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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독도의 날」은 사실무근  

실사구시 제34회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11.12.02

  한국에서는 10월 25일을 「독도의 날(独島の日)」로 하고 있다. 이는 대한제국정부가 1900년 10월 25일, 울릉도를 울릉군으로 승격시킨『칙령 제41호』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칙령 제2조에는 울릉군의 관할구역이「울릉전도와 죽도, 석도(欝陵全島と竹島、石島)」로 정해져있어 한국 측에서는 그 석도(石島)를 독도로 하고 10월 25일을 독도가 한국령이 된 「독도의 날」로 한 것이다. 게다가 「독도의 날」은 다케시마(독도)의 시마네현(島根県)편입 100주년을 기념하여 시마네현의회가 「다케시마의 날(竹島の日)」조례를 제정한 것에 대한 대항조치로 시마네현과 자매제휴를 맺은 경상북도에서는 10월을 「독도의 달」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칙령 제41호』의 석도(石島)를 독도로 하는 「독도의 날」과 「독도의 달」에 역사적인 근거는 없다. 당시 일본에서는 다케시마(竹島)를 량코섬(リャンコ島)이라 칭했지만 한국 측이 량코섬을 독도로 삼은 건 일본인에게 고용된 울릉도민이 량코섬에서 강치잡이를 시작한 1904년 이후였기 때문이다. 그 독도의 섬 이름이 4년 전에 성립된 『칙령 제41호』 석도(石島)의 섬 이름에 영향을 미쳤다는 한국 측의 주장은 황당무계하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울릉도민은 전라도 어민출신자가 많기 때문에 당연히 근처인 량코섬으로도 건너가 어로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라도의 발음으로는 석(石/돌)과 독(独/독)이 유사해 전라도방언의 영향으로 석도(石島)가 독도(独島)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전라도출신 어민이 독도 근해로 출어해 전라도방언에서 석도(石島)가 독도(独島)가 되었다는 ‘음위전환론(音位転換論)’ 은 궤변이다. 왜냐하면 1900년 당시, 울릉도의 산업은 주로 농업이었기 때문이다. 울릉도가 군(郡)으로 승격하기 4개월 정도 전에 현지에 파견된 시찰관 우용정(禹用鼎)은 울릉도의 「남녀 모두 1700명 정도, 화전을 개간하여 약7700말 정도를 수확한다(男女共に千七百余口、火田を起墾して七千七百余斗落と為す)」며, 그 산업을 「보리·밀, 황두, 감자(大・小麦、黄豆、甘藷)」라 전하고 있다(注1).

  한편 『한국수로지(韓国水産誌)』(1910년 간행)에 따르면 울릉도에 본격적인 어업이 시작된 건 1903년(메이지36년), 근해에서 오징어의 좋은 어장이 발견되어 1905년(메이지38년)에「일본거주자에게 배워(日本居住者に見習い)」, 울릉도의 「중등 이하의 어민은 모두 오적어(오징어)를 경영하게(中等以下の農民は、悉く烏賊漁を営むに至)」되었다. 『칙령 제41호』가 공포된 1900년 당시, 농업에 종사했던 울릉도 도민은 다케시마(독도)로 건너가 어로활동을 하는 일은 없었다. 

  한국 측에서는 이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울릉군의 관할구역에 있는 석도(石島)의 석(石)을 돌로 읽고, 이는 독도(独島)임에 틀림없다, 고 한다. 그러나 『한국수산지(韓国水産誌)』에서는 울릉도의 부락인 석문동(石門洞)과 정석포(亭石浦)를 각각「석문동」, 「정석포」라고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 울릉도에는 전라도출신자가 많고, 석(石)은 전라도 방언으로 돌(トル)이라는 고유어(훈독)로 읽혔다고 하지만 부락이름의 석(石)은 한자어(음독)인 석(ソク)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는 울릉군의 관할구역인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欝陵全島と竹島、石島)」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울릉전도(欝陵全島)는「울릉전도(ウルルンチョンド)」, 죽도(竹島)는「죽도(チクト)」로 모두 음독이다. 

