동북열도(北洲及北東諸島)」에서는 홋카이도와 흑룡연해주(黒龍沿岸州) 사이에 그려져 있다.

  와이오다암은 일본해 내의 「위험한 암초(暗岩危礁)」로 기재된 것으로 리앙쿠르열암이 기재되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조선수로지』에 리앙쿠르열암이 기재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조선령이라고 한 증거는 되지 않는다.

  반면 리앙쿠르열암은 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호에 의해 발견되어 1851년의 프랑스해군의 『태평양전도(太平洋全図)』에서는 다케시마(竹島), 마츠시마(松島), 리앙쿠르열암이 그려져 있다. 거기서 다케시마(竹島=아르고노트섬)이 사라지는 건 1876년의 영국해군 수로국의 「일본(日本)‐일본(日本), 규슈(九州), 시코쿠(四国) 및 한국연해안 일부」에서부터로, 여기서는 울릉도(松島=마츠시마)와 리앙쿠르열암이 그려져 있다. 이는 태정관지령에서 「다케시마 외 한 섬 일본과 관계없다」고 한 전년(前年)으로 4년 후에는 메이지정부도 마츠시마(松島)가 울릉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따라서 새로 나온 리앙쿠르열암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무주지」였던 것이다. 메이지정부가 1905년, 리앙쿠르열암을 「무주지」라며 이를 다케시마(竹島)라 명명하고 시마네현에 편입해도 이는 침략이라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 측에는 리앙쿠르열암을 한국령이라 하는 역사적 근거가 없으며, 지금까지 한국 측이 논거로 삼아 온 『동국문헌비고』의 분주는 이미 후세의 개찬이었다는 사실이 실증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측에서는 다케시마(竹島=독도)를 한국고유의 영토라 하고, 박병섭 씨도 「이는 현재의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다케시마 고유영토」설과 맞지 않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49페이지)고 하고 있지만, 다케시마(독도)를 고유영토라 말할 수 있는 건 일본 뿐이다. 「고유영토」는 북방영토와 같이 현재까지 어느 나라에도 통치된 적이 없는 영토를 가리키며, 「무주지」였던 다케시마(독도)는 적어도 1905년부터 전전(戦前)까지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다케시마(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 말할 수 있지만, 일본의 영토를 침략한 한국 측에는 독도를 「고유영토」라 할 자격이 없다.

  그럼 이상을 종합해보면 「메이지정부는 다케시마(竹島)・마츠시마(松島)가 일본 영토 밖이라는 방침을 1905년 「리앙쿠르섬(다케시마=독도) 편입」까지 일관되게 견지」(36페이지)했지만,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한국령이었던 다케시마(竹島=독도)를 「무주지」라는 명분으로 일본령으로 만들어버렸다, 는 박병섭 씨의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음이 명백해졌다. 돗토리단기대학의 『동북아문화연구(北東アジア文化研究)』에 게재된 박병섭 씨의 「메이지정부의 다케시마=독도인식(明治政府の竹島=独島認識)」도 또한 허위역사를 날조하고, 역사문제로서의 다케시마(독도)문제를 혼란에 빠뜨리는 정치적 선전에 불과하다 하겠다.

(주1)『은주시청합기(隠州視聴合記)』(「국대기(国代記)」)의 해석에 대해서는 사실을 구한다 6・7 등을 참조할 것.

(주2)오츠키 슈헤이(大槻修平)의 『재각 일본지지요략(再刻日本地誌要略)』(권의5) 「오키(隠岐) 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본디 이 나라는 일본해 내 서변의 고독한 섬으로, 그 서북바다에 마츠시마 다케시마 두 섬이 있다. 모두 조선 지방에 가까이 있지만(후략)(抑此国は日本海中西辺の絶島にして、其西北洋中に松島竹島の両島あり。共に朝鮮地方に接近すれども、亦居民統属なく、各方の人時に来りて海猟の場となすと云ふ)」.
http://www.pref.shimane.lg.jp/soumu/web-takeshima/takeshima04/takeshima04-2/takeshima05-d.html

 

 

독도본부 2012.02.16.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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