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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구시  〜일한의 가시, 다케시마문제를 생각한다〜

제21회 박병섭 씨의 「시모죠 마사오의 논설을 분석하다」(「독도연구」제4호)를 반박하다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09.07.23


  영토문제를 논할 때는 그 영유권을 주장하는 역사적 근거가 문제가 된다. 때문에 한국 측이 다케시마(독도)를 한국령이라는 논거로 삼아 온 『동국문헌비고(東国文献備考)』의 분주인 「여지지에서 말하는 울릉·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 우산은 왜의 소위 마츠시마(현재의 다케시마=독도)다(輿地志に云う、欝陵・于山、みな于山国の地。于山は倭の所謂松島(現在の竹島)なり)」가 편찬시인 1770년에 개찬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측 입장에서는 치명적이었다. 한국 측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다케시마(독도)를 침략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2008년 2월, 외무성이 간행한 소책자인 『다케시마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의 포인트(竹島問題を理解するための10のポイント)』에 개찬된 사실을 기재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측에서 설득력 있는 반론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국 측도 개찬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한국 측 및 한국 측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언동을 보면 시마네대학 명예교수인 나이토 세이츄(内藤正中) 씨는 『다케시마=독도문제입문-일본외무성[다케시마]비판-(竹島=独島問題入門‐日本外務省「竹島」批判‐)』을 통해 이를 「이설(異説)」이라 하였고, 재일독도연구가를 자칭하는 박병섭 씨도 「외무성은 시모죠의 논설을 전혀 검증하지 않고 인용했지만 본래 시모죠의 논설은 잘못됐다(外務省は下條の論説をまったく検証することなく引用したが、そもそも下條の論説は誤りである)」(「독도연구」제4호・한국영남대학교편)고 할뿐, 역사연구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반응했다. 그 전형이 박병섭 씨의 「시모죠 마사오의 논설을 분석한다(下條正男の論説を分析する)」(「독도연구」제4호)이다. 박병섭 씨는 「시모죠가 쓴 것」은 「『제군(諸君)』, 『정론(正論)』등, 우익계 2대 잡지에 발표되는 일이 많아 전문가 이외로부터도 주목을 받고 있다」며, 맺음말에서는 「시모죠의 방식과 주장은 시마네현과 우익계 잡지인『정론(正論)』과 『제군(諸君)』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런 그의 주장이 우익 이외에서 어디까지 받아들여질지, 앞으로도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또한 그와 외무성과의 관계가 향후 어떻게 나아갈지도 흥미로운 부분이라 하겠다」고 맺고 있다.

  박병섭 씨의 방식에 따르면, 외무성이 정리한 소책자 『다케시마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의 포인트』도 우익의 소행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연구에 요구되는 건 정당한 문헌비판을 통해 보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에 있다. 박병섭 씨처럼 필자의 출신대학과 근무처인 타쿠쇼쿠대학을 「우익편향 대학」이라며 필자에게 「소수파」, 「운동가」, 「우익」과 같은 딱지를 붙임으로써 역사연구 자체마저도 부정한 것처럼 착각할 필요는 없다.

  이에 이번에는 박병섭 씨가 「독도연구」제4호에 발표한 「시모죠 마사오의 논설을 분석한다(下條正男の論説を分析する)」에 대해, 그리고 다음에는 돗토리단기대학(鳥取短期大学)의 『동북아문화연구(北東アジア文化研究)』제28호에 게재된 박병섭 씨의 「메이지정부의 다케시마=독도인식(明治政府の竹島=独島認識)」을 중심으로 그 진위를 규탄하기로 했다.

  과연 박병섭 씨가 「시모죠 마사오가 선전하는 것처럼 사서(史書)의 「날조」와 「개찬」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동국문헌비고』의 분주(分註)에는 개찬 사실은 없었던 것일까. 이번의 실사구시에서는 박병섭 씨의 입론(立論; 의론의 취지ㆍ순서 따위를 내세움, 또는 그 의론)의 문제점과 오류를 지적하기로 했다.

(1)『동국문헌비고』(「여지고(輿地考)」)의 해석
  이제까지 한국 측은 다케시마(독도)영유권을 주장할 때에 『동국문헌비고』(「여지고」)의 분주를 근거로 삼아왔다. 분주에는 「여지지에서 말하는 울릉・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 우산은 왜의 소위 마츠시마(현재의 다케시마=독도)다」라고 하고 있어, 한국 측에서는 문헌상의 우산도를 무비판적으로 현재의 다케시마(독도)라 바꿔 읽어「울릉・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이기 때문에 다케시마(독도)를 울릉도의 속도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한국 측이 이를 논거로 삼기 위해서는 분주에 인용된 『동국여지지(東国輿地志)』와 『동국문헌비고』에 대한 문헌비판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일한 간의 논쟁에서는 『동국문헌비고』의 분주에 인용된 『여지지』는 문제시되지 않고 『동국문헌비고』의 편찬과정을 검증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연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이것이 문제시 된 건 1996년, 한국 측이 다케시마(독도)에 접안시설을 건설해 다케시마(독도)문제가 재연된 이후다.

