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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과 울릉도 근해에서의 해전

원제:日露戦争・日本海々戦と鬱陵島

들어가는 말
                                
 전에「일러전쟁·일본해 해전과 다케시마(日露戦争・日本海々戦と竹島)」라는 제목의 리포트를 간결하게 썼었다. 그 후 울릉도 부근에서도 해전이 있었으며, 특히 이 해역에서 발틱함대의 총지휘에 임했던 로제스트벤스키[(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러시아어: Зиновий Петрович Рожественский, 1848년 11월 11일 ~ 1909년 1월 14일)는 러시아 제국의 해군 제독이며, 최종 계급은 중장(러시아어: Вице-адмирал)이다.

  살아생전 별명은 '미친 개(Mad Dog -영어위키백과 참조)'였다. 러일 전쟁의 최후의 전투인 쓰시마 전투에서 일본 해군에 패배하였고 자신도 부상을 당했다.(출처: 위키백과)]사령장관 해군중장이 타는 구축함이 일본해군에게 포획되고, 전함인 「드리트리 돈스코이함(Dmitri Donskoi: 1905년 5월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된 제정러시아 발틱함대 소속의 수송선. 무게는 5,800t이다. 명칭은 14세기 리투아니아와 몽고군을 격퇴한 모스크바 대공(大公)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이 일본해군의 포격으로 손상을 입고 울릉도 연안에 표착, 침몰하고 승조원은 울릉도로 상륙해 투항했다.

  이 상황은 울릉도 군수인 심흥택에 의한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1905년 6월 1일자 「산인신문(山陰新聞)」은 큰 활자로 「일본해전 공보(日本海海戦公報)」로 울릉도 주변에서의 해전을 보도하고 있다. 이번에도 「일러전쟁・일본해 해전과 다케시마」에서도 이용한 메이지시대 박물관에서 간행된 『일러전사(日露戦史)』, 『일러전쟁실시(日露戦争実記)』를 활용해 실태를 추적해보았다.  
 

1. 울릉도 근해에서의 해전 상황 
 
                      
 1905년 5월 28일 오전, 다케시마(독도) 근처에서 발틱함대의「니콜라이 1세」등의 전함이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도고 헤이하치로(일본어: 東郷平八郎 (とうごう へいはちろう), 1848년 1월 27일 ~ 1934년 5월 30일)는 일본의 해군 제독이다. 그는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순수한 군인 생활로 인생을 마감했다. 일본인들은 그를 '군신'으로 여기며, 또 다른 별명으로 '동양의 넬슨(The Nelson of the East -영어위키 참조)'이 있다.(출처: 위키백과))가 탄 기함(旗艦)인 「미카사(三笠);일본 제국 해군의 전함으로 시키시마급 전함의 4번함이다. 나라현에 있는 미카사산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동형함으로 시키시마(敷島),아사히(朝日),하츠세(初瀬)가 있다. 1904년부터 러일 전쟁에서 연합함대의 기함으로 활약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대장이 탑승했다. 현재는 카나가와 현 요코스카의 미카사공원에 기념함으로 보존되어 있다. (출처: 위키백과)」(귀환 시에는 고장으로 기함은 「시키시마(敷島)」로 변경되었다)를 중심으로 한 일본 해군에 포위당해 투항했다. 그리고 이날 오후에 또 다른 해전이 울릉도 부근에서 일어났다.    

 오후 3시 30분경, 울릉도 남서쪽 약40해리 지점에서 동쪽방향에서 도망쳐 온 러시아의 2척의 배를 일본의 구축함인 「사자나미(漣)」와 「가게로(陽炎)」가 발견하고 추격했다. 약1시간 후, 이 가운데 1척이 백기를 내걸고 투항의 뜻을 내보였다. 그 배는 발틱함대의 구축함으로 함내에는 사령관인 로제스트벤스키 등이 타고 있었다.

