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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한국이 모르는 10가지 독도의 허위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11.07.20



제3회 「일본은 울릉도로 건너가는 정박장 및 어채지(漁採地)로 다케시마(독도)를 이용해 늦어도 17세기 중엽에는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습니다.」(일본 외무성)의 정당성 (2011년 7월 20일 게재)

동북아역사재단은 일본 외무성이 간행한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의 포인트(竹島問題を理解するための10のポイント)」가운데, 「3.일본은 울릉도로 건너가는 정박장 및 어채지로 다케시마(독도)를 이용해 늦어도 17세기 중엽에는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습니다(日本は、欝陵島に渡る船がかり及び漁採地として竹島を利用し、遅くとも17世紀半ばには、竹島の領有権を確立しました。).」를 아래와 같이 요약하고, 다음의 1~3을 근거로 삼아 「일본의 주장은 이렇기 때문에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요약】
「‘일본은 17세기 중엽에 독도 영유권을 확립했다, 에도시대 초기(1618년), 돗토리번(鳥取藩) 요나고(米子)의 주민인 오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의 두 집안은 막부 때부터 울릉도도해면허를 받아 울릉도에서 독점적으로 어업을 하여 전복을 막부 등에 헌상했다. 즉, 일본은 울릉도로 건너가기 위해 항행 목표와 도중 정박장으로, 또는 강치 포획과 전복 채취하기 좋은 어장으로 독도를 이용해 늦어도 17세기 중엽에는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했다. 」


【한국 측의 비판 1】
도해면허는 자국의 섬으로 도해하기 위해서는 필요 없는 문서다. 이를 보면 일본이 울릉도 및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날조】
 동북아역사재단은 도해면허를 오해하고 있다. 전국시대(戦国時代)부터 에도시대(江戸時代) 초기에 걸쳐 무역 등을 위해 국외로 나가는 경우에 발급된 건 주인장(朱印状;쇼군이나 다이묘의 주인(朱印)이 찍힌 공문서. 주인(朱印)이 찍힌 명령 문서를 말함. )이라는 것이다. 주인장(朱印状)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에도막부의 쇼군(将軍) 등, 시대의 권력자의 주인(朱印)이 날인되어 있었다. 이와 비교해 돗토리번(鳥取藩) 요나고(米子)의 오오야집안(大谷家)과 무라카와집안(村川家)에 발급된 도해면허는 로쥬(老中;에도막부의 쇼군 직속으로 정무를 담당하던 최고 책임자) 등 막각(幕閣; 에도막부의 최고수뇌부)이 연서한 봉서(奉書; 고위자가 의사 및 명령 등을 특정인에게 전달할 때, 가신 등의 하위자에게 한 번 그 내용을 구두 등으로 전해 하위자가 자기 명의로 그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작성해 전달 대상자인 특정인에게 발급하는 형식을 취한 것.고위자가 직접 특정인에게 문서로 발급한 직장(直状)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형식을 취하며, 죽도(竹島=울릉도=欝陵島)에 대한 독점적 「도해」가 허락되었다. 사실, 에도막부가 1635년에 일본인의 해외왕래를 금했어도 오오야와 무라카와 두 집안에 의한 죽도(竹島=울릉도)로의 도해는 그 후에도 계속됐다. 이는 막부가 죽도(竹島=울릉도)를 외국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증좌다.