  이를 석도(石島)에 한해 「돌섬(トルソム) 이라는 고유어(훈독)로 읽고, 「돌도(トルト)」(돌(トル/훈)+도(ト/음)로, 한국어에서도 드문 「유토요미(湯桶読み;한자 숙어를 앞 글자는 훈(訓)으로, 뒷글자는 음(音)으로 읽는 방식.)」로 읽는다는 건 궤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울릉도의 부락이름에서 석(石)을「석(ソク)으로 음독한 것처럼 석도(石島)는「석도(ソクト)」로 음독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독도(独島/トクト)도 음독했기 때문이다. 「칙령 제41호」의 석도만을 예외로 하여 고유어(돌)로 읽게 하고, 울릉도에서 90킬로미터나 떨어진 독도로 하는 건 견강부회. 벽설(僻説;괴벽스러운 주장.)이다. 

  한국에서는『칙령 제41호』에 있는 석도(石島)를 독도(独島)로 하고, 이를「독도의 날」의 근거로 삼고 있지만 문헌과 사료를 통해 실증된 것이 아니다. 울릉도에는 전라도출신자가 많아 석(石)의 전라도방언이 독도의 발음과 가깝다는 기상천외한 것만이 있다. 이처럼 한국 측의 해석이 자의적인 건, 『칙령 제41호』에서는 석도(石島)의 위치가 위도와 경도로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칙령 제41호』를 금과옥조로 삼는 한국 측은 제2조의 석도를 독도로 삼으려고 이것저것 그럴듯한 논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울릉군의 관할구역이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欝陵全島と竹島、石島)」로 된 것에는 근거가 있다. 1900년 10월 24일, 『칙령 제41호』의 「칙령안」을 의정부회의에 제출한 내부대신 이건하(李乾夏)의 청의서에는 울릉군의 강역(疆域)이 명기되어 있다. 그 10월 22일자에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는 것에 관한 청의서(欝陵島を欝島と改称し島監を郡守に改正することに関する請議書)』에는 울도군의 범위가 「해당 섬 지방은 세로 80리, 가로 50리(該島地方は縦八十里で、横五十里)」라 기록되어 있다. 이 또한 내부대신(内部大臣) 이건하의 청의서는 「본부 시찰관 우용정과 동래 세무사의 시찰록(本部視察官禹用鼎と東莱税務司の視察録)」을 참고로 하고 있다. 『칙령 제41호』의 제2조에서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欝陵全島と竹島、石島)」라 정해진 관할구역에는 명확한 기준이 있었던 것이다. 

  그『칙령 제41호』(제2조)의 근거가 된「시찰관 우용정과 동래 세무사의 시찰록(視察官禹用鼎と東莱税務司の視察録)」은 내부대신 이건하가 시찰관인 우용정을 울릉도로 파견해 현지에서 심문(;자세히 캐어물음.)한 보고서다. 시찰관 우용정의 『울도기(欝島記)』에 따르면 당시 울릉도에서는 일본의 목재벌채업자와 도감(島監) 사이에 수목의 무분별한 벌채를 둘러싼 대립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00년 6월 1일부터 5일간, 일한 합동 심문이 실시됐다. 내부대신 이건하는 그 시찰록을 참고로 「최근, 외국인이 왕래 교역하고, 교제상(挽近、外国人が往来交易し、交際上)」필요하다는 견해에서 울릉도를 군(郡)으로 승격시키는「칙령안」을 의정부회의에 제출한 것이다. 