「산인신문(山陰新聞)」에는 「사령장관인 로제스트벤스키 중장과 소장막료 등, 약80명이 옮겨 타고 있었으며, 모두 포로로 삼았지만 이 두 장군은 중상이었다」라고 보도했다. 여기서 옮겨 탔다는 말은 사령장관인 로제스트벤스키 등은 원래 기함인 「스와로프호」에 타고 있었지만 5월 27일의 전투로 배가 침몰했기 때문에 구축함에 옮겨 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신문의 「적의 전멸함선」이라는 페이지에는 구축함 부분에 「포획(捕獲)」한 것으로 기록하고, 350톤으로 속력은 전 함대에서 가장 빠른 28노트로 함선이 구축 된지는 3년이 되었다라고 하고 있다.

투항에 응한 「사자나미(漣)」에 대해 『일러전사(日露戦史)』 제4권은 「사령장관의 포로, 천고의 기담으로 말해야 하나, “사자나미”는 생각지도 못했던 공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司令長官の捕虜、亦千古の奇談といふべく、「漣」は亦思はざるの奇功を博せりといふべし。)」라 하고 있다.    

  한편 「가게로(陽炎)」는 다른 1척을 뒤쫓았지만 오후 6시반 경 북방해상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울릉도 부근을 탐색했던 우류 소토미치(瓜生外吉;1857년 1월 27일~1937년 11월 11일. 대일본제국의 해군군인. 최종계급은 해군대장. 이시가와현(石川県) 출신. (출전: 위키백과)) 중장이 지휘하는 「치토세(千歳)」등은 적함인「드리트리 돈스코이함」을 발견, 추격하여 울릉도 남쪽 약30해리에서 포격전이 있었지만 격침하지 못하고 밤이 깊어져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인 29일 아침, 부상이 깊은 모습으로 울릉도 동남쪽 연안에 표착해 침몰하기 직전인 이 배를 발견했다. 전날 놓쳤던「돈스코이함」이었다.

「돈스코이함」에 대해 「산인신문」은 「또 오후 5시 북서쪽에서 전함 (돈스코이함/장갑순양함 6200톤)을 발견, 제4전대 및 제2구축대가 이를 뒤쫓아 맹렬히 포격을 가했지만 격침하지는 못하였고 밤이 되어 구축함이 이를 기습 공격했지만 다음날 아침 돈스코이함은 울릉도에서 좌초되어 움직이지 못했다」고 하고 있다. 『일러전사(日露戦史)』는 「돈스코이함」은 울릉도 근처에서 격침된 순양함으로 취급되고 있다. 『일러전쟁실기(日露戦争実記)』 제75편(1905년 6월 13일 발행)은 「돈스코이함의 격침」이라는 페이지를 마련해 상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

  아침, 울릉도 항구 내에 닻을 내리고 있는 이 배를 발견하고 신호로 항복을 권유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울릉도 상륙을 시작했다. 그 동안 배는 점차 기울어 오전 8시경에 침몰했다. 일본 측은 보트로 선장을 소환하려했지만 선장은 중상을 입어 보행이 불가능하다고 부선장이 일본선으로 알려왔다. 상황을 질문하자 어제와 어제 밤의 전투로 일본 측 수뢰 6발을 맞아 배 안으로 물이 심하게 들어와 전원이 철야로 배수를 했지만 효과가 없어 배는 침몰했다고 한다. 부선장은 자신들이 무리해서 쓰시마수도(対馬水道)를 통과하려고 한 건 무모하고 어리석은 방법이었다고 눈물을 흐렸다고도 쓰여 있다.

