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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6(겐로쿠9년)년 안용복 등을 원조한 오키(隠岐)의 마을의 관리(村役人) 다카나시 모쿠사에몬(高梨杢左衛門), 가와시마 마고토효우에(河嶋理兵衛)

연구스태프, 연구협력원의 보고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11.11.25



서두                                 
 작년, 겐로쿠시대(元禄時代)에 두 번 일본에 온 안용복에 관한 지도, 논문, 강연 등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자산도(子山島)가 실려 있고, 이찬(李燦) 씨의 작성연대 결정기준에 따르면 안용복이 소지했던 「조선팔도도(朝鮮八道図)」와 같은 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고베(神戸)시립박물관 소장의 「팔도도(八道図)」, 한국의 영남대학 독도연구소 간행의 『독도연구』에 게재된 김화경(金和經) 씨의 논문인 「안용복의 도일과 자산도 및 지도 상의 그 위치문제」, 시마네현립대학・계명대학의 「다케시마(竹島)・독도연구회(独島研究会)」에서의 박병섭(朴炳渉) 씨의 「안용복사건의 재검토」라는 제목의 연구발표, 시마네현에서의 우치다 후미에(内田文恵) 씨의 「안용복의 공술(安龍福の供述)」이라는 강좌강연 등이 그것이다. 올해에 들어 6월부터 시모죠 마사오(下條正男) 씨의 「한국이 모르는 10가지 독도의 허위(韓国が知らない10の独島の虚偽)」라는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의 연재에도 때때로 등장하는데 10월의 안용복의 공술에 관한 폭 넓은 시점에서의 분석(제5회)은 참고가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오랜만에 1696년(겐로쿠9년) 안용복(安龍福) 등 11명이 오키(隠岐)의 오쿠(大久)마을에 왔을 때의 기록인「겐로쿠9 병자년 조선배 착안(元禄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巻之覚)」, 소위「무라카미집안 문서(村上家文書)」를 다시 읽어보니 안용복 등 이국인을 친절하게 보살핀 오키의 두 명의 마을의 관리(村役人;말단 행정에 종사한 名主·組頭·百姓代의 총칭)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무라카미집안 문서(村上家文書)」는 오키에서의 안용복 등의 이국인들의 언동, 소지했던 물품 등이 당시 막부의 명으로 오키 전체를 지배했던 이와미긴잔(石見銀山) 대관(代官;대관(代官)은 군주(국가)를 대신해 임무지의 행정 등에 임하는 직무를 진 자, 또는 그 지위를 말한다. )인 고토사토시미기에몬(後藤覚右衛門)에게 현지에 배치됐던 오키의 군다이(郡代;무로마치(室町)시대부터 에도(江戸)시대에 걸친 막부 및 제번(諸藩)에 둔 직명. 고오리부교(郡奉行)라고도 함).인 나카세단미기에몬(中瀬弾右衛門)과 도젠(島前)의 대관(代官)인 야마모토기요시미기에몬(山本清右衛門)이 연명으로 작성한 보고서다. 오키에서 오모리(大森)의 이와미대관소(石見代官所)로 운반한 건 도고(島後)의 대관(代官)이었던 마츠오카야지미기에몬(松岡彌次右衛門)이었다. 처음에 마츠오카야지미기에몬(松岡彌次右衛門)이 담당했던 안용복 등을 보살피는 일을 이어받은 게 지역의 관리였던 다카나시 모쿠사에몬(高梨杢左衛門), 가와시마 마고토효우에(河嶋理兵衛)이다. 「高梨杢左衛門,河嶋理兵衛大久村)へ遣わし置き申し候 飯米等廻し見計い、庄屋方より渡させ候につき朝鮮人悦び申す由」라고 문서에 기재되어 있다. 문서 안에 안용복 등의 일행을 태우고 온 배의 뒤주를 조사해보니 3홉 밖에 없었고, 오키지역도 마침 흉작인 해가 계속되어 쌀이 부족했지만 오쿠마을(大久村)의 쇼야(庄屋:에도시대에 마을의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가 지역에서 백미 4되5홉을 제공하고, 사이고(西郷)에 있었던 군다이간소(郡代官所/=在番)에서도 1말2되3홉의 비축미가 도착해 조선인들을 기쁘게 했다고 한다.    
                   
1、다카나시모쿠사에몬(高梨杢左衛門)에 대해                   
 필자는 오키에 다카나시 미츠오(高梨光男) 씨라는 친구가 있다. 필자는 1993년에 시마네현립 오키고등학교(隠岐高校) 교장을 지냈는데 다카나시 미츠오 씨는 그 무렵 모교인 오키고교의 영어교사였으며 그 후에 교장으로도 승진했다.    