  그 청의서 중에 내부대신 이건하가 세로 80리(약32km), 가로 50리(약20km)라 한 건, 울도군이 되는 울릉도의 강역이다. 이 또한 「세로 80리, 가로 50리(縦八十里、横五十里)」표기는 1711년에 수토사 박창석(朴錫昌)이 제작한『울릉도도형(欝陵島図形)』과 같으며 울릉도 1섬(欝陵島一島)(注2)을 가리키고 있다. 이 사실은 『울릉도도형(欝陵島図形)』에 그려져있지 않은 다케시마(독도)는 울도군의 강역 밖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독도(다케시마)는 울릉도 동남 약90km에 위치하며 당시 대한제국의 표기에 따르면 울릉도로부터 225리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용정의 울릉도시찰은 울릉도를 일주(一周)한 것에 그쳤으며 다케시마(독도)로 건너가지 않았다. 우용정의 『울도기(欝島記)』에 따르면 「윤선(輪船:기선(汽船)을 이르던 말.), 오랫동안 정박하지 못한다, 석탄부족을 보고(多日留泊すべからず、石炭また乏しきを告ぐ)」와 같은 상태로 연료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도에도 건너가지 않고 그 존재조차 언급하지 않은 도서를 울도군의 관할구역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이는 시찰관 우용정을 울릉도로 파견한 목적이 수목의 무분별한 남획에 대한 심문에 있었으며 관할구역 획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울릉도에 대한 우용정의 지식은 현지에서 얻은 정보가 기초가 된다. 『울도기(欝島記)』(「후록(後録)」)에서 울릉도를「길이 70리로 되어 있으며 넓이는 40리로 되어 있다. 둘레는 대략 140~150리 정도. 또한 이것은 거주민이 말하는 곳(長さ七十里と為すべく、広さ四十里と為すべし。周廻、概ね一百四五十里を下らず。またこれ、居民の称する所)」이라 하고 있는 것처럼, 현지 거주민으로부터 얻은 지식이었다. 내부대신 이건하는 그 우용정의 보고를 받아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정한 것이다. 그 중에 우용정이 울도군의 둘레(周廻)를 「대략 140~150리 정도(概ね一百四五十里を下らず)」(56km~60km)라 한 것은 1882년, 울릉도 검찰사인 이규원이 복명(復命)한 울릉도 강역과 중복된다. 그 이규원이 복명(;명령받은 일을 집행하고 나서 그 결과를 보고함.)한 「둘레 140~150리(周廻一百四五十里)」중에는 다케시마(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독도는 대한제국의 영토 밖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시찰관 우용정이 울릉도로 파견도기 전년, 대한제국에서는 현채(玄采)역집(訳輯)인『대한지지(大韓地誌)』(1899년 간행)가 간행되어 대한제국의 강역은 「동경124도 30분에서 130도 35분에 이른다(東経一二四度三十分に起り一三〇度三十五分に至る)」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경131도 55분(東経一三一度五十五分)」(注3)에 위치하는 다케시마(독도)는 당연히 대한제국의 판도(版図) 밖에 있었다. 

 그럼 『칙령 제41호』에 기록된 죽도(竹島)와 석도(石島)는 울릉도의 어느 도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이를 울릉도 개척의 계기가 된 검찰사 이규원의 『울릉도외도(欝陵島外図)』(그림1)에서 확인하면 거기에는 울릉도 동쪽에 죽도(竹島)와 도항(島項)인 2섬이 그려져 있다. 

(그림1) 이규원『울릉도외도(欝陵島外図)』 

  이 중에 죽도(竹島)는 『칙령 제41호』에서「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하는 것(区域は欝陵全島と竹島、石島を管轄する事)」으로 되어있는 죽도(竹島)이다. 이 죽도(竹島)는 울릉도 동쪽 약2킬로미터에 위치하며, 1711년에 수토사 박석창이 그리게 한 『울릉도도형(欝陵島図形)』(그림2)에서는 「소위 우산도(所謂于山島)」라 부기(付記:덧붙여 적음. 또는 덧붙여 적은 것.)된 죽서(竹嶼)이다. 「소위 우산도(所謂于山島)」라는 죽서(竹嶼)는 그 후 조선에서는 우산도(于山島)가 되었고 1881년에 기타자와 마사나리(北澤正誠)가 『죽도고증(竹島考証)』에서 죽서(竹嶼)를 「죽도(竹島)」(注4)로 하고 나서는 죽도(竹島/チクト)라고도 표기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림2) 박석창『울릉도도형』 

  울도군의 관할구역으로 된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欝陵全島と竹島、石島)」가운데, 죽도(竹島)가 현재의 죽도(竹島/チクト=竹嶼)라고 하면 나머지 석도(石島)는 이규원이 『울릉도검찰일기(欝陵島検察日記)』등에서 「그저 대나무 숲이 있을 뿐(ただ叢竹あるのみ)」이라 한 도항(島項=관음도=観音島・서항도=鼠項島)이다. 이 도항(島項)은 이규원이 『울릉도외도』에 그리고 『울릉도검찰일기』 등에서 죽도(竹島/죽서=竹嶼)와 함께 「2개의 작은 섬이 있다(二小島あり)」고 한 가운데 1섬으로 울릉도 동북쪽 관음곶(観音崎)에서 수십 미터에 있다. 이 도항(島項)은 박병섭 씨가 『한말기의 죽도=독도어업과 석도(韓末期の竹島=独島漁業と石島)』(注5)에 게재한 1909년 수로부가 간행한 해도306호 「죽변만지수원단(竹邊灣至水源端)」수록「울릉도(鬱陵島/마츠시마=松島)」(그림3)와, 1910년 『한국수산지(韓国水産誌)』제2집의 본문에서는 「서항도(鼠項島)」(注6)로 되어 있다(注7).