 또한 1643년, 조선통신사의 요청에 응해 막부의 (儒臣; 1. 유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 또는 2. 홍문관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인 하야시 가호(林鵞峰)와 하야시 돗코사이(林読耕斎)가 편집한 『일본국기(日本国記)』(「은기국(隠岐国)」조(条))에는 「은기 해상에 죽도 있다. 대나무가 많고, 전복이 많다. 맛은 무척 뛰어나다. 강치를 아시카라고 부른다(隠岐の海上に竹島あり。竹多く、鰒多し。味甚だ美。海獣を葦鹿という)」라고 기록되어 죽도(竹島=울릉도)가 일본령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는 마찬가지로 유신(儒臣)인 히토미 치쿠도(人見竹洞)의 『첨장일록(添長日録)』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666년, 죽도(竹島)로 도해한 오오야 집안의 배가 조선(朝鮮)에 표착했을 때, 히토미 치쿠도(人見竹洞)는 막부의 명으로 조선정부가 보낸 서간을 일본어로 번역하게 되었다. 그때, 히토미 치쿠도(人見竹洞)는 요나고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죽도(竹島=울릉도)로 도해하게 된 경위를 직접 하야시 가호(林鵞峰)로부터 들었다. 이는 1618년, 이케다 미츠마사(池田光政=마츠다이라 신타로=松平新太郎)가 하리마(播磨)에서 이나바(因幡)・호키국(伯耆国=돗토리번=鳥取藩)에 입부할 때, 감사(監使)인 아베 마사유키(阿倍四郎五郎=阿倍正之)의 알선으로 요나고(米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죽도를 왕래(竹島に来往)」하게 된 전말이다. 하야지 가호(林鵞峰)는 이를 「是、昔日、正之の談ずる所」라며, 아베(阿倍正之)가 직접 한 얘기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도해면허도 1695년 12월, 막부가 돗토리번(鳥取藩)에 「반납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에 다음해인 1696년 2월에 반납되었다. 죽도(竹島)는 조선령인 울릉도라고 한 쓰시마번(対馬藩)의 진언을 받아들여 막부가 죽도(竹島=울릉도=欝陵島)로의 도해를 금했기 때문이다. 「도해면허(渡海免許)는 자국 섬에 도해하기 위해서는 필요 없는 문서」라고 한 동북아역사재단의 비판은 역사적으로 근거 없는 주장이다.
 

【한국 측의 비판 2】
17세기 중엽의 일본 고문헌인 『은주시청합기(隠州視聴合記)』(1667년)에는 「일본의 서북쪽 한계를 은기도로 한다(日本の西北側の限界を隠岐島とする)」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일본이 울릉도・독도를 자국(일본) 영토에서 제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날조】
 『은주시청합기(隠州視聴合記)』(1667년)의 기술을 근거로 동북아역사재단은 「당시 일본이 울릉도・독도를 자국 영토에서 제외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논거로 삼고 있는『은주시청합기』에 수록되어 있는「국대기(国代記)」에 「일본의 서북쪽 한계를 은기도로 한다(日本の西北側の限界を隠岐島とする)」고 한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은주시청합기』는 1667년 10월, 마쓰에번(松江藩)의 사이토 호센(齋藤豊仙)이 편찬했던 지지(地誌; 그 지방의 자연·인문 등에 관한 책.)다. 당시 은주(隠州=은기도=隠岐島)는 마쓰에번이 맡은 지역으로 행정은 마쓰에번이 담당했다. 이 마쓰에번의 사이토 호센(齋藤豊仙)이 군다이(郡代;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부터 에도시대에 걸친 막부 및 번(藩に)에 설치된 직명(職名))로 은기도(隠岐島)로 부임하는 게 1667년 8월, 돗토리번(鳥取藩) 요나고(米子)의 오오야집안(大谷家)이 울릉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선에 표착했던 다음 해이다. 『은주시청합기』에 죽도(竹島=울릉도)가 마쓰에번의 호칭인 기죽도(磯竹島)로 등장한 것도 막부의 허가를 얻은 오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의 두 집안이 울릉도로 건널 때 은기도를 중계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은주시청합기』의「남방촌(南方村)」조(条)에서 「기죽도로 건너는 자(磯竹島に渡る者)」, 후쿠우라(福浦)의 벤자이텐(弁才天女;불교 수호신 중에 하나. 힌두교의 여신인 사라스바티(Sarasvatī)가 불교 또는 신도에 흡수된 호칭임. )에서 바람을 기다리며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기원했다(帰帆の無事を祈った)」는 건 오오야・무라카와 집안을 말한다. 