2. 황성신문에 실린 「심흥택 보고」  

 이「돈스코이함」에 대해서는 서울에서 간행됐던 1905년 8월 10일자 (대한광무9년 8월 10일자)「황성신문(皇城新聞)」이 울릉도의 군수인 심흥택으로부터의 보고를 기초로 한「울릉공보(鬱島公報)」로 보도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울릉 군수 심흥택 씨의 보고에 따르면, 군의 향장(郷長)인 전재항(田在恒)으로부터의 보고로 음력 4월 25일에 울릉도 앞의 서남쪽 먼 대양에서 큰 뇌우 소리가 들려왔다. 일몰 후에는 뇌화(雷火)가 점차 도동(道洞)의 앞 바다로 다가와 대포가 연이어 발사되는 것 같았다. 잠시 조용해진 후에 심야에 한 척의 대전함(大兵艦)이 섬 앞으로 와서 정박하고, 승조원이 순서대로 상륙해왔다. 밤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지 러시아인지 몰랐지만, 다가가 보자 러시아병사였다는 급보가 도착하여 현지로 가서 사정을 확인하려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다음날, 날이 밝을 즈음에 러시아병사 여러 명이 상륙한 후에 그 러시아함정은 앞바다를 조금 물러나 스스로 가라앉았으며(自沈), 육지로 올라온 선장 1명, 부선장 1명, 군졸 774명은 백기를 내걸고 항복의 뜻을 내보였지만 이날 사시(巳時;열두 시의 여섯째 시(時). 곧 오전(午前)9시부터 11시까지의 동안을 가리킴.)경에 일본의 전함(兵艦) 1척이 저동(苧洞)으로 와 항복한 러시아병사들을 태워 떠났다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일본의 병함(兵艦)에 대해 『일러전사(日露戦史)』는 「이 함정의 생존자는 「카스가(春日)」, 「후부키(吹雪)」 등에 구조되어 수용되었다」라고 하고 있다.            

 이 보고에 나오는 심흥택(沈興澤), 전재항(田在恒)에 대해서는 다음 해인 1906년 3월 28일에 시마네현 제3부장 진자이 요시다로(神西由太郎)를 단장으로 한 다케시마조사단(竹島調査団)이 다케시마(독도) 조사 후 울릉도에 들렀을 때 면회한 사실이 오쿠하라 헤키운(奥原碧雲)의 『다케시마 및 울릉도(竹島及鬱陵島)』에 쓰여 있다.

  심흥택에 대해서는 「군수 심흥택을 면회하다. 군수는 경성 사람으로 연령은 52세, 너그러운 인상으로 방석위에 꿇어앉아 흰 옷을 입고 관을 썼으며 긴 담뱃대를 지니고 옆의 책상에 여러 권의 부책(簿冊;돈이나 물건(物件)의 드나드는 셈을 적어 두는 책.)이 있을 뿐, 간단하고 소박한 태고 느낌이었다(郡守沈興澤に面会す。郡守は京城の人、年歯五十二、寛裕の相を備へ座布団の上に跪座し、白衣を着し、冠をつけ、長煙管を携へ、傍なる机上に数部の簿冊あるのみ、簡単素朴頗る太古の風あり)」고 되어 있으며, 전재항에 대해서는 밭전(田) 자를 유(由)자로 잘못하여 유재항(由在恒)으로 하고 있으며, 사상의소(士商議所)의 소장 고문이라는 직함을 기록하고 있다.

  심흥택에 대해 오쿠하라 헤키운은 「행정상의 질문에 대해서는 많은 요령을 얻지 못했다(行政上の質問に対しては、多くは要領を得ざりき。)」라며, 일본인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이번 『다케시마 및 울릉도(竹島及鬱陵島)』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 다케시마(독도) 시찰원의 시가(詩歌)를 편집한 것이라는 「한조여운(寒潮余韻)」에서는 심흥택이 「진자이 사무관에게(呈神西事務官)」라며 단장인 진자이 요시다로(神西由太郎)에게 보낸 한시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는 「海道茫々両々晴 汽船南到報昇平 従此両国情還密 一色桃花満春城」라며 이번의 내방이 양국의 우호로 이어질 것이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11.10.21 연구협력원 보고


▲사진1 울릉도 부근에서의 해전도
울릉도 남서쪽에 사령관이 타는 구축함 포획당한 지점(청색 동그라미 안), 정 가운데에 「돈스코이함」이 일본해군의 수뢰(水雷)를 맞은 지점(녹색 동그라미 안)이 붉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다. (『일러전사(日露戦史)』게재)

 
  ▲사진2 구축함(우측 끝)을 연행 중인 구축함「사자나미(漣)」(좌측) _『일러전사(日露戦史)』게재


▲사진3 침몰한 배에서 울릉도로 러시아병사가 상륙한 것을 보고한 심흥택
(사진은 1906년 울릉도를 방문한 시마네현 조사단과의 기념사진, 중앙이 심흥택)_시마네현립도서관 소장

 11.4.
▲사진4 심흥택의 보고를 게재한 「황성신문(皇城新聞)」아래는 「울릉공보(鬱島公報)」의 부분

 

독도본부 2011. 11. 2.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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