 다카나시 씨가 다카나시모쿠사에몬(高梨杢左衛門)과 같은 성(姓)이라 모쿠사에몬(杢左衛門)에 관한 조사를 의뢰하자 오키노시마쵸(隠岐の島町)의 도고(東郷)에 있는 다카나시본가로 생각되는 집을 방문해 족보관계 고문서를 조사해 「다카나시집안 전기(高梨家前記)」라 기록된 문서를 발견해 필사하여 송부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다카나시 씨는 신슈(信州) 츠카마군(筑摩郡) 다카나시야마시타(高梨山下) 출신으로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로부터 운슈(雲州), 고모슈(隠州)의 지토직(地頭職:지토 (地頭)는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에 장원과 공령을 관리하기 위해 두었던 관직중 하나이다.) 을 부여받은 사사키(佐々木) 씨의 신하로 서하(西下)했다. 사사키 씨는 1205년에 오키의 도고(東郷)마을에 군다성(宮田城)을 구축해 다카나시 씨도 오키에 정착했다.       

 이와미긴잔(石見銀山) 대관(代官)의 지배에서 마쓰에번(松江藩)이 관리를 맡게 된 오키(隠岐)에 군다이(郡代)로 사이토 도요노부(斉藤豊宣)가 새로 부임했다. 도요노부는 1667년 에 현재의 오키의 가장 오래된 지지(地誌)로 추정되는 『은주시청합기(기)(隠州視聴合記(紀))』를 정리, 마쓰에번주(松江藩主)에게 제출했다. 「국대기(国代記)」라는 오키를 지배했던 사람들에 대해 정리한 부분에서 사사키 씨의 오키 진출을 언급하고 있는데 군다성(宮田城) 구축시기의 영주는 교고쿠뉴도츠네넨(京極入道常念)으로 교고쿠뉴도츠네이(京極入道常意)라고도 불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고쿠(京極) 씨는 사사키 씨의 일족이다. 그 후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의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1536〜65)가 쇼군(将軍)이었을 무렵, 사사키 씨는 사이고(西郷)에 고우노오성(甲尾城)을 쌓고 이주했다. 또한 사사키 씨는 오키(隠岐) 씨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오우치(大内) 씨와 아마고(尼子) 씨 등의 본토의 강한 세력에 귀속되면서 오키국(隠岐国) 영유를 이어갔지만, 아마고(尼子), 모우리(毛利)의 소란(騒乱) 중에 쇠퇴하여 모우리(毛利)일족인 요시카와(吉川) 씨의 오키 지배로 인해 섬 내에서의 권력을 잃었다.

 사사키 씨의 가신이었던 다카나시 씨는 그 후에도 도고(東郷)에 거주했지만 사사키 씨의 쇠퇴와 함께 지역에서 농업의 길을 선택했다고 「다카나시 씨 전기(高梨氏前記)」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귀농의 선조인 다카나시 칸쿠로신테루(高梨甚九郎信照/1953년 8월 2일 사망)의 계보에 「적자의 이름은 좌경(嫡子左京)」, 「둘째 아들의 이름은 모쿠사에몬(二男 杢左衛門)」이란 기재가 있다. 또한 다른 다카나시집안에 남아있는 겐로쿠시절의 마을의 관리(地役人)라는 직무를 기록한 문서인 공용선(公用船) 간논마루(観音丸)의 배의 목수(大工) 등을 장악한「간논마루 목수직(観音丸大工職)」에도 모쿠사에몬이라는 이름이 있다.     
              