 하지만 동북아역사재단은 이 사이토 호센(齋藤豊仙)이 「일본의 서북쪽 한계를 은기도(日本の西北側の限界を隠岐島)」로 했다며 『은주시청합기』에 수록되어 있는 「국대기(国代記)」를 증거로 「당시, 일본이 울릉도・독도를 자국(일본) 영토에서 제외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 한문으로 쓰인 「국대기(国代記)」에는 어떻게 기술되어져 있는 것일까. 해당 부분을 현대어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은주(隠州)는 북해(北海) 안에 있다. [분주(分註), 아마 해중(海中)이라는 말은「멀다」라고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의 이름인 것 같다].  이 남동(南東)쪽에 있는 것을 도젠(島前)이라 한다. 치부군(知夫郡)・아마군(海部郡)이 여기에 속하고 있다. 그 동쪽에 위치하는 게 도고(島後)라 한다. 스키군(周吉郡)・오치군(穏地郡)이 여기에 속한다. 정부는 스치군(周吉郡)의 남쪽 해안인 사이고(西郷)의 도요사키(豊崎)에 있다. 여기서부터 남쪽의 운주(雲州)의 미호노세키(美穂の関)까지의 거리는 35리(里). 남동쪽의 하쿠슈(伯州)의 아카사키우라(赤碕浦)까지의 거리는 40리(里). 남서쪽의 (石州)의 (温泉津)까지의 거리는 58리(里). 북쪽에서 동쪽까지의 사이에는 지역이 없다 북서(北西)의 사이에는 이틀하고 하룻밤을 가면 송도(松島/ 현재의 다케시마=독도)가 있다. 그리고 하루거리에 죽도(竹島/ 현재의 울릉도) [분주(分註; 본문 사이에 두 줄로 나누어 작은 글씨로 주를 닮. 또는 그렇게 다는 주), 기죽도(磯竹島)라 말한다. 대나무(竹)・생선(魚). 강치(海鹿)가 많다]가 있다. 이 두 섬은 무인도로 조선이 보이는 건 이즈모(出雲)에서 은주(隠州=은기도=隠岐島)를 바라보는 것과 같고 때문에 일본의 북서쪽 땅은 이 주(州)를 한계로 한다.

 사이토 호센(齋藤豊仙)이 「국대기」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의도는 명확하다. 사이토 호센은 아래의 그림과 같이 은기도(隠岐島)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은주(隠州=은기도=隠岐島)를 기점으로 사방의 일본령과의 관계를 거리로 표시했던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기점을 은기도(隠岐島)로 둔 이상, 사이토 호센이 은주(隠州)를「일본의 서남쪽 한계(日本の西北側の限界)」로 하는 일은 없다. 이를 동북아역사재단은 무엇을 근거로 은기도(隠岐島)를 「일본 서북쪽 한계(日本の西北側の限界)」로 한 것일까. 그건と「일본 북서쪽 땅은 이 주를 한계로 한다(日本の北西の地は、この州を限りとする)」고 한「이주(この州)」를 그대로 은주(隠州)의 「주(州)」로 읽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동북아역사재단의 해석은 두 가지 점에서 올바르지 않다. 이는 문장의 의미와 한문해석이라는 면에서이다. 우선, 사이토 호센은 은기도를 기점으로 죽도(竹島=울릉도)는 북과 서의 사이에 있다고 했다. 이어 사이토 호센이「일본의 북서의 땅은 이 주를 한계(日本の北西の地は、この州を限り)」로 한 논거는 「조선이 보인다(朝鮮が見える)」에 있다. 원문에는 「見高麗、如自雲州望隠岐。然則日本之乾地、以此州為限矣」(고려(=조선이라는 뜻)를 보는 것, 운주(雲州)에서 은기(隠岐)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는 일본의 북서의 땅, 이 주를 한계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한문을 해석하는 포인트는 「然則」이라는 말에 있다. 이는 「그렇다면 이는」이라 읽고, 앞의 문장을 이어받아 뒤의 문장을 잇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이토 호센이 「한계(限り)」(경계)로 한 근거는 앞 문장의 「조선이 보인다(朝鮮が見える)」에 있으며, 이국(異国)인「조선이 보인다」는 게 경계로 한 이유였던 것이다. 「국대기(国代記)」 중에 「일본의 북서의 땅(日本の北西の地)」이라 표현한 것은 이국인 조선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은기도(隠岐島)에서는 「조선이 보이는」것일까. 사이토 호센이 「보인다(見える)」고 한 건 죽도(竹島=울릉도)이다. 「이 주(この州)」를 은주(隠州)로 한 동북아역사재단의 한문해석은 올바르지 않다.