  이때 『동국문헌비고』의 인용문과 그 저본이 된 신경준의 『강계지(疆界誌)』에 인용되었던 유형원의 『동국여지지』의 문언이 다르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동국문헌비고』(1770년)에는 「여지지에서 말하는 울릉・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 우산은 왜의 소위 마츠시마(현재의 다케시마=독도)다」라고 되어 있지만, 『동국여지지』(1656년)에는 「일설에 우산, 울릉 본래 한 섬(一説に于山、欝陵本一島)」이라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느 단계에서 『동국여지지』의 문언이 바꿔 쓰인 것일까. 이는 『동국문헌비고』의 저본이 되는 신경준의 『강계지』(1756년)에서 「하나는 즉 왜의 소위 마츠시마로, 아마 두 섬 모두 우산국이다(一則倭所謂松島而、蓋二島、倶是于山国也)」로 되어 우산도가 다케시마(독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현존하는 유형원의 『동국여지지』에는 우산도를 「왜의 소위 마츠시마(倭の所謂松島)」라는 문언은 없다. 이를 『동국문헌비고』의 분주에서 우산도(于山島)를 「왜의 소위 마츠시마(倭の所謂松島)」라 하고 있는 건 『동국여지지』로부터의 인용문이 개찬되어 허위사실이 날조된 증거라 하겠다.

  이를 박병섭 씨는 「시모죠 마사오가 선전하는 것처럼 사서(史書)의 「날조」와 「개찬」은 없었다」고 하지만, 그 근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박병섭 씨는 이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동국문헌비고』의 경우는 「울릉・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이 인용문으로, 그 이하의 「우산은 즉 왜가 말하는 마츠시마다」는 신경준의 견해임을 『여지지』를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시모죠 마사오가 선전하는 것처럼 사서(史書)의 「날조」와 「개찬」은 없었다」

  하지만 이 짧은 문장 안에서도 박병섭 씨는 2가지 실패를 범하고 있다. 「『동국문헌비고』의 경우는 「울릉・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이 인용문에 있고, 그 다음의 「우산은 즉 왜가 말하는 마츠시마다」는 신경준의 견해다」라고 한 부분이다.

  박병섭 씨는 『동국문헌비고』의 분주에 「우산도는 왜의 소위 마츠시마」라 되어있는 건 「신경준의 견해」에 의한 것이라고 스스로 개찬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중에 무심코 사실을 말해버린다는 말이 바로 이 경우라 하겠다. 이리하여 박병섭 씨는 「시모죠 마사의 논설을 분석한다」를 논술하는 중에 다케시마(독도)를 점거해 온 한국 측의 근거까지도 뭉개고 만 것이다.

  박병섭 씨의 두 번째 실패는 「『동국문헌비고』의 경우는 「울릉・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을 인용문」으로 삼은 것이다. 이 『동국문헌비고』의 분주(「울릉・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는 한국 측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다케시마(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근거였다. 때문에 다케시마(독도)는 6세기부터 한국령이었다, 고 주장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 「울릉・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에 가까운 기술은 유형원의 『동국여지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경준이 편술한 『강계지』의 안기(按記)에「아마 두 섬은 모두 우산국일 것이다(蓋し二島倶に是于山国なり)」라는 글이 「울릉・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의 논거이다. 따라서 『동국문헌비고』의 분주에 있는 「울릉・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도 유형원의 『동국여지지』와는 관계가 없으며, 『동국문헌비고』 편찬 시에 홍계희가 신경준의 『강계지』의 안기(按記)를 윤색, 작문(주1)한 것이다. 이를 박병섭 씨는 「시모죠 마사오가 선전하는 것처럼 사서(史書)의 「날조」와 「개찬」은 없었다」고 궤변하고 있지만 이는 근거 없는 망언이다.

  역사문제로서의 다케시마(독도)문제는 신경준의 『강계지』에 대한 문헌비판에서 시작해야 하지만, 박병섭 씨의 「시모죠 마사오의 논설을 분석한다」에서는 신경준의 『강계지』에 대한 문헌비판까지는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박병섭 씨가 「시모죠는 ○○이다」라는 식의 딱지를 붙여 반론을 시도하는 한 논쟁의 영역에는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박병섭 씨가 「반월성통신」이라는 사이트에서 「시모죠 마사오 비판」을 실시, 2007년도에는 한국의 정부기관인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의 연구보조를 받아 「안용복사건에 대한 한일 간 의견대립 분석(安龍福事件に対する日韓間の意見対立の分析)」, 「시모죠 마사오의 주장비판(下條正男の主張批判)」 등을 연구과제로 삼을 것처럼, 그 목적이 정치적 선전에 있기 때문이다.