(그림3) 해도306호 「죽변만지수원단(竹邊灣至水源端)」수록「울릉도(마츠시마=松島)」(부분) (1909년 간행, 울릉도는 1908년 측량)


  【부기(付記)】
 석도(石島)가 서항도(鼠項島)로 표기된 것에 관해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한문으로는 반절(反切:한자의 자음(字音)을 완전히 표시하기 위하여 두 글자를 합하여 한 글자의 음을 나타낸 것.)이라는 한자의 발음표시법이 있어 이를 사용했다는 견해이다. 「해도 306호」에서는 서항도(鼠項島)를 [서목섬(Somoku Somu)]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이를 반절(反切)의 표시법에 따라 읽으면 [서목섬(So moku Somu)]의 서(鼠[S(o)])의 최초의 모음인 o와, 항(項[(m)oku])의 최초의 자음인 m을 제외되어 「석(S(o)(m)oku)」은「석(So ku)=石」이 된다. 『칙령 제41호』에서는 석도(石島)로 표기되었지만 박병섭 씨가 거론한 「해도 306호」에서는 한자음으로 죽도(竹島)로 된 죽도(竹島)가 죽서(竹嶼=Tei Somu)이란 훈독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처럼, 석도는 반절을 사용해 훈독으로 서항(鼠項(「s(o)(m)oku)」)이라 표기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석(石「s(o)(m)oku」도(島)가 서항도(鼠項島[Somoku Somu]로 표기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병섭 씨는『한말기의 죽도=독도어업과 석도(韓末期の竹島=独島漁業と石島)』라는 제목으로 석도(石島)를 독도(独島)라 주장하는 가운데 필자가 「서항도의 일본어 읽기가 석도의 한국어 음독인 [석도(ソクトウ)]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석도는 관음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항도는 [석호도(ソコウトウ)]라 음독이 되어 있지 않다」. (중략) 「해도 306호에 [서항도 Somoku Somu]라 기재되어 [서목섬(ソモクソム)]이라 호칭되었다」며 「석도를 서항도로 한 시모죠의 주장은 근거 없는 견강부회라 할 수 있다」고 논하여 비난한다.

 그러나 필자는 서항도의 일본어 읽기가 석도의 한국어 음독인 [석도(ソクトウ)]와 유사하다고 한 것뿐이다. 그게 한국어로는 [서항도(鼠項島 Somoku Somu)]라 기재되어 [서목섬(ソモクソム)]이라 호칭되고 있다 해서 서항도를 일본어로 「서목섬(ソコウトウ)」이라 읽은 것이 왜 견강부회가 되는 것일까. 박병섭 씨가 근거로 삼은 「해도 306호」에서는 [서항도(鼠項島 Somoku Somu)]라 표기하고 있어 이를 한문으로는 전통적으로 반절로 읽으며, 한자음으로 호칭하면 석도를 「석도(ソクトウ)」가 된다. 박병섭 씨의 비판은 어떤 저의가 포함된 의도적인 비판이라 하겠다.

 사실 박병섭 씨가 비판한 필자의 졸고인『독도호칭고(独島呼称考)』에서는 시찰관 우용정이 다케시마(독도)로 건너가지 않은 사실과 『칙령 제41호』에서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欝陵全島と竹島、石島)」로 된 울도군의 관할구역이 「세로 80리, 가로 50리(縦八十里、横五十里)」라는 사실을 근거로 석도는 독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박병섭 씨가 반박한다면 필자가 「서항도의 일본어 읽기가 석도의 한국어 음독인 [석도(ソクトウ)]와 발음이 유사하다」며 서항도를 일본어로 「석호도(ソコウトウ)」라 읽은 것이 아니라, 필자가 문헌과 사료를 거론하며 석도가 독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증한 사실을 문제로 삼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앞서 기술한 해도 306호와 한국농상공부 수산국 편간(編刊)인 『한국수산지(韓国水産誌)』제2집에 수록된 「울릉도전도(欝陵島全図)」(그림4)에 독도가 그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반론해주었으면 한다.