 그럼 왜 동북아역사재단은 「이 주(この州)」를 은주(隠州)로 해석한 것일까. 이는 「섬(島)」을 「주(州)」로도 표기하는 한문의 독특한 읽는 법을 무시한 것에 기인한다. 사실, 「섬(島)」을 「주(州)」로 표기하는 예는 조선에도 있다. 이익;( 조선 후기 실학자).은 일본과 조선의 울릉도 영유권 다툼을 논하며, 울릉도를 「一주(州)(一섬(島))」(주1)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북아역사재단은 근거가 없는 채 「국대기(国代記)」에 기재된 「이 주(この州)」를 「은주(隠州=은기국=隠岐国)」이라 했다. 이는 나고야대학의 이케우치 사토시(池内敏) 씨가 「이 주(この州)」를 은주(隠州=은기국=隠岐国)이라 읽었기 때문에 이를 기화(奇貨: 이용하면 뜻밖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일이나 기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케우치 사토시 씨의 연구(주2)는 『은주시청합기』전권(全巻)에 등장하는 「이 주(この州)」의 용례를 모두 검토한다는 기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은주시청합기』의 「국대기」는 적어도 「은주(隠州)」, 「민부도장일(民部図帳曰)」, 「고로전일(古老伝曰)」로 시작되는 3개의 문장으로 구성되며, 문장으로는 개별적으로 완결되고 있다. 따라서 「이 주(この州)」도 당연한 일이지만, 위의 현대어 번역을 한 「국대기」안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이케우치 사토시 씨는 『은주시청합기』권2의 「원곡촌(元谷村)」조(条)에 「隠州戌亥之極地」(은주(隠州)는 서북 끝의 땅)이라 한 기술이 있다며, 이를 근거로 「국대기」의 「日本之乾(戌亥)地、以此州為限矣」의 「차주(此州)」도 은주(隠州)를 가리키고 있다, 고 말한다.

 하지만 언뜻 보면 학술적으로 보이는 이 이케우치 씨의 연구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이케우치 씨가 근거로 삼은 「隠州戌亥之極地」이라 문장은 사이토 호센이 원곡촌(元谷村)의 일월제(日月祭)에 대해 사견을 말한 아래의 안어(按語:자기 견해를 밝힌 말.) 안에 있으며, 이는 「隠州戌亥之極地」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 일월제, 오래된 선인이 남긴 법인가. 책에서 말하길 (후략)(按ずるに、此の日月の祭、古の遺法か。書に曰く、「昧谷、寅(謹ん)で日(太陽)を納め餞(送)る)」. 本朝、またかつてこの礼を行うか。隠州は戌亥の極地、昧暗なり。元の音と相近きなり。上古、この地において日を納め餞る。またいまだ知るべからず。古を好む人のため、しばらく記してこれに備う)」