2、가와시마 마고토효우에(河嶋理兵衛)에 대해
 필자는 다카나시 미츠오(高梨光男) 씨 이외에 오키 출신인 히시마 히로아키(鞁嶋弘明) 씨라는 친구가 있다. 히시마 씨는 필자가 시마네현 교육청 교육차장, 현립마쓰에기타(県立松江北)고등학교 교장을 명받았을 때 함께 필자의 후임으로 그 책무를 다하고, 퇴직 후에는 야츠카군(八束郡) 히가시이즈모쵸(東出雲町)의 정장(町長)으로 활약했는데 작년 말 68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히시마 씨에게도 히시마(鞁嶋)와 가와시마(河嶋)라는 글자의 차이는 있지만 가와시마 마코토효우에(河嶋理兵衛)에 대해 선조 중에 이름이 없는지 히시마 씨가 살아있었을 때 질문한 적이 있다. 히시마 씨는 에도시대부터 시작되는 히시마(鞁嶋) 집안의 가장의 족보를 조사해 답변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1686년 5월 26일에 사망한 쵸사에몬(長左衛門)에 이어 가헤이(嘉兵衛/1699년 7월 18일 사망), 하치베에(八兵衛/1725년 11월 19일 사망), 진베에(甚兵衛/1789년 1월 24일 사망)라는 3명의 효우에(兵衛)라는 글자가 붙은 이름의 가장이 있다. 마을의 관리를 역임했던 건 리효우에(理兵衛)였기 때문에 이 3명의 효우에(兵衛)의 남동생이나 적자 이외의 아이들 중에 리효우에(理兵衛)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가와시마(河嶋)가 히시마(鞁嶋)가 된 건 근대에 들어서로 생각되는데, 방계(傍系)의 족보에 대한 조사를 지금부터 시작하려는 참에 히시마 히로아키(鞁嶋弘明) 씨의 사망은 애석할 따름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맺음말                    
 안용복이 1696년에 오키에서 돗토리번(鳥取藩)으로 가, 추방당해 귀국해 보고한 내용과 1693년에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연행됐을 때의 보고에 쓰시마번(対馬藩) 증의 처우는 비판해도 오키에서의 자신들의 대우를 비판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1801년 이즈모대사(出雲大社)의 신직(神職)인 야다 다카토(矢田高当)가 쓴 전문서(伝聞書)인 『장생죽도기(長生竹島記)』에 1693년 요나고(米子)의 마을사람들이 안용복, 박어둔을 오키의 후쿠우라(福浦)로 연행하자 후쿠우라의 여자들이 그들이 안됐다며 마을사람들을 질책하고, 한 여인이 「웃옷을 벗어 엎드려있는 두 사람에게 덮어주자 그들도 정을 느껴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훈훈한 정경을 연출했다(上着をぬぎて伏居る二人に打かけにけり、唐人も時の情に気を休め心潤ふ風情なり)」고 한다.

 또한 1696년 돗토리번에서 추방당해 조선으로 돌아갈 때 들렀을 가능성을 추측케 하는 기술에는 후쿠우라에서는 다시 안용복 등의 일행이 찾아왔다고 떠들썩했다, 고 한다. 안용복 등의 일행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아홉 배를 하고, 다음으로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 또다시 삼배하고는 “헤어진 후 감계무량 은덕”이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마을 사람들도 모두 예의를 지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そらへ指をさして九拝をなし、次ニ集まり居る大勢に向ひ又三拝して「一別つ以後イカン無量恩徳」とちんぷんかんのわかりかねたる音声ぞかし、況浦人も皆以礼儀みださず跪き手を合、感涙流しうなづき)」, 「서둘러 이국선에 승선, 해초를 구워, 마을의 남녀노소가 해안가로 나와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훔쳤다, 또한 이국인들도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손을 들어 조선을 향해 되돌아갔다(急き異国船に打乗りけれハ、藻を焼き、浦の老若男女浜辺へ出て言葉わからぬ名残をおしみ紅涙たもとをひたす、猶唐人も名残はるかにはらはらと涙を流し手を揚げて朝鮮さして帰りける)」라고 한다.

 안용복과 오키의 관계에서는 안용복이 「옥기도(玉岐島)」와 같은 섬이 오키도(隠岐島)인지 등,  아직 검토해야할 과제는 남아 있으며 다카나시 집안(高梨家)과 가와시마 집안(河嶋家)에 대해서도 조사를 계속할 생각이다.  

사진1 무라카미집안문서에 기재되어 있는 다카나시 모쿠사에몬(高梨杢左右衛門), 가와시마 마코토효우에(河嶋理兵衛)의 이름


사진2 오키의 다카나시집안에 남아있는「다카나시가 전기(高梨家前記)」
(다카나시 미츠오=高梨光男 씨 필사)

 


사진3 안용복 등의 일행이 배를 댄 「오쿠마을 항구도(大久村湊図)」 
안용복 등의 일행이 착안한 곳도 기록되어 있다. (○표시 부분)
(시마네현립도서관 기탁)


(다케시마문제연구 고문 스기하라 다카시=杉原隆)
http://www.pref.shimane.lg.jp/soumu/web-takeshima/takeshima04/takeshima04-1/takeshima-042311.html

 

 

독도본부2011. 12. 3.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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