(그림4)1910년 간행『한국수산지(韓国水産誌)』제2집 수록「울릉도전도(欝陵島全図)」(부분)

 그럼 본론으로 되돌아가자. 시찰관인 우용정이 울릉도로 건너가기 이전부터 울릉도에는 2개의 속도(属島)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注8). 이는 1899년 9월 23일자 『황성신문』(「울릉도사황(欝陵島事況)」)이란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신문의「울릉도사황(欝陵島事況)」에서는 「그 부속하는 작은 6섬 중에 가장 두드러진 건 우산도·죽도(その附属する小六島中で最著のものは、于山島・竹島)」(注9)라며, 울릉도의 6개 속도 중에서 우산도와 죽도라는 2섬이 두드러진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용정의 울릉도시찰 이전부터 2개의 속도에 대한 존재가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좌다. 

 『칙령 제41호』에서 울도군의 관할구역이「울릉전도와 죽도, 석도(欝陵全島と竹島、石島)」라 된 건, 시찰관 우용정이 울릉도에서 얻은 울릉도에 관한 지식이 기초가 되었다. 이는 수토사 박석창과 검찰사 이규원이 확립한 울릉도상(欝陵島像)으로 우용정은 이를 답습해 울릉도를 「둘레 140~150리(周廻一百四五十里)」(56km〜60km)의 섬이라 한 것이다. 울릉도의 해안선은 56.5km이다. 우용정이 현지 주민으로부터 얻은 울릉도 일주 지식은 거의 정확한 것이었다.

 그럼 이상과 같이 『칙령 제41호』의 석도(石島)는 다케시마(독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 게 명백하다. 대한제국은 그 강역을 「동경124도 30분에서 130도 35분에 이른다(東経一二四度三十分に起り一三〇度三十五分に至る)」고 하고, 『칙령 제41호』의 칙령안을 작성한 내부대신 이건하는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울릉도 1섬인「세로 80리, 가로 50리(縦八十里、横五十里)」로 했기 때문이다. 모든 강역에도 다케시마(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칙령 제41호』의 석도는 울릉도 동북, 관음곶(観音崎) 근처의 도항(島項)이었기 때문이다. 

 그 『칙령 제41호』공포로부터 6년 후, 석도가 독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량코섬(リャンコ島)이 다케시마(竹島=독도)라 명명되어 시마네현에 편입된 다음 해(1906년) 3월 27일, 시마네현 관계자가 다케시마(독도)시찰을 갔을 때의 일이다. 시찰 후, 갑자기 날씨가 악화되어 일행은 갑자기 울릉도 도동으로 피난, 다음날 아침(3월 28일), 울도군수 심흥택을 인사차 방문했다. 그때 시마네현은 「다케시마(독도)가 현재 일본의 영지가 되었다(竹島が今、日本の領地となった)」는 정보를 얻은 것이다. 

 울도군수 심흥택은 이를 3월 29일자로 강원도 관찰사서리 춘천군수인 이명래에게 「본군 소속 독도는 외양 약100리 밖에 있지만 (중략) 현재 일본의 영지가 되었다(本郡所属の独島は、外洋百余里の外に在るが(中略)今、日本の領地となった)」고 급히 보고하고, 울도군 소속의 독도가 「일본령이 되었다」고 보고한 것이다. 강원도 감찰사서리 춘천군수 이명래는 이를 4월 29일자「보고서 호외(報告書号外)」로 의정부 찬정대신인 박제순에게 급히 보고하자, 박제순은 5월 20일자 지령 제3호로 「독도영지설은 전혀 무근이다. 해당 섬의 지리적 상황과 일본인의 행동을 더 조사해 보고하라(独島領地の説は全く無根である。該島の形便(地理的状況)と日本人の行動をさらに調査し、報告せよ)」는 지시를 이명래에게 부여한다.