 이 안어(按語)를 보면, 이케우치 씨가 주장하는 것 같은「隠州戌亥之極地也」라고 한 기술은 없으며, 「隠州戌亥之極地、昧暗也」라고 기재되어 있다. 실은 이 안어(按語)에서는 이케우치 시가 전하지 못했던 「昧暗なり」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이토 호센은 태양의 신(八王子社の日神)과 죠라쿠지(常楽寺)의 달의 신(月神)을 합제(合祭)하는 원곡촌(元谷村)의 일월제(日月祭)를 고증하고, 이 일월제의 유래를 은주(隠州)가 「매암(昧暗)」이라는 것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안어(按語) 안에서 원곡촌(元谷村)의 일월제를 『서경(書経)』(「매곡(昧谷/태양이 지는 곳=어두운 계곡=暗い谷=해가 들어가는 계곡=日が入る谷), 신중히 해를 거두어 보내다(寅(謹ん)で日を納め餞(送)る)」)에서 유래하는 「오래된 선인이 남긴 법(古の遺法)」이라 하고, 그 근거를 『서경(書経)』의 「매곡(昧谷)」과 원곡촌(元谷村)의 음(音)이 가까운 은주(隠州)가 「매암(昧暗)」이라는 것에 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때 사이토 호센이 「은주는 술해의 극지(隠州は戌亥の極地)」라 한 것은 일본 본토에서 봤을 때 은주(隠州)가 태양이 지는 곳, 「매곡(昧谷)」「매암(昧暗)」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케우치 사토시 씨는 중요한 「매암(昧暗)」을 무시하고 「隠州戌亥之極地」만을 금과옥조로 삼아 「국대기」의 「일본의 북서의 땅은 이 주를 한계로 한다(日本の北西の地は、この州を限りとする)」의 「이 주(この州)」도 은주(隠州)인 것이다, 라고 역설(주3)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이토 호센의 안어(按語)와 마찬가지로 견강부회(牽強付会: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억지로 합리화시킴)의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원곡촌(元谷村)」조(条)에서 「은주는 북서 끝의 땅(隠州は戌亥(北西)の極地)」이라 한 「북서(北西)」와, 「국대기」의 「일본의 북서의 땅(日本の北西の地)」에서는 「서북(西北)」이라는 기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국대기」는 은기도(隠岐島)를 기점으로 삼아 그 서북에 위치하는 섬을 일본의 한계(경계)로 삼았다. 「원곡촌(元谷村)」조(条)에서 「은주는 북서 끝의 땅(隠州は戌亥の極地)」이라 한 것은 일본 본토가 기점이 되고 있다. 동일한 「북서(北西)」라도 닮았지만 다른 것이라 하겠다. 일본 본토에서 보아 「은주는 북서 끝의 땅(隠州は戌亥(北西)の極地)」이라 한「원곡촌(元谷村)」조(条)를 근거로 은기도(隠岐島)를 기점으로 「일본의 북서의 땅은 이 주를 한계(日本の北西の地は、この州を限り)」로 삼은 「국대기」의 「이 주(この州)」를 은주(隠州=은기국=隠岐国)이라 하는 건 견강부회, 이케우치 씨의 궤변이다.

 이케우치 사토시 씨는 이 외에도 「이 주(この州)」의 용례를 『은주시청합기』전체에서 찾아, 「이 주(この州)」는 은주(隠州)를 가리키고 있고, 「국대기」의 「이 주(この州)」도 은주(隠州)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은주시청합기』는 은주(隠州)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국대기」이외의 「이 주(この州)」가 은주(隠州)를 가리키는 건 자연스럽다. 이를 문맥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국대기」의 「이 주(この州)」에 끼워 맞춰 이를 「은주(隠州)」라고 강변하는 건 한문을 읽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토 호센이 「이 주를 한계(この州を限り)」라 한 것은 「이 주(この州)」에서는 이국(異国)인 「조선이 보이기(朝鮮が見える)」 때문이었다. 그런 사이토 호센의 의도에 맞지 않게 「국대기」의 「이 주(この州)」를 은주(隠州)라 하는 건 궤변이다. 한문에서는 「주(州)」는「섬(島)」으로도 읽는다. 한문은 한문으로 읽고, 문장에 따라「국대기」의 「이 주(この州)」를 죽도(竹島=울릉도)로 읽는다면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이 한문해석의 상식을 무시하고 「국대기」의 「이 주(この州)」를 「은주(隠州)」라 비판한 동북아역사재단도 비상식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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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1)안정복(安鼎福)『성호사설류선(星湖僿説類選)』(「명문당(明文堂)」간행)권9의           하(下), 「울릉도(欝陵島)」301페이지.
 (주2)이케우치 사토시(池内敏)「전근대 죽도의 역사학적 연구서설(前近代竹島の歴史学           的研究序説)」(『청구학연구논집(青丘学研究論集)』25.2001년 3월). 이 논문은           2005년 12월, 한국의 『독도논문번역선 2』(다다미디어)에 수록되었다.
 (주3)이케우치 사토시(池内敏)「죽도/독도논쟁이란 무엇인가(竹島/独島論争とは何か)」          (『역사평론(歴史評論)』2011년 5월호)25페이지.