  이미 역사연구로서의 다케시마(독도)문제는 신경준의 『강계지』(1756년)에 대한 문헌비판까지 진행되어, 신경준의 『강계지』에는 저본이 존재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게 바로 이맹휴의 『춘관지(春官志)』(1745년서)이다. 『강계지』의 「안용복전(安龍福伝)」과 「울릉도」조는 『춘관지』에서 「울릉도쟁계(欝陵島争界)」를 표절한 것으로 그 안에서 신경준이 『강계지』에 안기(按記)를 쓰고 사견을 덧붙인 부분이 후에 『동국문헌비고』의 분주가 되는 것이다. 「시모죠 마사오의 논설을 분석한다」고 한 박병섭 씨지만, 왜 박병섭 씨는 이맹휴의 『춘관지』에 대한 입론(立論)을 피한 것일까. 신경준이 안기(按記)를 삽입한 이맹휴의 『춘관지』(「울릉도쟁계」)의 해당 부분에서는 아래와 같이 우산도를 울릉도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섬(울릉도. 주 시모죠), 대나무를 생산하기에 죽도라 칭하는 모양이다. 삼봉이 있어 삼봉도라고도 말한다. 우산, 우릉, 울릉, 무릉, 의죽도에 이르러서는 모두 음호가 전화(;転訛: 말의 원래의 발음이 편의상 변화함.)한 것이다(蓋しこの島(欝陵島.注下條)、其の竹を産するを以ての故に竹島と謂い。三峯あるが故に三峯島と謂う。于山、羽陵、蔚陵、武陵、礒竹島に至りては、皆音号転訛して然るなり)」

  이 기술에서도 드러나듯, 이맹휴의 『춘관지』(「울릉도쟁계」)에서는 우산도를 울릉도라 하고 있다. 이에 신경준은 『강계지』를 편술할 때에 이 해당부분에 「아마 여지지에서 말하는 일설 우산, 울릉 모두 한 섬. 그런데 제반 도지(図志)를 생각하면 두 섬이다. 하나는 소위 왜의 마츠시마로 아마 두 섬 모두 우산국이다)(愚按、輿地志云、一説于山、欝陵本一島。而考諸図志二島也。一則倭所謂松島而蓋二島倶是于山国也)」라는 안기(按記)를 삽입하고 사견을 통해 「우산도를 왜의 마츠시마」라는 허위사실을 날조한 것이다.

  그럼 신경준은 왜 우산도를 「왜의 마츠시마다」라고 한 것일까. 이는 1696년, 일본에 밀항하여 돗토리번(鳥取藩)에 의해 가로탄(加露灘)에서 추방당한 안용복이 귀환 후 취조 시「마츠시마는 즉 자산도(우산도), 이 또한 우리나라 땅(松島は即ち子山島(于山島)、此れ亦我国の地)」이라 공술하고 스스로 돗토리번의 번주와 교섭해 「울릉도와 마츠시마가 조선령이 되었다」고 위증했기 때문이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東国地理誌)』(1615년)와 이맹휴의 『춘관지』(1745년) 등에서 울릉도로 여겨졌던 우산도가 「왜의 마츠시마(倭の松島)」가 된 단서는 안용복의 거짓 공술에 있다.

  안용복의 공술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신경준은 『동국문헌비고』에서는 결과적으로 인용문까지도 개찬되어 사실무근의 「우산도=마츠시마(于山島=松島)」설을 만연시켜버렸다. 동시대의 정동유는 신경준을 「독선으로 내달아 제멋대로 사실무근의 설을 만들어 자설을 예부터 올바른 근거로 삼는다. 이것이 신경준의 단점이다(独善、付会の説をなし、往々我より古となす。これ其の短なり)」라고 혹평하지만, 『강계지』에 대한 문헌비판을 게을리 한 박병섭 씨에겐 역사적 사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이 박병섭 씨가 「시모죠 마사오가 선전하는 것처럼 사서(史書)의 「날조」와 「개찬」은 없었다」라고 하는 건 문헌비판을 게을리 하고 사서(史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자의 망언이라 하겠다.

(주1)『동국문헌비고』편집과 관련해『승정원일기』의 영조46년 5월 2일조에는 「경준이 시작했고 계희가 윤색하다(景濬草創して、啓嬉潤色す)」라 기록되어 있다. 경준(景濬)은 신경준을 가리킨다. 계희(啓嬉)는 홍계희를 말한다. 또한 홍계희가 『동국문헌비고』편찬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안정복의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제5, 「홍판서에게 보내는 글(洪判書に与ふるの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춘관지(春官志)』에 대해서는 필자의 졸고인「[죽도기사]와 [춘관지]각서(『竹島紀事』と『春官志』覚書)」(「국제개발학연구(国際開発学研究)」제2권 제4호・게이소서방=勁草書房)을 참조할 것.
http://www.pref.shimane.lg.jp/soumu/web-takeshima/takeshima04/takeshima04-2/takeshima05-c.html

 

 

독도본부 2012.02.15.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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