 하지만 그 거의 2개월 후, 1906년 7월 13일자 『황성신문』(注10)에는 「울도군의 배치전말(欝島郡の配置顛末)」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는 통감부가 내부에 울도군의 배치전말을 문의하는 공문으로, 내부(内部)에서는 「군청은 하태동이며, 해당 군 소관의 섬은 죽도·석도로, 동서가 60리, 남북이 40리. 합쳐 약200리(郡庁は霞台洞にあり、該郡所管の島は竹島・石島で、東西が六十里、南北が四十里。合わせて二百余里)」라고, 통감부에 답변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또한 내부의 답변에는 『칙령 제41호』에는 기술되지 않은 보충이 있었다. 울도군의 관할범위를 「동서가 60리, 남북 40리. 합쳐 약200리」라고 한 부분으로 이는 전통적으로 울릉도 1섬의 강역을 나타내는 표기였다.

 박석창이『울릉도도형』에서 울릉도를 「둘레 200리(周廻二百里)」라 하고, 이규원이 1882년의 『울릉도검찰일기』에서 울릉도의 서동(西東)을 「대략 60리(仮量六十里)」, 북서(北南)를 「대략 50리(仮量五十里)」로 한 것과 같은 표현이다. 따라서 내부(内部)의 답변에서 「해당 군 소관의 섬은 죽도·석도로, 동서가 60리, 남북이 40리. 합쳐 약200리」라고 한 사실은 심흥택이 「본군 소속의 독도는 외양 약100리 밖에 있다」며 독도를 울도군 소속으로 한 보고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다.

 심흥택은 독도를 「외양 약100리 밖에 있다(外洋百余里の外に在る)」며 울도군의 외양(外洋)에 있다하고 있는데, 내부(内部)에서는 울도군을 「동서가 60리, 남북이 40리. 합쳐 약200리」라 하여 울도군을 울릉도 1섬이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도군수인 심흥택이 강원도 감찰사서리 춘천군수인 이명래에게 「본군소속인 독도는 외양 약100리 밖에 있다(本郡所属の独島は、外洋百余里の外に在る)」고 보고하고 2개월 후, 내부(内部)는 『칙령 제41호』를 근거로 울도군의 관할범위를 「합쳐 약200리(合わせて二百余里)」로 한 것이다. 이 답변으로 명백해진 건 「해당 군 소관의 섬은 죽도·석도(該郡所管の島は竹島・石島)」로 된 석도(石島)는 「합쳐 약200리」의 범위 안의 섬으로 「외양(外洋) 약100리 밖에 있는」독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측에서는 이『칙령 제41호』를 근거로 대한제국은 일본보다 5년 빨리 독도(다케시마)를 영유했었다고 주장, 칙령이 공포된 10월 25일을 「독도의 날(独島の日)」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아무런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폭거다. 『칙령 제41호』의 석도는 독도와는 관계없는 도항(島項/관음도=観音島・서항도=鼠項島)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측은 일본의 다케시마(독도)편입을 침략이라 부르짖지만, 역사적 권원이 없는 채 다케시마(독도)를 침략해 불법점거하고 있는 건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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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1)『울도기(欝島記)』에서는 그 외에「수리(水利)는 주로 미역채취를 한다」고 하였으며, 「본도의 세금, 미역세를 과하는 것을 주로 함. (중략) 전라남도(후략)(本島の税、藿税を課すを主と為す。(中略)全南、素習水性の民、来たりて採る。毎年抽税五六百円を下らず)」이라 한 기술이 있다. 곽(藿)은 미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라남도민은 매년 울릉도로 건너가 미역채취를 했었다. 

(注2)수토사 박석창의 『울릉도도형』에서는 「둘레 약200리/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약80리/남쪽에서 북쪽까지는 약50리(周回、菫か二百余里たるべし/東より西に至る八十余里/南より北に至る五十余里)」라 주기(注記)되어, 울릉도 1섬의 강역이 명기되어 있다. 울릉도의 강역을 이처럼 나타낸 건 강원도 감사 유계문(柳季聞)이 1436년에 「무릉도 우산, 땅이 기름져 많이 생산되며, 동서남북 각 약50리(武陵島牛山、土沃多産、東西南北各五十余里)」라 상계(上啓:조정(朝廷)이나 윗사람에게 여쭘.)한 것이 예로, 이후 이것이 답습되었다(『세종실록』세종18년(1436年) 윤유월(閏六月) 갑신조(甲申條)).