【한국 측의 비판 3】
17세기 말, 일본의 막부가 울릉도도해를 금지할 때, 「죽도(竹島=울릉도) 외에 돗토리번에 부속된 섬이 있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돗토리번은 「죽도(竹島=울릉도), 송도(松島=독도)는 물론, 이 외에 부속된 섬은 없다」고 답변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돗토리번의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날조】
 쓰시마번(対馬藩)은 1693년 이래, 막부의 명을 받들어 조선정부와 죽도(竹島=울릉도)의 영유권을 다투어 왔다. 하지만, 조선 측과의 교섭에 임한 쓰시마번은 이 죽도(竹島)가 조선의 『동국여지승람(東国輿地勝覧)』에 기록된 울릉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번주(藩主)인 소우 요시츠구(宗義倫)의 요절을 계기로 교섭중단을 막부에 청원하기로 한 것이다. 쓰시마번의 진언을 받아들인 막부는 1696년 1월 28일, 죽도도해를 금하지만, 이에 앞서 막부는 전년도인 1695년 12월 24일, 돗토리번에게 죽도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울릉도와 독도가 돗토리번의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는 건 이때의 돗토리번의 답변이다.

 하지만 이 답변내용은 돗토리번으로서는 당연했다. 돗토리번의 답변 중에 「松平新太郎領国の節、御奉書をもって仰せ付けられ候旨承り候」(마츠다이라 신타로(松平新太郎)가 돗토리번(鳥取藩)의 영지(領地)를 받았을 때, 봉서(奉書)를 통해 도해가 허락되었다고 들었다)라고 되어 있을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는 돗토리번의 영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츠다이라 신타로(松平新太郎=池田光政)가 이나바(因幡)・호키국(伯耆国=돗토리번)의 32만석을 받는 건 1617년 3월 6일. 한편 돗토리번 요나고의 오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 집안이 죽도도해를 허락 받은 건 이케다 미츠마사(池田光政)가 이나바(因幡)・호키국(伯耆国)에 입부한 1618년 3월 14일 이후이다. 막부로부터 부여 받은 돗토리번의 영지에는 처음부터 죽도(竹島)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히토미 치쿠도(人見竹洞)의 『첨장일록(添長日録)에도 있는 것처럼 요나고(米子)의 무라카와(村川市兵衛)가 죽도(竹島)로의 도해허가를 얻은 건 마츠다이라 신타로(松平新太郎)가 이나바(因幡)・호키국(伯耆国)에 입봉(入封: 토지를 부여 받아 그 영지로 들어가는 것을 말함.)할 때 감사(監使)인 아베 마사유키(阿倍四郎五郎=阿倍正之)의 알선으로 실현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막부로부터 「죽도(竹島=울릉도)는 언제부터 이나바(因幡)・호키국(伯耆国)에 부속된 것인가? 마츠다이라 신타로(松平新太郎)가 영지를 배령(拝領)받기 이전부터인가? 아님 그 이후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돗토리번 입장에서는 「죽도(竹島=울릉도), 송도(松島=독도)는 물론, 기타 부속된 섬은 없다」고 답하는 건 당연하다. 이를 확대해석해 돗토리번의 답변을 근거로 일본 측이 죽도와 송도를 일본령에서 제외한 증거라고 하는 건 허위의 역사날조이다.

 

독도본부2011.09.15.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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