(注3)1905년(메이지38년) 2월 22일의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서는 다케시마(독도)의 위치를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北緯三十七度九分三十秒、東経百三十一度五十五分)」이라 명기하고 있다.

(注4)기타자와 마사나리(北澤正誠)는 『죽도고증(竹島考証)』에서 「1880년(메이지 13년) 천성함의 마츠시마로 회항하는데 있어 그 땅에 가서 측량하기 시작해 마츠시마는 울릉도, 기타 죽도라는 건 1개의 바위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후략)(明治十三年天城艦ノ松島ニ回航スルニ及ビ其地ニ至リ測量シ始テ松島ハ欝陵島ニシテ其他竹島ナル者ハ一個ノ岩名タルニ過キサルヲ知リ事始テ了然タリ)」라 하고 있으며, 이후 죽서(竹嶼=Boussole.Rk)는 죽도(竹島)로 되었다. 

(注5)http://www.kr-jp.net/ronbun/park/parkBS-1107j.pdf#search

(注6)장지연의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1907년 간행)의 「제2, 해만 및 도서(巻二、海湾及島嶼)」에서는 울도군의 강역을 「북위130도 45분~35분, 동경37도 34분~31분(北緯百三十度四十五分乃至三十五分、東経三十七度三十四分乃至三十一分)」이라 한다. 여기서는 경도와 위도가 잘못 표기되어 있지만, 울도군의 강역은 「동경 130도 45분~35분(東経百三十度四十五分から三十五分)」에 있다고 되어 있다. 『대한신지지』의 첨부 지도에는 울도는 그려져 있지만, 「동경 131도 55분(東経百三十一度五十五分)」의 독도는 그려져 있지 않다.

(注7)1901년『한국수산지(韓国水産誌)』제2집의 본문에서는 「서항도(鼠項島)」라 하고 있지만, 『한국수산지(韓国水産誌)』제2집에 수록된 「울릉도전도(欝陵島全図)」에서는 「서항도(鼠頂島)」라 하고 있다. 1909년 수로부 간행 해도 306호인 「죽변만지수원단(竹邊灣至水源端)」에 수록된 「울릉도(마츠시마=松島)」에는 「서항도(鼠項島)」라 되어 있어, 「서항도(鼠項島)」라는 표기가 올바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注8)내부소서기관(内務少書記官) 히가키 나오에(檜垣直枝)의 『울릉도출장복명서(欝陵島出張復命書)』(메이지16년 11월)에는 「울릉도도(欝陵島図)」(가제)가 붙여져, 여기에는 죽도(竹島)와 도항(島項)이라는 2섬이 그려져있다. 「울릉도도(欝陵島図)」에서는 한국 측의 지명이 한자로 기재되어 한국어음의 토가 가타가나로 달려있다. 히가키 나오에는 울릉도를 「둘레 대략 14~15리(周回大概十四五里)」로 하고 있는데 이는 그 전해(前年)에 울릉도를 답사한 검찰사 이규원과 동일한 인식으로, 「울릉도도(欝陵島図)」의 지명도 검찰사 이규원이 1882년에 제작한 『울릉도외도(欝陵島外図)』의 지명과도 많이 중복되며 일한 양국의 울릉도상(欝陵島像)이 공통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注9)1711년 울릉도 수토사 박석창의 『울릉도도형(欝陵島図形)』에는 「소위 우산도(所謂于山島)」라 주기(注記)된 섬 이외에 속도(属島)라 생각되는 섬이 5개 그려져 있다. 지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도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후세에 『여지도(輿地図)』『팔도여지도(八道輿地図)』『팔도지도(八道地図)』『해동여지도(海東輿地図)』등에 답습되어 김정호의 『철구도(青邱図)』에서도 볼 수 있다. 

(注10)산인추오신보(山陰中央新報)「『석도=독도(石島=独島)』설을 부정하는 기술 발견되다」(2008년 2월 22일자), 산인추오신보는 「스기노 요메이(杉野洋明)」씨의 발견이라 보도하고 있다.
(시모죠 마사오=下條正男)
http://www.pref.shimane.lg.jp/soumu/web-takeshima/takeshima04/takeshima04-2/takeshima05-p.html

 

 

독도본부2011. 12. 21.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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